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칼럼] 무신론자가 자유주의자들보다 차라리 나은 이유

입력 : 2018.08.03 17:23

그리스도 신앙으로만 알려지는 삼위일체 하나님

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역사적으로 현존했던 신앙 부류들을 고찰하고, 그것들에 빗대 기독교를 반추하고자 합니다. 신앙에 천착하고 반추하는 일은 삼복 더위나 추위를 불문하고 언제나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크게 세 부류로 구분지었습니다.

◈자연 종교

하나님의 계시가 단절된 곳에서 인류가 견지해 온 보편적 종교 형태들이 있습니다. 먼저 인간의 존재적 불안과 두려움에서 갖게 되는 원시적인 신앙 형태입니다. 예컨대 태풍, 홍수, 가뭄 등 자연재해나 질병 같은 인간 한계를 직면하면서, 어디엔가 인간을 도와줄 신이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에서 나온 신앙입니다. 애니미즘(animism, 물신숭배), 샤머니즘(shamanism) 신앙을 비롯해 헬라신화의 신개념들이 그것입니다.

인간의 생존 문제가 어느 정도 해소되고 존재의 두려움에서 벗어났을 때, 지성으로 신을 찾아 발견하려는 보다 발전된 신앙 형태가 나타났습니다. 곧 인간의 사유를 통해 신을 찾으려는 철학적인 신앙입니다. 바울이 “사람의 지혜로 알 수 없는 하나님(고전 1:21)”을 말씀했을 때, 그 ‘사람의 지혜’가 곧 철학(골 2:8)입니다.

혹자는 철학을 종교와 분리하나, 철학의 궁극적인 목적이 신을 찾는 것이라고 볼 때(고전 1:21) 철학을 종교의 범주에 넣어도 무리가 없습니다.

철학의 도시 아덴 사람들의 많은 종교성과(행 17:22) 수많은 신전, 제단들은(행 17:23) 철학과 신(神) 탐구가 결코 무관치 아니함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또 하나가 경전과 교리가 구비돼 학습이(세뇌가) 가능한 고등종교 혹은 유일신 종교입니다. 대표적인 것들이 불교, 이슬람교, 유대교 등이며, 오랜 전통과 역사성을 갖고 있습니다. 이들의 신앙은 대개 오랜 시간 반복적인 학습을 통해 형성되며, 이들에게 신앙은 극히 자연스럽습니다. 존재하는 신앙 중 가장 강력한 신앙형태라고 볼 수 있으며, 자기의 신앙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게까지 합니다.

신라 승려 이차돈(異次頓)의 백혈(白血) 순교, 유대인들의 로마와의 최후의 결전장이었던 마사다 전투(the battle of Masada, A.D73), 오늘날 이슬람 교도들의 자살 폭탄테러는 학습된 신앙의 힘의 대단함을 잘 보여줍니다.

기독교인이 되기 전 바울의 유대교적 유일신 신앙도 같은 범주에 듭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엄격한 율법주의 교육을 받아 흠 없을 만큼 율법에 헌신했고, 또한 유대교에 대한 충성심의 발로에서 많은 기독교인들을 죽음에 이르게 하고 교회를 잔해했습니다(빌 3:6).

인간의 생존적 불안에서 비롯된 종교이든 지적 사유 형태인 철학적 종교이든 혹은 학습된 고등종교이든, 이것들은 모두 사도 바울이 말한 인간 안에 생득적으로 타고난 종교성(행 17:22, 27, 롬 1:20)의 발로입니다.

◈왜곡된 기독교

이제까지 자연종교를 말했다면, 여기선 기독교 카테고리 안에 들어있으면서도 반기독교 혹은 왜곡된 기독교에 대한 것입니다. 그 중 자유주의(Liberalism) 신학이 그 선두를 점합니다.

이들은 언제나 하나님을 대화와 논점의 지향점으로 삼아 일견 기독교 신앙처럼 보이나,, 그들이 말하는 하나님은 비인격적 가상(假想, imagine)의 관념일 뿐입니다. 이들에게는 하나님이 있고 없고가 상관 없으며, 하나님이 없어도 얼마든지 신앙이 가능하게 만들어 교묘히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합니다.

하나님이 계시다고 믿으므로, 현재의 안위와 평안을 얻고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이미 신앙의 목적이 달성된 것으로 봅니다.

그레샴 메이첸(J. Gresham Machen)이 기독교에 가장 해악적인 무신론이라고 지목한 것이 바로 이 자유주의(Liberalism) 신학입니다. 버트란드 러셀(Bertrand Russell, 1872-1970)이나 리처드 도킨스(Clinton Richard Dawkins)의 ‘만들어진 신(The God Delusion, 신이라는 망상)’ 개념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들은 관념적인 하나님인 이 ‘만들어진 신(The God Delusion)’에게 자신을 귀의(歸依)시키기도 하고 기도도 하고, 자신의 삶을 의거하기 합니다.

이들에 비한다면, 표면적으로는 무신론을 표방하면서도 그것을 통해 하나님을 긍정하는 솔직한 무신론이 훨씬 순수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솔직한 적대감을 통해, 오히려 하나님의 존재를 긍정합니다. 이들은 사도 바울의 표현대로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롬 1:28)”, 하나님 적대감 표출을 통해, 역설적으로 하나님 존재를 긍정합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인정되기에, 동시에 그를 싫어하는 것도 가능한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관념적 존재로 만드는 ‘위장된 유신론’인 자유주의보다 ‘순진하고 솔직한 무신론’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들의 ‘적대감’은 언젠가 ‘호감’으로 바뀔 가능성도 있지만, 하나님을 가상(假想)의 존재로 만든 자유주의자들에게는 변화의 가능성이 거의 없습니다.

신념과 믿음이 결탁된 ‘신념주의 신앙’도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존재’와 ‘그의 전능하심’을 믿으므로 기본 신관(神觀)을 구비한 정통 기독교 신앙으로 보이나, 이들 역시 신앙을 왜곡·변질시킨다는 점에서 기독교에 적대적입니다.

대개 이런 신앙을 가진 이들의 성향을 보면, 성취욕이나 성공에 대한 갈망이 강합니다. 실제로 이들이 신앙을 갖게 되는 동기도 질병, 가난, 실패 등 열악한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강렬한 욕구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이들의 우선적 관심은 기독교의 본질인 ‘죄와 구원’보다는 축복과 성공에 대한 열망에 있으며, 자신의 욕망을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런 자신의 욕망을 성취시켜 주는 것을 통해 그의 존재감과 전능성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흔히 표방하는 그리스도인상은 ‘파워 크리스천(Power christian)’이며, 성경을 자신의 성취 욕구를 이루기 위해 이용하는 실용주의적인 성경관을 견지합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성경 자체의 계시에 귀 기울이기보다, 자신들의 성취 욕구에 부합하는 성경 구절들을 편취합니다. 이들에게 제일 인기 있는 성경은 대개 “네 믿음대로 되리라”,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 “꿈이 없는 백성은 망한다” 같은 구절들입니다.

이런 신앙 형태는 경제적 풍요를 구가하는 선진국보다는 경제적 부와 발전에 목마름을 가진 제3세계 개발도상국에게서 흔히 발견됩니다.

이들은 신앙을 통해 자기들의 욕망을 성취하고 나면, 당연히 신앙의 열정도 퇴색됩니다. 이런 사례는 멀리 갈 것도 없이 근래 50여년 한국의 기독교 역사에서도 발견됩니다. 오늘 한국교회의 세속화와 퇴보는 이런 성공(번영) 신학에 빚지고 있다고 보는 데는 이견이 없습니다.

◈계시 신앙

대개 누구든 “하나님은 인간이 찾아서 발견할 수 없는, 온전히 하나님의 자기 계시로만 알려진다”는 계시 신앙을 표방하고 나오면 두말 없이 정통 신앙으로 인정합니다. 이는 이것이 기독교를 특정짓는 중요한 분깃점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하나님을 알게 된다는 ‘계시 신앙(신앙인식론)’에도 두 종류가 있으며, 이 둘의 진위를 발견하려면 일반 그리스도인들은 물론 목회자들조차도 쉽지가 않습니다.

그 하나가 믿음을 ‘계시’인 동시에 하나님 인식을 열어주는 ‘심리적 작용’으로 보므로, 믿음을 계시와 심리주의의 통합쯤으로 간주하는 ‘계시-심리’ 신앙입니다. 이는 “나는 알기 위해 믿는다(crede ut intelligam)“고 한 어거스틴과 안셀무스의 신앙인식론의 영향과도 유관해 보입니다.

루터처럼 계시를 그리스도 신앙에 한정짓지 않고 두루뭉술하게 “믿음”에 의존시킴으로서, 계시에 심리적 작용이 끼어들 여지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계시에 심리적 작용이 끼어들 때, 믿음은 암시로 전락될 위험이 생깁니다.

예컨대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히 11:3)”라는 말씀이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졌다는 것을 믿으면 그렇다고 여겨진다”라거나, “하나님이 계시다고 믿으면 하나님이 계신 것으로 여겨지고 안 계신다고 믿으면 안계신다고 여겨진다”는 암시 신앙이 됩니다. 이렇게 계시에 심리작용이 첨가될 때, 오늘날 많은 비판을 받고 있는 ‘심리학에 물든 기독교’가 되고 맙니다.

그리고 이렇게 심리 작용에 물든 왜곡된 믿음 인식으로는 정확한 삼위일체 하나님 인식에 이르지 못하며, 그러한 왜곡된 하나님 인식으로는 신앙이 언제나 장님 코끼리 만지듯 모호합니다. 계시에 심리의 도움을 받아 믿음을 완성하려고 했던 의도와는 달리 오히려 심리로 인해 계시가 흐리게 됩니다.

또 하나의 ‘계시 신앙’은 "그리스도 신앙을 통해서만 삼위일체 하나님 인식에 이른다”고 한 ‘루터의 신앙인식론’입니다. 루터는 그리스도 신앙만을 하나님인식에 이르는 유일 계시로 삼으며 심리 작용의 접근을 차단했습니다.

이러한 루터의 ‘그리스도 중심 신학’이 칼 바르트(Karl Barth) 같은 괴물(?)을 만들어냈다는 비판도 받지만, 루터가 하나님에 대한 계시를 엄격하게 그리스도 신앙으로 한정지어 계시에서 심리작용을 떼어놓음으로서, 믿음이 심리에 의해 조작될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한 것은 그의 큰 업적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을 통해 성부 하나님께로 인도받고, 나아가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나오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요 15:26) 명실공히 삼위일체 하나님 인식에 도달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5)”고 한 것은 하나님의 지혜이신 그리스도(고전 1:24) 신앙을 계시로 삼은 믿음만이 하나님의 능력위에 세워진 참된 믿음이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를 믿어 성령으로 말미암아 인식된 삼위일체 하나님 인식은 희미하지도 미심쩍지도 않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진 것(요일 1:1)” 같이 확실합니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근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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