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에르케고어 이창우
▲이창우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오늘은 키에르케고어의 제자도 여섯 번째 시간으로, '고난의 짐'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그는 아마도 고난 자체에 천착했던 것처럼 보인다. 성경 말씀으로는 마태복음 11장 28-30절까지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니라."

표재명 교수에 의하면, 키에르케고어가 이 구절을 묵상하다, 그의 마음 속에 짓눌린 모든 시름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고 한다. 아마 그에게는 이 구절이 그의 '회심'이 되는 계기가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그에게 이 말씀의 힘은 상당히 크다. <그리스도교의 훈련>에서는 이 말씀의 28절을 집중적으로 고찰하지만, <고난의 복음>에서는 30절의 '쉽다'는 의미를 살려 이야기를 전개한다. 따라서 앞으로 몇 차례에 걸쳐 <고난의 복음> 2장에 나와 있는 '고난의 짐'의 의미를 집중적으로 살필 예정이다.

이번 시간은 개론 격으로 '쉽다'는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자. "내 짐은 쉽다"고 우리말로 번역돼 있지만, 이 구절의 헬라어는 'χρηστοs'이고 덴마크어로는 'gavenlig'로 표현돼 있다. 이 말은 일반적으로 '쉬운, 친절한, 유익한, 좋은, 선한'의 의미로 성서에서 사용된다. 이런 의미를 확인하고 싶다면, 같은 단어가 쓰인 다른 구절을 참고하면 된다. 예를 들어, 롬 2:4(인자하심), 고전 15:33(선한), 눅 5:39(좋다)가 있다.

그러나 키에르케고어는 이 단어를 '유익하다'는 의미로 해석한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주님의 짐은 유익하고 주님의 짐은 가볍다."

이 지점에서 다시 한 번 역설적 사유가 필요하다. 주님의 짐이 유익하고 쉽다? 물론, 이것을 믿으면 된다. 그러나 믿기 전에 생각해 보라. 과연 주님의 짐이 유익하고 쉬운가? 게다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들을 모두 초청하여 주님께 와서 쉬라고 하신다. 이것은 말이 되는가?

성서에 의하면, 주님은 여행을 갈 때 아무것도 들고 가지 말라고 하신다. "금이나 은이나 동을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도 가지지 말라(마 10:9-10)"고 한다. 그런 주님께서 여행 중에 많은 것을 챙기고 갔겠는가? 그렇지 않다면, 주님은 여행 중에 어떤 모습을 하고 계셨을까? 아마 거지꼴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생각해 보라. 거지꼴을 하고 있는 분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 와서 쉬라!" 말씀하신다. 과연 이 말에 따를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아마 사람들의 반응은 이랬을 것이다.

"아니, 정작 쉬어야 할 사람은 당신 같은데, 와서 쉬라고 하다니 정신 나갔군요."

키에르케고어의 <그리스도교의 훈련>에는 이런 점을 강조하며, 기독교의 '실족'을 논한다. "나를 보고 실족하지 않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한 이유도 이런 맥락에서 살피고 있다. 당시 상황에서 주님의 저 말씀은 믿기도, 이해하기도 어려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주님의 짐이 유익하고 가볍다는 생각은 어떤가? 정말로 주님의 짐이 유익하고 가벼운가? 만약 동시대에 주님과 동행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아마 다음과 같이 반응하지 않았을까?

"짐이 가볍다고 말씀하시면서 주님의 멍에를 메라고 말씀하시지만, 죄송합니다. 저는 그냥 제 멍에를 메겠습니다. 저는 사실 그 길을 갈 자신이 없습니다."

한 마디로, 주님의 짐은 절대 가볍지 않다. 유익하다고 보기에도 힘들다. <자기 시험을 위하여>에서는 주님의 길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지를 집중적으로 밝힌다. 주님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목숨을 걸어야 한다. 어찌 그 길이 유익하고 쉬울 수 있는가?

이런 지점에서 '무턱대고 믿기'보다 조금만 생각해 보아도, 이 말씀이 얼마나 믿기 힘들고 얼마나 사람을 '실족'하게 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주님의 짐은 무겁다. 절대 가볍지 않다. 유익하지 않다. 그 길을 걷는 사람은 언제 어떤 위협을 당할지 모른다. 그러나 어떻게 안전을 보장받는가? 주님이 말씀하신 '가볍다'는 말은 실제로 가벼워서가 아니라, 무거운 것을 가볍게 멜 수 있는 인생의 '기술'을 말한다.

실제로 유익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유익하지 않은 것을 유익하게 만들 수 있는 인생의 '기적'이다. 실제로 안전을 보장받는 것이 아니라, 안전하지 않은 길을 걷지만 영원한 안전을 보장받는 기쁨을 맛보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키에르케고어가 말하고자 하는 제자도이다. 제자는 주님이 걸었던 같은 길을 걷는다. 그 길을 걸으면서 고난을 겪는다. 왜냐하면 이 세상이 비진리이다 보니 진리의 길을 걷는 자는 필연적으로 고난당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도대체 이 고난이 어떤 점에서 유익하단 말인가?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많은 고난의 짐을 지는 경우가 있다. 그것도 선한 일을 하다가 고난을 당하면, 고통은 더 심해진다. 하나님이 살아계신지 의문이 들 때도 있다. 세상에서 의를 위하여 고난당할 때, 선을 행하고도 더 핍박을 당할 때, 말씀대로 살고도 일이 더 풀리지 않을 때, 우리는 어떻게 이 짐을 가볍게 들 수 있는가? 더 중요한 것은, 이런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 어떻게 기뻐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앞으로 살펴볼 <고난의 복음> 2부 '고난의 짐'에 대한 생각은 이런 의문에 대해 대답할 것이다. 사랑하는 독자, 당신은 어떤 짐을 지고 있는가? 주님의 멍에를 메었는가, 여전히 자신의 멍에를 메었는가? 어떤 멍에를 메는 것이 더 쉽고 유익할까?

주님의 멍에를 메는 일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익하다고 믿는다면, 기적은 나타날 것이다.

이창우 목사(키에르케고어 <스스로 판단하라> 역자, <창조의 선물>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