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 새로운 ‘정통’ 찾아 떠나는 흥미진진한 모험

입력 : 2018.08.06 17:31

[서음인(書淫人) 리뷰] 김용규의 <신>

: 인문학으로 읽는 하나님과 서양문명 이야기
김용규 | IVP | 932쪽 | 42,000원

독일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고 다양한 대중 철학서와 인문 교양서를 통해 끊임없이 독자들과 만난 온 저자는 “어느 문명에서든 신은 종교 안에서만 머물러 있지 않으며 종교 아닌 것들 속으로 부단히 파고들어 문화와 문명의 심층을 이룬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 책의 목적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에 대한 바르고 정치한 이해를 통해 서양문명의 심층을 파악하는 것이며 … 그럼으로써 지금까지 서양문명을 이끌어 왔고 또 앞으로도 이끌어 갈 기독교 고유의 가치들과 특유의 사고방식을 익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캔터베리의 안셀무스
▲캔터베리의 안셀무스.
이를 위해 저자는 “신앙을 전제하지 않는 것은 오만이며, 이성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태만”이라고 일갈한 안셀무스를 따라 이성과 신앙을 통합하는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fides quaerens intellicum)’의 관점에서, 기독교에서 말하는 존재로서의 하나님(2부), 창조주로서의 하나님(3부), 인격자로서의 하나님(4부), 유일자로서의 하나님(5부)을 그와 관련된 문학 역사 철학 과학 예술 등과 연계해서 살펴나간다.

그리고 이를 통해 “세계화로 인해 어느 때보다도 빠르게 보편화된 서양문명이 우리에게 떠넘긴 심각한 문제들에 대한 진중한 해법”을 발견하게 되기를 소망한다. 마치 노변에서 정담을 나누는 듯한 편안한 목소리로(디아트리베) 서양문명의 전체를 ‘신’이라는 코드로 탁월하게 풀어내는 저자의 이야기를 요약한 후 간략한 단상을 덧붙이기로 한다.

1. 하나님은 누구인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대하여

기독교의 신 개념은 신앙적인 히브리인들의 ‘종교적 신 개념’과 이성적인 그리스인들의 ‘존재론적 신 개념’을 종합한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존재물’이 그에게서 존재를 부여받아야 존립할 수 있는 “존재”고, 무소부재하고 우주마저 자기 안에 포괄하는 “유일자”며, 내적 법칙인 ‘말씀’으로 모든 존재물을 창조한 “창조주”이자, 부단히 자신의 피조물들과 관계하며 그들을 자신의 의지대로 이끌어 가는 “인격”이기도 하다.

이렇듯 다분히 존재론적이며 동시에 종교적이기도 한 하나님은 인간이 도무지 벗어날 수 없는 대상이며, 그의 ‘말씀’은 순종하면 필히 복을 받지만, 거역하면 반드시 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영원불멸의 법칙이다.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는 이러한 존재론적 주장의 부단한 반복이다.

플로티누스
▲플로티누스.
2. 하나님은 존재다: 창조주와 피조물의 속성에 대하여

기독교 교리를 정립한 고대와 중세의 신학자들은 신플라톤주의를 받아들여 하나님을 모든 ‘존재자’중 가장 강하고 능력 있고 지속적인 ‘최고의 존재자’가 아닌, 모든 존재물의 궁극적 원인이자 근거인 영원불변하는 ‘존재 자체(ipsum esse)’로 이해했고, 인간을 정점으로 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의 사다리’를 하나님을 정점으로 하는 ‘존재의 사다리’로 변용했다.

물질-영혼-정신-일자로 이어지는 이러한 ‘존재의 사다리’는 자연과 사회 안에 공통으로 들어 있는 존재의 계층적 질서가 하나님이 정한 진리이기에 모든 인간은 이 질서를 따라야 하며, 이성을 사용해 물질(자연)을 관찰하기 시작함으로써 단계를 거쳐 하나님에게까지 다가갈 수 있다는 생각을 낳았다(존재 유비).

그러나 히브리인들에게는 하나님이 영원불변한 존재인 동시에 생성 작용하는 역동적인 실체였다. 삼위일체론의 ‘이론적’ 토대는 하나님을 일자-정신-영으로 구분한 플로티노스의 사변이 제공했지만, 히브리인들의 역동적인 존재 개념이 불변하는 존재인 성부, 창조하는 성자, 인도하는 성령이라는 삼위일체론의 ‘종교적’토대가 되었다.

그리스인들은 존재든 존재물이든 모두 탈시간화함으로서 그 변치 않는 본질을 통해 ‘개념적으로’ 파악했고, 히브리인들은 하나님이든 인간이든 모두 시간 안에서 그 운동과 변화를 통해 ‘실존적으로’ 파악했다.

존재란 생성과 작용의 탈시간화된 모습이고 생성과 작용이란 존재의 시간화된 모습이다. 하나님은 시간 밖에서는 영원히 안식하시지만, 시간 안에서는 부단히 활동하신다.

하나님의 존재를 합리적으로 증명하기 위해(논리적 타당성, validity) 안셀무스는 개념에서 출발해 결론을 이끌어내는 논증을 전개했고, 아퀴나스는 감각적 경험에서 시작해 결론을 이끌어내는 논증을 펼쳤다. 그러나 이러한 증명들은 종합판단 명제인 신의 존재에 대한 질문은 논증이 아닌 경험을 통해서만 검증이 가능하고, 경험세계에만 적용 가능한 인간의 이성을 무한까지 소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칸트의 주장에 의해 효과적으로 반박되었다.

또한 페일리의 지적 설계론은 자연의 복잡성을 자연 선택이라는 기계적인 매커니즘을 통해 실증적으로 입증해낸 다원의 진화론에 의해 결정적으로 무너지게 되었다. 그 이후로 신학은 20세기에 칼 바르트가 갔던 하나님에 대한 체험과 신앙을 우선시하는 길로 나아가게 된다.

반면 히브리인들에게 하나님의 현존에 대한 지식을 가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행위를 경험하는 것이며 그와 인격적 관계를 갖는 것이었다. 종교적 경험은 환상이나 황홀경 또는 기적과 같은 특별한 사건을 통해 나타나는 ‘종교적 경험의 신비적 형태(신현/누미노제)’와, 인간 삶의 모든 관계와 책임의 영역에서 신에게 대응하는 태도인 ‘종교적 경험의 일상적 형태(회심/패러다임의 전환)’로 나뉜다.

하나님의 현존을 경험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가의 문제는(건전성, soundness) 한 사람의 신비한 종교적 경험이 삶 전체에 새로운 의미를 던져 주는 전환점이 되어, 그리스도의 삶을 따르는 회심 혹은 패러다임의 전환이라는 ‘일상적 형태’로 나타날 수 있는지의 여부에 달렸다.

아우구스티누스
▲아우구스티누스.
3. 하나님은 창조주다: 창조의 의미와 목적에 대하여

아우구스티누스는 세계는 시간 ‘안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무로부터(creatio ex nihillo) 시간과 ‘더불어’ 만들어졌다고 말했으며, 이는 세계 초월자인 하나님이 절대적인 독립성과 전지전능성을 가졌다는 의미다.

모든 피조물은 영적이든 물질적이든 ‘선한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기 때문에 선하고 아름지만, ‘무로부터’ 창조되었기 때문에 타락의 가능성을 가진다.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한 하나님도 말만으로 구원하지는 않았으며, 이 사실을 모르면 신앙심뿐 아니라 실천까지 요구하는 기독교 교리는 물론, 이념 못지 않게 행동도 중요시하는 서양문명을 이해할 수 없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상기의 힘(vis memoriae)이라고 불렀던 과거와 미래를 하나로 연결하여 현존하게 하는 능력은, 과거 현재 미래로 무한히 분산되어 없어지는 점으로 존재했던 물리적 시간(크로노스, chronos)을 집중시켜 하나의 통일체인 심리적 시간(카이로스, kairos)으로 만든다.

물리적 시간을 심리적 시간의 관점으로 바꾸는 것은 매 순간 상처를 입히고 결국 모든 것을 파괴하는 시간(chronos)을 사는 우리의 마음을, 매 순간 새로이 태어나게 하고 마지막에는 구원하는 시간(kairos)으로 바꿔 ‘영원’을 살도록 만드는 ‘패러다임 전환’ 혹은 ‘회심’이라 할 수 있다.

서양문명 안에는 ‘카이로스’에서 구원의 해법을 찾는 전통이 이어져 오고 있으며, 플라톤, 플로티노스, 아우구스티누스로 이어지는 시간론 전통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상기’는 기독교 신학뿐 아니라 키르케고르나 프루스트, 조이스, 벤야민, 아겜벤 등을 통해 철학과 문학을 비롯한 서양문명에 전반에 깊은 영향을 끼쳐 왔다.

창조는 특별한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자족하는 하나님의 ‘넘쳐흐르는 풍요’라는 본성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일어났으며, 태초에 이루어진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이 부여한 자연법칙에 의해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사건이다.

‘자연선택’이라는 진화의 원리는 하나님이 지속적 창조를 위임한 ‘현실화 원리’ 혹은 ‘자연법칙’의 일부로 볼 수 있으며,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의 맹목적성과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창조의 합목적성은 서로 다른 차원에 위치하기에 서로를 배제하지 않을 수 있다(양립주의).

창조의 목적은 인간과 세계의 구원, 즉 인간과 세계가 하나님처럼 완전하게 되는 만물의 신성화이다. 고백록 말미에 창조신학이 덧붙여진 이유는, 불완전한 자기 자신이나 세계가 하나님처럼 완전해지는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총으로만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함이다.

쇠렌 키르케고르
▲쇠렌 키르케고르.
4. 하나님은 인격적이다: 하나님의 인격성과 인간의 태도에 대하여

하나님의 인격성은 종교로서의 기독교를 이루는 근간이자 원천이다. 하나님과의 인격적 만남 없이는 하나님을 철학적으로 사유할 수 있을지 몰라도, 종교적으로 신앙할 수 없다. 우리가 하나님이라 부르는 야훼는 아리스토텔레스나 18세기 자연신학자들의 신과 달리 세계를 향해 끊임없이 자신을 드러내고 인간의 삶과 역사에 부단히 참여하여 관계를 맺는 2인칭의 신 즉 신적인 너(the divine Thou)이다.

존재론적 관점에서 보자면 하나님의 인격성이란 단순히 하나님이 피조물들에게 참여와 인도라는 원리로 작용한다는 뜻이며, 신구약성서의 모든 계시는 이 같은 하나님의 참여와 인도에 대한 약속이자 기록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도란 하나님께 합당한 것을 청원함으로서 참여와 인도라는 하나님의 인격성을 경험하고 그에 응하는 가장 보편적이고 적극적인 방법이다.

키르케고르는 인간이 ①원초적 쾌락을 즐기지만 불안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심미적 단계'에서 ②‘뉘우침’을 통해 이성을 통한 보편적 도덕을 추구하게 되는 ‘윤리적 단계’를 지나 ③‘뉘우침’과 ‘죄의식’이 주는 “무한한 자기체념”을 통해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에게 모든 것을 의지하는 ‘종교적 단계’로 성숙하게 된다고 강조한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대표하는 ‘종교적 단계’의 인간은 무한히 자기를 체념하는 자기 파괴자들이고,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것을 믿는 어리석은 자들이며, 바랄 수 없는 것을 소망하는 광기 있는 자들이고, 자신을 미워함으로서 결국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이며,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현명한 자들이다. 믿음의 운동은 “윤리적인 것의 목적론적 정지”이며, 개별적인 것이 보편적인 것보다, 믿음이 윤리보다 높이 있다는 것이 믿음의 역설이다.

그러나 해방신학자 구티에레즈나 정치철학자 네그리는 욥이 아브라함처럼 “윤리적인 것의 목적론적 정지”를 하지 않고 죄 없는 인간의 고통에 대해 하나님께 외치며 저항했기 때문에, 오히려 위대하고 모범이 된다고 주장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부조리로 파악되는 죄 없는 자의 개인적 사회적 고통에 대해 ‘하나님 앞에서는’ 칼빈과 키르케고르를 따라 침묵해야 하지만, ‘사람들 앞에서는’ 구티에레즈나 네그리와 함께 울부짖고 저항해야 한다.

하나님은 창조시에 자연이나 인간에게 우연적이고 자발적으로 운행하고 결정하는 자연법칙과 자유의지를 주셨으며(일반섭리), 여기서 모든 자연 악과 인간 악이 나온다. 악의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인간과 자연에게 일정한 자유와 우연성을 허락한 것은 하나님의 본성인 사랑에 부합한다.

위르겐 몰트만
▲위르겐 몰트만.
5. 하나님은 유일자다: 하나님의 유일성과 인간의 연대성에 대하여

플라톤은 ‘일자’를 ‘선 자체’ 혹은 ‘선의 이데아’로 규정함으로서 ‘신은 선하다’는 생각을 도입했다. 이는 악한 세력에 대한 불안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던 고대인들의 삶에 용기와 희망을 주었고, 지난 2,400년간 서구인들에게 인간이 선하게 살아야만 하는 도덕적 근거 및 객관적 타당성을 제공해 왔다.

플로티노스는 ‘일자’를 초월성‧포괄성‧무규정성‧무제한성을 특징으로 하는 ‘존재 자체’로 규정했고, 신적 존재를 일자-정신-영혼으로 나눈 그의 구분은 초기 기독교 신학자들에 의해 받아들여져 성부-성자-성령으로 이어지는 삼위일체론의 토대가 되었다.

그러나 플로티노스의 사변과 기독교의 삼위일체 사이에는 각 위격과의 관계와 관련해 건널 수 없는 간극이 존재하며, 이 차이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삼위일체 논쟁의 핵심이었다고 할 수 있다.

신플라톤주의자였던 오리게네스는 아버지와 아들의 동등성을 주장하는 입장과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종속성을 주장하는 입장을 동시에 취했으며, 전자는 서방 가톨릭교회의 내재적 삼위일체론(the immanent trinity)으로, 후자는 동방정교회의 경륜적 삼위일체론(the economic trinity)으로 계승된다.

아타나시우스와 가파도키아의 세 교부들은 전자를 받아들여 하나님을 세 본체 안에 존재하는 하나의 본질(treis hypostaseis, mia ousia)이라고 선언했고, 하나의 공통된 신적 본질이 다른 세 가지 고유한 존재양식 속에서 자신을 표현하지만 삼위는 나뉨 속에서도 연합해 있기 때문에 오직 서로의 관계에 의해서만 구별이 가능하다고 가르쳤다.

아우구스티누스 역시 삼위는 오직 관계에 의해서만 서로 다를 뿐이기 때문에 구분되지만 분리되지 않고 나뉘지만 연합해 있다고 주장했다(관계설).

몰트만은 이와 같은 서방신학 전통의 일신론적 삼위일체론에 반대해 상호내주와 상호침투라는 의미를 가진 ‘페리코레시스’라는 개념을 동방신학에서 가져와, 다원적 삼위의 공동체성을 강조하는 ‘사회적 삼위일체론’을 주장했다. 그는 삼위가 가진 통일성은 단일성이 아니라 ‘다양한 것들이 서로에게 침투해 들어가는’ 페리코레시스적 공동체성이며, 삼위를 하나로 묶는 사랑은 자신과 동일한 것만 받아들이는 ‘동종사랑’이 아니고, 이질적으로 다양한 것에까지(삼위뿐 아니라 피조물에게까지!) 무한히 확대되는 ‘이종사랑’이라고 강조한다.

따라서 삼위일체적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은 신적 페리코레시스 즉 상호내주적 상호침투적 사랑 안에서 드러나는 평등한 사귐과 교제를 실현하도록 부름받았다. 삼위일체론은 자유 평등 사랑을 추구하는 비위계적 비지배적 사회를 위한 모델이 되며, 기독교 사회윤리는 삼위일체적 사고에 근거해야 한다.

존재이자 창조주인 하나님은 영원토록 불변하고 유일하지만 인간에게 계시되는 하나님은 인간 정신과 문화의 진보에 따라 시대마다 다르게 표현되어 왔으며, 예수님과 바울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보여주는 배타성과 폭력성을 철저하게 걷어냈으나 역사적 기독교 안에서는 배타성과 폭력성이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존속해 왔다.

그러나 절대적 초월자인 동시에 궁극적 포괄자인 하나님(‘하나님 위의 하나님’, 파울 틸리히)이 가지는 ‘유일성’안에는 포괄성, 종합성, 전체성만 존재할 뿐 고유성, 배타성, 폭력성이 차지할 자리는 없다. 또한 상호내주적이고 상호침투적인 사랑에 의한 자유롭고 평등한 사귐과 교제를 특징으로 삼는 하나님의 ‘삼위일체성’ 안에는 이질성과 다양성을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통일적인 하나됨을 이루는 ‘이종사랑(heterologous love)’만이 존재할 뿐 어떤 배타성이나 폭력성도 침투할 수 없다.

김용규
▲저자 김용규 작가. ⓒ크리스천투데이 DB
맺음말: 새로운 출발을 위하여

근대 이후 서양문명에서는 하나님과 그의 이름으로 언급되던 최고의 가치들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 신과 영웅 그리고 자기희생과 헌신에 대해서는 전근대적이라는 이유에서, 이성과 주체, 그리고 사회적 진보와 혁명에 대해서는 근대적이라 해서 입을 닫고 있으며, 오직 탈근대적인 이야기들, 즉 세속적인 것, 일상적인 것, 개인적인 것, 상대적인 것에 대한 이야기들만 넘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인간의 삶과 세계의 역사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고 그것들이 나아갈 방향을 설정해 주던 모든 것들이 홀연히 사라져 버린 것처럼 보인다.

물론 역사를 되돌려 근대의 괴물인 아우슈비츠와 히로시마를 또 다시 만들어낼 수는 없다. 그리나 이 책에서 살펴보았듯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불가능한 종합을 통해 기독교의 하나님 개념이 만들어진 것처럼, ‘작은 이야기’와 ‘큰 이야기’의 종합을 통해 각 이야기의 한계인 폭력성과 편협성을 극복함으로서 우리의 이야기를 보다 온전한 담론으로 만들어 나가야 할 것이다.

제임스 K. A. 스미스
▲제임스 K. A. 스미스.
개인적 단상

이 책은 전통적인 기독교 신학의 신론이 다루는 영역을 크게 벗어나지 않지만, 우리에게 익숙한 ‘신학적’ 용어나 진술의 심층에 놓여 있는 ‘헬레니즘적 혹은 존재론적’ 뿌리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기독교가 헬레니즘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헤브라이즘 문명의 유산이라는 선입견과는 달리 기독교의 ‘신’ 개념이 히브리인들의 ‘종교적 신 개념’과 그리스인들의 ‘존재론적 신 개념’을 종합하며 발전해 왔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터툴리아누스의 생각과 반대로 “아테네와 예루살렘”은 밀접한 관계가 있을 뿐 아니라, 실제로는 ‘서구 기독교’를 떠받쳐 온 두 초석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같은 형용사로 수식될 수 있는 ‘복음, 신앙, 신학’이란, 사실상 2,000년 기독교 역사에 단 한번도 존재한 적이 없는 “이념형”에 불과하며, 설령 특정 시대 특정 지역에서 그러한 용어로 불린 신학의 체계(흔히 ‘정통’이라 불리는)가 존재했더라도 그것이 결코 시대를 초월한 보편성과 적실성을 지닐 수 없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과제는 특정 시대를 지배했던 도그마야말로 불변하는 ‘정통’이라고 강변하면서 다른 모든 이야기들을 이단시하고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오리게네스로부터 몰트만에 이르기까지 2,000년 기독교가 쌓아온 풍요로운 신학적 유산과 철학·역사·사회학·인류학·종교학 같은 인접 학문들의 도움을 받아 우리 시대의 새로운 ‘정통’을 찾아가는 위험하지만 흥미진진한 모험의 길을 떠나는 것이 될 것이다.

이미 낡어버린 ‘정통’이라는 성채에 스스로를 유폐시킨 채 “안전하다! 안전하다! 안전하다!”를 외치는 집단을 기다리고 있는 유일한 미래는 파멸이 아니겠는가?

저자는 21세기 기독교가 맞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포스트모던적인 ‘작은 이야기’와 근대까지의 ‘큰 이야기’를 종합해, 우리의 이야기를 보다 온전한 담론으로 만들어 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신 김용규
그렇다면 우리가 떠나야 하는 모험의 길이란 결국 2,000년 찬란한 역사를 가진 기독교라는 웅장한 건물을 21세기의 다원적이고 세계화된 시대를 지배하는 정신인 포스트모던이라는 토대 위에 새로이 옮겨 세우는 일이 아닐까?

그리고 “기독교의 모든 교회적·신학적·도덕적 범주는 역사적이고 상황적이지만 동시에 참다운 진리에 온전히 참여하며,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의 역사는 모든 시대의 족속과 민족 그리고 교회를 포함하는 ‘세계 기독교’의 관점에서 재서술되어야 한다”고 일갈하는 마크 놀이나, “아우구스티누스가 플라톤에게서 아퀴나스가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기독교를 새롭게 할 동력을 얻어 왔다면, 우리가 포스트모던 철학자들에게서 우리 시대의 기독교를 구할 지혜를 빌어오지 못할 까닭이 없다”고 주장하는 제임스 스미스야말로 우리 시대의 교부로 추앙받아 마땅하지 않을까?

정한욱 원장(고창 우리안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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