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강 이승훈
▲남강 이승훈 선생.
일제는 안악 사건을 계기로 애국지사들에 대한 탄압에 자신을 가지게 되었을 뿐 아니라 비밀결사인 신민회의 관련 인사와 정책 등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일제는 신민회의 간부 및 회원들과 독립운동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는 애국지사들을 사전에 일망타진하기 위해 해괴하게 사건을 조작했던 것이다.

그 흑막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자.

1910년 12월 압록강 철교 준공 축하식이 있는데, 조선 총독 데라우치(寺內正毅)가 신의주를 향해 출발하는 날이나 준공식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오는 날을 이용해 총독 이하 요인을 총살하려는 음모가 있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각본에 따라서 일제는 1911년 9월 윤치호를 필두로 이승훈, 양기탁, 유동열 등 전국적으로 600여 명의 애국지사를 검거해 투옥했다. 그 중 123명이 재판을 받게 되었고, 경성지방법원에서 열린 재판에서 18명이 무죄로 석방된 후, 나머지 105명이 유죄판결을 받게 되어서 이 사건을 ‘105인 사건’이라고도 부른다.

잡혀간 사람들은 하지도 않은 일이니 당연히 그런 적이 없다고 말했지만, 일제는 지독하게 고문을 해서 거짓 자백을 받으려 들었다. 야만적인 고문이 얼마나 지독했던지 후유증으로 정신병자가 되거나 죽은 사람도 있었다.

코에 물을 부어 배가 불러 올라온 것을 발로 걷어차 물이 코로 분수처럼 나오게 하고, 대나무를 가늘게 쪼개 작은 못을 만들어 손톱 밑에 박아넣고 벌겋게 달아 오른 쇠로 다리나 팔을 지져 연기가 자욱했다.

결국 억지 공판에 회부된 122명은 1912년 5월 기소되어 6월 28일부터 경성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았다. 공판 중 양기탁은 고문에 의한 사건 날조라면서 무죄를 주장하는 등 완강한 공판 투쟁을 벌였다.

그러나 재판관은 재판을 강행하여 날조된 문서인 판결문을 작성하고, 같은 해 9월 28일 105명에 대해 징역 5년에서 10년까지의 유죄 판결을 내렸다. 이로 인해 비밀결사였던 신민회는 실질적으로 괴멸되어 해체되었으며, 국내 독립운동 세력은 크게 위축된다.

제주도에 유배되어 있던 남강도 서울로 압송돼 재판을 받았다. 일제는 이 사건을 조작하여 남강을 사건의 주모자로 몰아가려 했다. 서북지역 신민회 조직의 핵심인물인 남강을 제거하여 지역 민족운동의 싹을 자르려는 수작이었다.

일제는 계속 남강과 주변 인물들을 고문하고 가족까지 위협하며 그를 주모자로 몰아가려 했다. 하지만 남강은 끝까지 혐의를 부인했다. 신민회 조직의 책임자로서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으려는 이유에서였다.

남강은 억울하게도 유배 중에 다시 투옥되는 이중고를 겪어야 했다. 평소 남강을 미워한 일제는 그에게 징역 6년을 선고했다. 남강은 대구 감옥과 경성 감옥에서 4년 2개월 옥고를 치렀다.

“아, 슬프도다. 마치 사다리의 한 단을 밟아 오르면 두 단이 무너져 내리는 듯 싶구나. 학교를 발전시켜 민족의 건아들을 길러 내려던 그 꿈은 쇠창살에 감금되고 말았구나!”

탄식이 절로 나왔다. 하지만 그는 이빨을 꼭 아물었다.

“여기서 무너지면 안 돼. 비록 나는 약할지라도 신의 진리는 강해.”

제주도 유배기간에도 그랬지만 남강은 감옥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하나님께 더욱 의지했다. 옥중이라 만날 사람도, 해야 할 일도 없으니 눈만 뜨면 성경 읽고 기도하는 것이 일과가 되었다.

전에 잠시 오산학교 교장으로 모셨던 스테이시 로버츠(Stacy L. Roberts, 라부열) 선교사가 신약성경과 <천로역정>을 들여보내 주어 날마다 탐독하며 묵상에 잠겼다.

‘차원이 다른 거야. 내가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수도 있겠지만, 한 계단만 올라가면 또 다른 더 환한 영적 이상향이 펼쳐지는 걸. 그러니 자만하지도, 절망하지도 말고 한 계단 한 계단 겸허히 나아가야만 해.’

이를테면 고통스런 감옥은 남강에겐 영혼의 탄생지였다. 종교신앙과 민족운동에 대한 신념은 도산을 만나고 나서 굳어졌거니와, 감옥 속에서 더욱 굳건해졌다.

성경을 거듭 읽은 것도 감옥에서였고, 울면서 기도를 올린 것도 감옥에서였고, 새벽빛이 창살 틈으로 비칠 때 그리스도의 상을 꿈속에서처럼 우러러본 것도 감옥에서였다.

그는 조용히 독백을 중얼거렸다.

“어떻게 감옥에서 이다지 기쁜지 몰라. 곧 당신이 내 머리 위에 계신 것 같아. 전에는 믿는다는 것이 밤알을 통째로 물고 어물거림과 같았는데, 지금엔 발가 먹는 것 같군.”

하지만 일본 간수가 거들먹거리며 수감자들을 짐승처럼 취급할 땐 분노와 절망감이 밀어닥쳐, 그는 입술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면 모든 빛이 사라지고 감옥은 갑자기 지옥으로 변해 버렸다.

“오, 하나님이시여! 대체 우리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나이까?”

국권을 빼앗긴 조선 땅 전체가 감옥이나 지옥으로 느껴져 눈앞이 캄캄했다. 차라리 죽고 싶었다. 그럴 때마다 어떤 소리가 환청인 양 귀를 울렸다.
“너를 버리고, 짐승보다도 개미보다도 너를 낮추고, 오로지 너의 소망을 생각하라!”

김영권 남강 이승훈
▲김영권 작가(점묘화).
남강은 감옥에서도 늘 부지런했고, 남들이 꺼리는 궂은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체면을 차리지도, 권위를 부리지도 않았다. 방 청소는 물론 변기를 치우고 닦는 일도 그의 몫이었다.

오산학교에서도 학생들과 함께 화장실 청소를 한 그였기에 어려울 것도 없었다. 그는 손으로 변기통을 닦으며 ‘이 민족을 위해서라면 언제까지라도 더러운 것을 청소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김영권 작가

인하대학교 사범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하고 한국문학예술학교에서 소설을 공부했다. <작가와 비평>지의 원고모집에 장편소설 <성공광인(成功狂人의 몽상: 캔맨>이 채택 출간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작품으로는 어린이 강제수용소의 참상을 그린 장편소설 <지옥극장: 선감도 수용소의 비밀>, <지푸라기 인간>과 청소년 소설 <보리울의 달>, <퀴리부인: 사랑스러운 천재>가 있으며, 전통시장 사람들의 삶과 애환을 그린 <보통 사람들의 오아시스> 등을 썼다.

*이 작품은 한국고등신학연구원(KIATS)의 새로운 자료 발굴과 연구 성과에 도움 받았음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