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원
▲최종원 교수는 페이스북을 통해 사회와 교회 현안에 대해서도 교회사를 기반으로 거침없이 의견을 개진하고 있다. ⓒ이대웅 기자
“초대교회는 당대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이 담고 있던 문화적·혈통적 인종주의를 극복했을 때 이방인, 여성, 타자 등 대중 속으로 급속도로 확산될 수 있었다. 제국 로마의 말기적 상황에서 체제에 대한 대안의 역할을 할 수 있었다. 그 결과 교회에 가해지는 오해와 박해를 넘어 기독교가 공인되는 유의미한 성취를 이룩하였다.”

1부에 이어, <초대교회사 다시 읽기>의 저자 최종원 교수와의 인터뷰를 소개한다. 저자는 “아우구스티누스가 그러했듯이 개개인이 역사의 신에 대한 내밀한 신뢰와 역사 앞에서 책임감을 갖고 각자의 영역에서 치열하게 사회에 대한 정의의 목소리를 내며 살아가는 것이 역사의 주체로 역사에 동참하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최종원 교수는 경희대 학부에서 회계학을 전공하고, 대학원에서 서양사를 공부했다. 영국 버밍엄대 역사학과에서 중세 말 잉글랜드 대학과 종교 담론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경희대와 제주대 등에서 서양사를 강의했으며,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교회사 교수를 지냈다. 현재는 캐나다의 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VIEW)에서 지성사와 교회사를 강의하고 있다. 인문주의 정신의 훼손이 한국 교회가 어려움에 처한 원인 중의 하나로 인식하고 있으며, 인문주의 정신의 회복과 존중이 교회 갱신의 핵심이라고 믿고 있다.

-역사서는 객관성이 생명일텐데, 이번 책에는 저자의 ‘적극적 개입’이 있습니다.

“그래서 참 나쁜 책이지요(웃음)? 과도하게 친절하지만, 편견이 가득 찬 안내서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책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가 그것이었습니다. 오늘날에 적용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변을 말하자면, 일단 우리가 교회사나 역사에 대한 이해가 전무하기에, 과도하게 개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최소한의 안내가 필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리고 역사란 과거 그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이야기가 될 때 완성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 안내 역할로 해설과 적용을 집어넣었습니다.

비유가 될지 모르겠지만, 이전의 교회사 책들이 ‘주석’이라면 제 책은 ‘강해’라고 할까요? 조금 더 가독성 있고 편리하지만, 주석에서 다 녹여내지 못한 것들을 좀 더 접근성 있게 만들어 삶에 적용하게 만들고자 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시도이지만, 바라기는 이런 식으로라도 역사 읽기, 역사나 교회사에 대한 관심을 조금이라도 늘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 책은 출발을 위한 것이지, 완결편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좀 더 자극을 받고 다양하게 우리와 다른 전통이나 신학에 대해 좀 더 열린 마음으로 접근할 계기를 마련해 주고 싶었습니다.”

-‘역사 공부는 답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고 했는데, 책에서는 답을 주신 것 아닌지요.

“그게 맹점입니다(웃음). 주체적으로 사고하라고 학생들에게 말하면서도, 늘 ‘이런 식으로 사고하라’고 하는 편입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도 생각할 수 있다는, 폭을 넓히는 하나의 해석을 주는 것일 뿐 답이라고 생각하고 주는 건 아닙니다.

역사가 E. H. 카(Carr)는 ‘역사를 읽기 전에 역사가가 누구인지 먼저 읽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다른 학문도 마찬가지이지만, 역사 공부에서도 자칫 ‘맹목적 읽기’가 되기 쉽습니다. 비판적 읽기가 아니라 그저 수용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많이 읽지만, 체계적으로 조직화해서 내 것으로 만드는 데는 아직 약합니다. 그래서 법정 스님이 그랬습니다. ‘책에게 읽히지 말라’고요.

그런 점에서 저자의 관점뿐 아니라, 저자의 관점을 독자의 관점으로 풀어내는 것 역시 굉장히 중요합니다. 제가 제시한 한 가지 독법을 독자들만의 독법으로 비평해내고 비판해내고 수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제 견해가 모두 받아들일 수 있는 보편적 해석이라 생각하진 않습니다. 물론 그런 건 존재하지도 않지요.

그러나 일관된 흐름 속에서 일관된 가치로 풀어내는 정도는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외람되고 과도하지만 저만의 독자적 해석을 풀어넣은 것입니다. SNS에 매주 글을 쓰고 있는데,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이유도 사회 현상에 대해 소위 ‘먹물’이 일반인들도 공감할 수 있는 언어로 풀어내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그래서 어떤 면으로 제 책은 굉장히 친절합니다.”

초대교회사 다시 읽기 최종원
▲지난 달 출판기념회에서 강연중인 최종원 박사. ⓒ이대웅 기자
-초대교회의 확산과 성장 이유에 있어, ‘삼위일체 하나님의 도우심’을 빼고 설명하는 것은 어쩌면 허망한 일 아닐까요.

“그런 식으로 해석하면 은혜롭습니다. 하지만 역사에 접근하면서 궁금증을 묻어버리는 결과를 낳습니다. 비판적 접근으로 풀어나간다 해서, 하나님의 궁극적 역사를 훼손한다고 보지 않습니다.

어떤 역사적 흐름을 ‘최상급 신앙의 언어’로 풀어나가는 것이, 그 가치를 극대화시킬 수 있을까요? 신앙적 언어를 전혀 쓰지 않고서도 그 속, 행간에 묻어나는 복음의 가치,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가치, 하나님의 마음을 외부자의 언어로 풀어내고 읽어낼 수 있습니다.

단순히 기독교 내 사람들뿐 아니라 외부자들도 그들의 언어로 기독교에 대해 읽어낼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글 속에서 신앙적·신학적 어휘를 굉장히 의식적으로 배제하고자 했습니다.”

-초대교회에 나타난 수도원을 교회와 비교해 ‘마르다의 영성’과 ‘마리아의 영성’으로 분류한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오늘날로 보면 ‘기도원과 사회복지관’ 정도로 비교할 수 있을까요.

“당대 수도원은 제도 교회를 끌어주는 ‘조타수’ 역할을 했습니다. 제도 교회라는 게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교회와 신학의 흐름 등은 손쉽게 바뀌는 게 아닙니다. 이러한 가운데 수도원은 당대 사람들이나 신학의 지향점을 바꾸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한 지향점을 발굴해 내는 원천의 역할도 감당했습니다.

교회가 안으로 오그라들거나 내부적으로 향할 때 공동 수도원이 등장했고, 지나치게 외적으로 팽창했을 때 다시 산 속으로 들어가는 은둔 수도원 전통이 이를 제어했습니다. 2,000년 제도 교회 역사 속에서, 수도원의 역할이 굉장히 간과돼 왔습니다. 수도원은 시대의 영적 지향을 담지하는 담지체로서의 역할을 했고, 격변의 시기에도 나름의 역할을 했습니다.

예컨대 기독교가 로마에서 313년 공인됐을 때, 오히려 수도회가 가장 활발해졌습니다. 교회의 세속화에 위기의식을 느낀 것이지요. 그들이 산 속으로 들어가 순수한 신앙을 지키려 했습니다. 10-11세기 유럽에서도 그러한 수도회들이 지나치게 부요해졌을 때, 프란체스코회나 클루니 개혁운동, 시토 수도회 등이 일어났습니다.”

-오늘날 그런 역할을 하는 곳이 있어야 할텐데요.

“그게 제 고민이지만, 쉽게 떠오르질 않습니다. 실은 신학교가 해야 할 역할이지요. 루터도 신생 신학교였던 비텐베르크대학에서 교회 공동체를 이끌어가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그 파생 지점은 교회 안이 아닌, 사회와의 접점에서 나옵니다. 사회 속에서 교회 읽기, 이 접점 속에서 뭔가 새로운 흐름이 나올 것 같습니다.

그런 흐름이 생성된다면, 지금은 위기가 아니라 굉장한 기회가 되고 극적으로 교회가 사회에서 자리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를 극복해내야 나중에 한국 기독교가 역사에 기록될 것이고, 극복해내지 못하면 역사에서 유의미하게 기록되지 못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초대교회에서 북아프리카 교회가 가장 활발했지만, 7-8세기에 그 역동성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될지, 이후에도 역동성을 유지한 채 살아남을지는 그리스도인 개개인에게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어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지난 출판기념회에서 ‘텍스트에 갇힌 교회’라고 하신 것에 동감합니다. 하지만 일례로 동성애자를 환대하고 지지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그 이유가 ‘성경이 동성애를 지지한다’는 것이라면 이해하기 힘들텐데요.

“굉장히 미묘한 부분입니다. 하지만 저는 성경에서 말하는 ‘사람’에 동성애자와 비동성애자가 구별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느 구절에서 불편한 시선이 있을지라도, 대전제는 모든 인간에게 차별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타자를 바라보는 전제가 돼야 합니다.

제가 반동성애자들에게 불편한 것은 그 대전제를 인정하지 않는가 하는 의심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동등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사람이라는 데서 출발하지 않는다는 혐의를 두고 있습니다. 그 범주에 들지 못하는 부류가 굉장히 많아 보입니다.

동성애자뿐 아니라 사회 속 타자들, 이주노동자들, 이슬람이든 불교도이든 그런 성찰 없이 성경 몇 구절만 갖고 동성애자를 차별해야 마땅하고 무방한 대상으로 지칭하는 것이 불편합니다. 동성애자에게만 그런 시각을 갖는 게 아니라, 다른 부류들에게도 마찬가지 시각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이는 여성이나 북한에 대한 불편한 시각으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그걸 정당화하기 위해 성경에서 전거를 찾아내는 것입니다.

보편적 인간의 가치에서 출발해야 하는데, 그 전제가 다르지 않나 하는 혐의를 쉽게 거둘 수 없습니다. 이는 신학적으로 진보와 보수의 문제를 넘어,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여성과 아이들, 노예는 인간의 숫자에 들지 못했습니다. 그 시대가 품고 있던 인종주의인데, 그것이 오늘의 컨텍스트에서는 맞지 않다는 것을 알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동성애를 그대로 오늘날에 적용한다면, 오늘날에도 여전히 여성과 아이들, 노예는 인간의 범주에서 제외하는 것이 논리적 형평성에 맞을 것입니다.”

초대교회사 다시 읽기 최종원
▲책 <초대교회사 다시 읽기>, 368쪽, 16,000원. ⓒ이대웅 기자
-초대교회에서 오늘날 한국교회가 가장 크게 배워야 할 점이 있다면.

“타자에 대한 환대입니다. 그 타자에는 당시 인간의 범주에 들지 못했던 여성과 아이들, 노예와 이방인들도 해당됐습니다. 초대교회는 당시 영아 살해 풍습도 극복했습니다.

그리고 당시 헬레니즘과 유대주의를 넘어섰습니다. 그들이 지향했던 중심성을 넘어선 제3의 가치, 제3의 인종으로 표현할 만한 가치를 만들어 냈습니다. 초대교회는 이러한 인종적·종교적 타자화를 극복했기에 성장했고 사회 속에서 수용됐습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현대판 헬레니즘을 겪고 있습니다. 우리 문화가 우월하다는 생각으로, 사회 내 200만의 이주노동자들과 외국인들을 우리 속에 포함시키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어떤 종교보다 가장 인종적 행태를 보이는 곳이 바로 제도 교회입니다. 이는 부정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초대교회를 빗대 오늘날 교회가 회복해야 할 점이 있다면 바로 그것입니다. 초대교회는 그것을 극복했기에 세계 종교가 됐는데, 우리는 여전히 현대판 헬레니즘과 유대주의에 빠져 있습니다. 이러면 세계 종교, 보편 종교가 될 수 없습니다. 아놀드 토인비는 ‘자기 중심성을 극복한 종교가 현대의 대안 종교가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우리만의 우월성과 자기중심성을 극복하고 있는지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그것을 잃어버렸기에 고립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초대교회에서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이 있다면, 교리가 아닌 ‘타자에 대한 감수성’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