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준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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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곳에 이르러 해가 지므로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 곳의 한 돌을 가져다가 베개로 삼고 거기 누워 자더니, 꿈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 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창 28:10-15)”.
하나님은 야곱이 지금까지 아브라함이나 이삭으로부터 전해 듣고 믿었던 그 복에 대해 다시금 약속을 주시고, 이를 위해 끝까지 동행해 주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 사건은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나타나셨던 최초의 기록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현현(顯現)을 모두 일곱 번 경험하게 됩니다(창 31:3, 31:11-13, 32:1-2, 32:24-30, 35:1-9, 46:1-4).
야곱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 베개로 삼았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기름을 부은 뒤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 했습니다. 그 성의 옛 이름은 루스였습니다.
야곱은 하나님께 서원하기를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다(창 28:18-22)”고 약속합니다.
야곱은 부모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40세에 결혼한 형 에서와 달리 70세가 지나도록 결혼을 하지 않았습니다. 가나안 여인들을 아내로 구하지 말도록 권유한 부모의 말씀과 하나님의 뜻이 계셨던 것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외삼촌인 라반이 약속을 이행하지 않아 14년이라는 긴 세월을 견뎌내며, 마침내 두 여인을 얻게 된 야곱의 인내력도 참으로 좋은 본보기 아닐까 싶습니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 오랜 세월과 모진 고통을 감내하며 쟁취하는 그의 끈질긴 투혼은, 우리 신앙인들에게 좋은 본보기입니다.
주님께서는 마지막으로 제자들과 만찬하시며 떡을 떼어 주시고 “이는 네 몸이라”, 그리고 잔을 주시며 “이는 내 몸의 피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의 주된 많은 관심사 중에, 먹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느끼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시대 변화에 따라 육신의 양식은 예나 지금이나 우리의 삶에 있어 중요한 일부가 되었습니다. 육신의 건강과 생명을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 좋은 것, 필요한 것을 얻고 취하듯, 그리스도인인 우리에게 주어진 생명의 영적 양식은, 육신의 생명을 위해 주어진 것보다 더욱 소중하고 중요한 것임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며 기념하는 지극히 거룩한 의식인 ‘성찬식’은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전 생애와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성찬의 의미가 있음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피로 맺은 하나님과의 새로운 언약을 통해 우리에게 주고 가신 희생제물은, 육신의 생명뿐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제자들을 두고 떠나야 할 순간을 맞이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의 마지막 만찬을 나누시며 빵과 포도주를 들고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리신 후에 떡을 떼시며 “자 먹으라, 이는 내 몸이니…, 자 마셔라 이는 내 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의 몸과 피를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의 양식으로 우리에게 주시며, 새로운 계약을 맺으십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 안에서는 이 주님의 마지막으로 부탁을 건성으로 듣고 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당부하신 그 말씀을 실천하려는 의지 없이, 오롯이 자신의 안일과 육신의 행복만 찾고 있습니다. 진실한 성찬의 의미는 사라지고, 형식적인 예식에만 치중하고 있는 것이 더욱 안타깝다는 것입니다.
육신의 보신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좋은 음식을 먹기 위해서 혈안이 돼 있지만, 영의 양식에는 굶주려도 상관치 않는 모습을 보면, 과연 주님을 믿는 분들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어진 환경에 주어진 사명을 감사함으로 받아야 하겠습니다. 특히 나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그 깊은 사랑에 질병을 물리칠 수 있는 강력한 의술이 있습니다.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신앙인들은 인내를 즐기며, 반드시 주님께서 나의 주님 되셔서 눈동자같이 지켜 주실 것을 확신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사탄들이 즐기는 놀이에서 벗어날 줄 믿습니다.
성도들을 사랑하지 않는 교회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모른 채 육신의 주님만을 찾는 자들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많은 이적과 기사에만 의지하는 영혼 없는 육신의 신앙인들인 것입니다. 적어도 신앙인들이고 교회 지도자라면, 하나님 말씀을 수시로 묵상하고, 교회와 성도,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그러한 신앙인들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성만찬을 통해 예수님의 현존을 체험하고, 우리에 대한 지극한 사랑으로 모든 것을 내어주신 예수님과 하나된 삶을 살기 위해 끊임없이 이 성찬식을 거행하며, 하나님과 예수님의 사랑 안에 일치하도록 늘 우리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영원한 생명의 양식으로 우리의 양식이 되어주신 예수님의 몸과 그것은, 전적인 우리를 위한 사랑의 희생 제물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하지만 어떤 교회는 ‘성찬식’은 매달 하지만, 성찬식의 참 의미를 알고 있는지 구별이 되지 않을 정도입니다. 그 교회의 목사와 장로들의 행동은 정말 보기 끔찍할 정도의 수준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행동을 보노라면, 차라리 성찬식을 하지 않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마음 한 구석과 머리에 혼돈이 찾아옵니다.
이 모든 것이 주님께서 몸소 실천하시며 보여주신 그 사랑이 없다면 도저히 가능할 수 없는 나눔과 희생의 삶인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사랑을 먹고 영원한 생명의 기쁨을 희망하고 갈망하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수님을 모범 삼고 모든 것들을 따라 나의 사랑이 필요한 이웃들에게 그 생명을 나누어 주는 것이 오늘 우리 신앙인들이 기억하며 기념하는 일 아닐까요? 그것이야말로 지극히 거룩한 성찬식일 것입니다.
형식적인 겉치레 예식과 헛된 욕심, 탐욕과 명예와 권력, 부를 쟁취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아끼지 않는 일부 교회 지도자들은 주님의 아름다운 ‘성찬식의 참 의미’를 깨닫고, 지금이라도 모든 것을 주님 앞에 내려놓고 다시금 거룩한 모습으로 돌아오기를 간곡히 기대하며 축복합니다.
이효준 은퇴장로(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