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훈
▲백성훈 목사.
1892년 미국 감리회에서 우리나라 인천으로 파송된 존슨 선교사와 로즈와일러 선교사에 의해 편집된 ‘찬미가’는 27편의 찬송을 모아 악보 없이 가사만 실어서 만들었다. 이것이 악보는 없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찬송가로 알려져 있다.

이후 찬양가(1894년)에 이어 찬미가의 개정판들이 계속 만들어지면서, 우리는 모든 예배에서 찬송가로 함께 찬양해 왔었다. 이후 일제강점기를 지나며 수많은 교회의 핍박 속에 찬송가를 부르며 순교 신앙으로 교회를 지켰고, 이후에는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흥남 부두의 기적속에 성도들은 찬송가로 찬양하며 끝까지 고난을 이겨냈다.

잠시의 평안도 없이 남북이 분단되고 찾아온 보릿고개는 광야의 인생을 묵상하며 오히려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등을 찬송하며 매일 새벽을 깨우게 했다. 교회는 1970년대를 지나며 서서히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그렇게 찬송가는 우리 60대 이상 어른들에게는 숱한 인생의 흔적이 묻어 있는 삶의 고백이 되었다. 이것이 어른들이 교회 예배에서 찬송을 좋아하며 고집하는 이유이다.

그러나 젊은 세대는 찬송가에 대한 이런 삶의 흔적이 없다. 그저 졸리고 재미없는 옛날 곡조와 삶의 벼랑 끝에서 비명처럼 부르는 것 같은 진지함이 너무 무겁게 느껴진다. 나름 어른들과 함께 호흡하려고 현대적인 음악으로 편곡도 해 보지만, 사실 서로의 공감대가 너무 멀다는 것을 많이 느낀다. 편곡된 찬송가마저 어른들은 잘 따라 부르지 않을 때가 많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찬송가에 대해 어른 세대와 젊은 세대가 서로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필자는 어른 세대에게 찬송가의 곡조를 절대화하면 안 되는 이유를 설명하고, 젊은 세대에게 찬송가 가사에 대한 깊은 은혜를 나누는 것이 필요하다고 제안한다.

먼저 어른 세대가 찬송가 곡조를 절대화하면 안 되는 이유를 살펴보자. 찬송가의 일부는 그 곡조가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한 목적이 아닌, 세상 나라의 국가나 이성간의 사랑을 노래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곡들이 있는데, 이는 교회에서 쓰는 가사는 있지만 곡조가 없는 찬송들에 대해, 세상 노래 곡조를 차용하여 가사를 붙여 불렀기 때문이다.

‘시온성과 같은 교회’는 현재 독일 국가이고, ‘피난처 있으니’는 영국 국가이며, ‘하늘 가는 밝은 길이’는 이성간의 사랑을 노래한 스코틀랜드 민요 ‘애니 로리’의 곡을 가져온 것이다. ‘천부여 의지 없어서’는 마른 르로이 감독의 영화 ‘애수’의 주제곡이었고, ‘마귀들과 싸울지라’는 미국 소방대원 행진가였다.

이처럼 찬송가에서 사용되는 곡조는 세상 곡조를 차용한 것들이 있으므로, 지금 불려지는 현대의 복음송에 대한 곡조만을 일방적으로 ‘세상 곡조’라고 비난해서는 안 된다.

반면 젊은 세대는 찬송가 가사의 깊은 의미를 알아야 한다. 찬송가 549장 ‘내 주여 뜻대로’의 작사가인 벤자민 스몰크 목사는 당시 유럽의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교회 사이의 종교전쟁이었던 ‘30년 전쟁(1618-1648)’이 끝나고, 전쟁 후유증으로 흑사병이 돌아 그마저 많이 죽고 있었다.

열심히 심방을 돌고 집으로 돌아온 스몰크 목사의 집에는 불이 났고, 이미 죽은 두 아들의 시신만 남게 됐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그는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온 몸과 영혼을 다 주께 드리니 이 세상 고락간 주 인도 하시고 날 주관하셔서 뜻대로 하소서’ 라고 고백했다. 이런 이야기들이 젊은 영혼들의 가슴에 새겨질 때, 찬양을 부르는 태도와 은혜가 달라질 것이다.

필자는 찬송가학을 학교에서 강의하며 이런 찬송가의 배경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수업이 처음 시작될 때 소극적이던 학생들이 수업 끝날 때쯤에는 이를 눈물로 부르던 모습이 생각난다.

분명 젊은 청년들은 의미를 잘 모른다. 가르쳐주지 않았고 이야기해주지 않았다. 그들에게 찬송가의 역사적 가치와 전통적 권위만을 요구할 것이 아니라, 한 장 한 장에 담겨 있는 의미를 말해 주는 것이 더욱 마음을 열게 하는 열쇠가 될 것이다.

백성훈 목사(<팀사역의 원리> 저자, 김포 이름없는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