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 created me in His own image, in His own likeness(GENESIS 1:27)".

학교 게시판에서 마음 따뜻해지는 공고문을 보았다. 농촌 일손돕기 봉사활동에 참여할 친구들을 초대한다는 내용이다. 게시판에는 여러 가지 스펙을 쌓기 위한 각종 연수이며 세미나 공고와 기업체에서 보낸 취업설명서, 박람회 일정으로 꽉 차 있었다. 봉사활동 공고는 그 한 모퉁이에 자그마하게 붙어 있었다. 나는 잠시 발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대한민국 대학생들의 농촌 봉사활동이 매우 활발하고 보편화 되었던 시절이 있다. 그 모체는 브나로드 운동(농촌계몽 운동)이다. 일제강점기 일본의 조직적 탄압과 감시가 심해질 무렵, 농촌 사람들의 문맹을 퇴치하고 의식을 일깨워 나라를 되찾고자 하는 새로운 학생 운동으로 등장한 것이다.

명칭은 러시아어로서 '민중 속으로'라는 뜻이다. 1931년 7월, 학생들이 동아일보의 후원을 얻어 '브나로드'라는 슬로건 아래 농촌계몽에 나서면서 시작된다.

내가 살던 마을에도 여름방학이 되면 서울에서 공부하던 선배들이 고향 마을로 내려와 농촌을 돕고 글을 모르는 노년층에게 글을 가르치곤 했다. 밤에는 중고등 학생들을 대상으로 정신교육(?) 프로그램도 진행했다.

주로 마을 교회를 빌려 노래와 레크레이션, 그리고 찬송가와 성경을 가르쳤다. 강의 시간을 두고, 브나로드 운동을 시작한 사람들과 동역한 사람들, 특히 소설가 심훈 이광수에 대해 들려주면서 농촌 사랑에 대한 학생들의 의식을 일깨우려 했다.

당시 나는 중학생이었고, 우리 마을에는 농촌계몽 운동에 지대한 관심을 보인 고등학생인 선배 한 분이 있었다. 나는 그 선배를 매우 따르고 좋아했다. 그는 책을 많이 읽었고 문학을 사랑했다. 심훈(1901-1936)의 <상록수(1935)>를 탐독했고, 스스로 채영신처럼 농촌을 위해 살겠다고 했다.

농촌계몽 운동을 반영한 소설 <상록수>는 동아일보 창간 15주년 공모전에 당선된 심훈의 장편소설이다. 선배 때문에 나도 그 책을 읽었다. 그리고 만날 때마다 소설을 주제로 소설 같은 이여기를 나누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그 선배와의 대화를 통해 처음으로 가진 자의 횡포와 없는 자의 고통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 것 같다. 그러나 선배가 그토록 강조하던 농민의 빈곤과 피폐의 원인과 시대적 맥락 등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아름답고 전원적인 풍경으로 고향 마을을 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선배가 2학년 때, 여름방학에도 우리 마을에 농촌 봉사활동을 온 대학생 그룹이 있었다. 남자 청년들은 하나같이 외모가 준수했다. 지성미가 넘쳤고 세련되고 예의가 발랐다. 특히 리더인 H군은 카리스마가 넘치는 매력을 더하고 있었다. 여고생들은 그에게 환호했다. 중학생인 우리도 다투어 그들 앞에 나아가 조잘대기 시작했다. 참으로 유쾌 그 자체였다.

그러던 어느 날 늦은 저녁, 예고도 없이 선배가 찾아왔다. 늘 분명하고 당당한 모습과는 다르게, 선배의 표정은 혼란스러웠다. 약간 들뜨고 불안한 표정이 역력하였다. 우리는 말없이 걸었다. 강 언덕에는 푸른 달빛이 흔들리며 내려 앉았다. "나, 박동혁을 찾았어. 이제 채영신이 채영신일 수 있다." 뜬금 없는 선배의 말이었다.

송영옥 기독문학
▲송영옥 교수(기독문학 작가, 영문학 박사, 영남신대 외래교수).
그는 소설 상록수의 주인공이다. 청석골에서 농촌계몽운동을 하던 채영신은 어느날 모 신문이 주최한 농촌계몽 운동 집회에서 박동혁을 만나 서로 사랑에 빠진다.

수년 동안 선배는 온통 H를 롤모델로 삼고 그에게 집중했다. 그를 중심으로 선배의 시간은 돌아갔고, 선배의 우주는 그를 축으로 존재했다. 글을 썼고 시를 발표했다. 사랑은 그의 펜 밑에서 이슬 방울처럼 영롱하게 빛을 냈다. 당시 선배가 했던 말을 나는 지금까지도 잊지 않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

학교 게시판에서 기독학생회가 붙인 공고문을 보는 동안 스쳐간 생각은, 나의 시간을 과거로 돌려놓는다. 마음이 짠하다. 학기 내내 진로 문제로 몸살을 앓으며, 스펙을 쌓느라 머리가 터져 나갔을 법한 학생들 아닌가.

그래도 누군가를 사랑하기로 선택하고 그것에 헌신하려 한다. 어쩌면 이들 때문에 세상은 좀 더 따스한 쪽으로 나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의 선배와 같은 또 한 사람, 선배가 사랑한 또 다른 사명자의 스토리가 이들에게서 이어지면 좋겠다. 돌아와 부르는 사랑의 시는 가을 캠퍼스를 생동감으로, 낭만으로 채워 주리라.

어쩌면 사랑은 가장 어려운 일을 선택하고 그 길목에 들어섰을 때 내게로 오는 것 아닐까. 햇살처럼, 꽃 눈발처럼, 기도처럼, 은혜의 물방울(Grace Happens)로.

"... 사랑이 어떻게 내게로 왔는가, 햇살처럼 왔는가, 꽃 눈발처럼 왔는가, 기도처럼 왔는가, 말해다오...(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 1875-1926)".

송영옥 교수(기독문학 작가, 영문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