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순례자 반 고흐
영혼의 순례자 반 고흐

캐슬린 에릭슨 | 안진이 역 | 청림출판 | 372쪽 | 17,000원

이 책은 신앙의 눈으로 바라본 반 고흐의 삶과 작품세계를 탁월하게, 그리고 정교하게 전개하고 있다. 우선 저자는 반 고흐를 천재나 광인 또는 성직자의 길을 포기하고 신앙을 버린 화가로 보는 일반적인 관점을 거부하고, ‘영적인 삶’이야말로 반 고흐의 삶과 신앙과 회화를 총체적으로 이해하는 결정적인 관점이라는 것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 있다.

본서를 통해 독자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게 된다: “왜 이런 영적 시각은 늘 무시당하거나 잘못 이해되었을까?” 물론 반 고흐가 영적이고 종교적인 눈으로 사물을 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에릭슨이 처음 발견한 것은 아니다.

마틴 E. 마티(시카고 대학 신학부 명예 교수)에 따르면 “그 정도는 전시장을 돌아다니거나 인쇄된 도판을 살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명백히 알아볼 수 있다. 에릭슨은 20세기 중반 활약한 탁월한 신학자 폴 틸리히의 견해를 빌렸다(추천의 글 중에서, 22쪽)”.

저자 자신은 ‘감사의 글’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나는 지금까지 진짜 반 고흐 이야기를 풀어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굳은 확신을 가지고 어떤 강력한 힘에 이끌려 이 책을 집필했다. 원고가 책으로 완성되어 눈앞에 놓인 모습은 내게 일생일대의 기쁨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26쪽)”.

그는 ‘머리말’에서 “반 고흐가 남긴 수많은 편지들을 처음 접했을 때, 나는 종교적인 믿음이 그의 일생을 매우 깊게 관통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편지는 성경 구절과 기도, 전도사 시절 이야기, 전통적 종교 사상과 근대적 사상을 두고 가족들과 논쟁을 벌여가며 갈등했던 내용, 반 고흐 예술의 기초를 이루는 종교적 개념들로 채워져 있었다. 하지만 연구를 시작하고 보니 반 고흐의 삶을 주제로 한 연구 논문에서 그의 종교적 관심사는 별로 종요하게 다루어지지 않고 있었다”고 말한다(28쪽).

일반적으로 전기 작가들은 반 고흐가 교단을 떠나 화가로 새 출발을 한 1880년부터는 종교와 무관한 삶을 살았다고 생각했다. 젊은 시절의 기독교 신앙이 반 고흐의 예술적 견해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도 드물었다.

그러나 저자는 반 고흐의 영적 순례는 중단 없이 이어졌다는 점을 입증하고자 한다. 반 고흐는 신앙 교육을 받은 젊은 시절과 복음주의 신앙을 가졌던 시기에 이어 종교와 근대성(modernity)의 갈등을 겪다가, 마침내 삶과 예술에서 모두 종교와 근대성을 종합해내기에 이르렀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29쪽).

저자에 따르면, 화가로서 반 고흐의 삶은 신앙생활을 했던 과거의 삶과 일치했다. 이 책은 특히 반 고흐의 작품 가운데 비교적 덜 유명한 종교화 3부작 <피에타>, <나사로의 부활>, <선한 사마리아인>이 지닌 예술적, 종교적 의미를 최초로 깊이 있게 논하고 있다. 또 <씨 뿌리는 사람>, <까마귀가 나는 밀밭>, <별이 빛나는 밤>처럼 매우 유명한 작품에 숨어 있는 영적 요소들을 살펴본다.

반 고흐는 특히 두 권의 책을 손 가까이 두고 매일 읽었다. 하나는 토마스 아 켐피스(1380-1471)의 <그리스도를 본받아>였고, 다른 하나는 존 버니언(1628-1688)이 쓴 <천로역정(The Pilgrim's Progress)>이었다.

“반 고흐에게는 <천로역정>과 <그리스도를 본받아>가 그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안내자와 같은 책이었다. 그는 이 두 권의 책을 통해 지상의 삶은 시련과 고뇌로 가득 차 있으며, 천상의 예루살렘(Heavenly Jerusalem)에서 하나님과 재결합하는 궁극적인 영광을 위해 위험을 뚫고 함정을 피해 나아가는 일종의 여행길이라는 견해를 갖게 되었다(88-89쪽)”.

그는 <그리스도를 본받아>에 녹아 있는 사상을 전적으로 수용했고, 편지에서도 몇 번이나 그 책을 구체적으로 언급했다. 반 고흐는 <그리스도를 본받아>가 자기 삶에 미친 영향을 동생 테오에게 설명하면서 ‘숭고한 책’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89쪽).

반고흐
▲빈센트 반 고흐, 별이 빛나는 밤, 1889년, 뉴욕 현대미술관
그는 <그리스도를 본받아>에 나오는 종교적 금욕주의를 서슴없이 받아들였고 스스로에게 일체의 육체적 쾌락이나 안락을 허용하지 않았다. 저자에 따르면 빈센트 반 고흐의 종교적 사고와 행동에는 일관성이 있었다(92쪽). 그는 오로지 하나님의 존재를 경험하는 일과 사랑을 적극 실천하는 신앙을 실제로 구현하는 일에만 관심을 쏟았다.

그의 신앙은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중심적이었다. 반 고흐는 오직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에만 마음을 쏟았다. … 빈센트 반 고흐가 생각한 그리스도는 길 잃은 사람을 구하고 병자를 치료하며 굶주린 자를 먹이고 멸망해 가는 세상에 희망을 주러 온 ‘섬기는 자’의 표본이었다. 따라서 참 기독교인이 되려면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가 겪었던 고통과 인간에게 베풀었던 수고를 본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93쪽)”.

반 고흐가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영혼이 가난한 자, 마음이 가난한 자에게 축복있으라.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아서 찾아오는 사람이 별로 없다(마 7:14). 그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하라. 많은 이들이 들어가려 하나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께 청하옵건대. … 기독교인다운 삶을 살아가게 해주십시오. 우리 자신을 부정하며, 매일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 뒤를 따르도록 가르쳐주십시오. 온순하고 오래 참으며 자기를 낮추는 마음을 갖도록 해주십시오(93-94쪽)”.

반 고흐는 순례자의 영성을 가지고 살았다. 17세기 영국 청교도 문학 가운데서도 특히 유명했던 <천로역정>은 기독교인의 삶이라는 주제를 여행에 비유하여 깊이 있는 내적 신앙 체험을 강조한 책이었다.

반 고흐는 영국과 파이레서 같은 방을 쓴 친구 해리 글래드웰(Harry Gladwell)을 통해 <천로역정>을 손에 넣었다. 그가 테오에게 쓴 편지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버니언이 쓴 <천로역정>을 한번 읽어버면 그 진가를 알 수 있단다. 나는 그 책에서 무한한 감동을 받았다(97쪽)”.

저자 캐슬린 에릭슨에 따르면, 반 고흐의 설교에는 <천로역정>과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읽으며 알게 된 ‘체험 신앙’의 흔적이 배어 있다. “종교 문학은 반 고흐에게 기독교인은 영원하지 않은 지상 세계에서 이방인일 뿐이므로 이 세상을 낯선 땅으로 여겨야 한다는 생각을 심어주었다. 반 고흐는 기독교적 체험이란 천상의 예루살렘을 목적지로 삼아 시련과 슬픔을 겪으며 나아가는 어렵고 험난한 항해라고 믿게 되었다.

무릇 기독교인은 자기희생과 자기부정을 금과옥조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 반 고흐의 신념이었다. 그것은 그가 개인적으로 금욕을 실천했으며 가난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불굴의 노력을 기울였다는 각종 기록을 통해 입증된다... 결국 두 권의 책을 읽으며 반 고흐는 크리스천과 같은 목표, 즉 절대자이신 하나님과 궁극적인 영혼의 재결합을 이루려는 목표를 가지게 된다(101-102쪽)”.

반 고흐는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유순함을 열렬히 찬미했다. “예수 그리스도은 힘겹게 살아가는 노동자들을 위로하고 강하게 해주십니다. 우리 죄악을 알고 계시는 위대한 슬픔의 사람(Great Man of Sorrows)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임에도 목수의 아들로 불렀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목수 공방에서 30년 동안이나 일하셨습니다.

인간이 그리스도를 본받아 겸손해지고, 하늘에 닿으려 하기보다는 하늘 아래 지상 세계에 순응하며, 복음서에 나오는 유순하고 소박한 마음가짐을 배우면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104쪽)”.

저자에 다르면, “반 고흐가 실천했던 영성은 기독교 교회사의 전 시기에 걸쳐 있으며, 특히 고대와 중세 기독교에서 시작하여 네덜란드 신비주의, 청교도주의, 감리교로 이어지는 전통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반 고흐는 사실 이상하지도 별나지도 않은 전통적인 십자가의 사도였다(115쪽)”.

반 고흐는 성직자가 되고자했던 1875년부터 1880년까지만이 아니라 한평생 깊은 신앙심을 간직했던 사람이었다. “그는 언제나 성경을 귀하게 여기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존경했고, 가난한 자를 보살피고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혁명을 기다렸으며, 지상에서 믿음의 순례를 감내한 사람은 사후에 보답을 받는다고 믿었다.

그는 자신의 신앙 체험을 현세의 짧은 삶에서 슬픔과 고통을 견뎌내야 하는 험난한 순례 길로 받아들였고, 궁극적으로는 삶의 저편에서 재생과 부활에 이르리라는 희망을 품었다. 이는 종교의 핵심적, 근본적 의미에 관한 믿음이자 반 고흐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믿음이었다(326쪽)”.

반 고흐는 예술가로서 자신을 그리스도와 동일시했고, 종교와 예술이 본질상 얽혀 있다고 파악했다. 반 고흐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대리석과 점토와 색채가 아니라 살아있는 육신을 재료로 삼은 누구보다 위대한 예술가로서” 조용하게 사셨다.

이 책을 통해 독자는 거의 성자(聖者) 같은 삶을 산 반 고흐를 만나게 된다. “반 고흐는 가난한 이들에게 봉사했고, 가진 것을 모두 내주었으며, 성 프란체스코 수사처럼 극심한 가난을 견디며 살았다.

금욕적 생활과 산상수훈을 문자 그대로 실천하는 헌신성 때문에 그는 석탄 캐는 광부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았지만 제도권 교회로 부터는 극단적인 반감을 샀다(33쪽)”.

반 고흐는 “가난한 사람들의 벗으로 살았다. 대지를 경작하는 사람이나 베 짜는 사람들은 물론 길을 가는 행인을 볼 때조차도 언제나 하나님 나라를 물려받은 ‘영혼이 가난한 자’라고 생각하며 신성한 의미를 부여했다(74쪽)”.

이 책은 빈센트 반 고흐 작품의 영적인 요소에 대한 에릭슨의 해설은 널리 퍼져 있는 그릇된 가정들을 바로잡아 준다. 반 고흐의 예술 세계에서 발견되는 종교적 성격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는 명쾌하고 알기 쉬운 책이다.

송광택 목사
한국교회독서문화연구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