그런데 영화를 사랑하는 그의 친구들이 그 농사터에서 영화제를 열었다. ‘너멍굴 영화제’가 그것이다. 작년에 이어 올해가 두 번째란다. 논바닥에 텐트를 치고 스크린을 설치하고, 불을 밝혀 하룻밤 동안 영화를 상영한다. 그 친구들이 말하는 ‘너멍굴 영화제’는 불편함을 누리는 영화제이다.
휴대폰이 작동되지 않는 골짜기, 먹고, 씻고, 잠자는 것이 불편한 곳, 그래서 오히려 더 많은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영화제란다. 영화제를 소개하는 제목이 ‘무엇이 되지 않아도 괜찮은, 여기’라고 적혀 있었다.
무엇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을 생각하면, 그 친구들의 말이 맞다. ‘특별한 내’가 되려는 것에서 벗어나면 누릴 수 있는 행복과 기쁨이 더 없이 가득하니까.
▲영화제의 ‘불편한’ 상영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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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러는 마치 무대 위에 서 있는 사람처럼 ‘지금, 여기’에 강렬한 스포트라이트를 비추고, 특별하지 않아도 춤추듯 살라고 말한다. 춤추듯 산다는 것은 진지하게 오늘 이 순간을 마주하는 것이다. 그렇게 ‘오늘 여기’에서 춤추다 보면 어느덧 우리는 목적지에 도달하게 될 것이고, 그런 사람은 어떤 길을 걸었든, 언제 끝나든 완결된 삶을 산 것이라고 말한다. 신앙의 길도 다르지 않다.
트라피스트 수도회 수도사였던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은 최고의 영적 성숙은 ‘보통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했고, 브레넌 매닝(Brennan Manning)은 이것을 “평범한 자아가 곧 비범한 자아”라는 말로 바꾸었다. 내가 특별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오늘을 진지하게 사는 삶이야말로, 참으로 비범하고 특별한 삶이란 말이다.
밥 먹을 때는 밥 먹는 것을 오롯이 즐기고, 길을 걸을 때는 걷는 것에 집중하고, 사람을 만날 때는 사람에 집중하면서 내게 주어진 시간을 허투루 대하지 말아야 한다. 그 때 우리가 서있는 자리가 ‘무엇이 되지 않아도 괜찮은, 여기’가 된다.
우리교회가 그런 ‘여기’면 좋겠다. 나를 과장하지 않아도, 허세를 부리지 않아도, 과거의 이력을 들먹이지 않아도, 있는 모습 그대로 나를 수용하고 다른 이를 받아들일 수 있는, 그래도 외롭거나 쓸쓸하지 않고 허락하시는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있는 ‘무엇이 되지 않아도 괜찮은’ 평범한 ‘여기’ 말이다.
서중한 목사
크리스찬북뉴스 편집위원, 다빈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