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믿으면 안전 보장된다고 강조하는 설교자? 사기꾼”

입력 : 2018.07.14 06:45

[키에르케고어를 만나다] 제자도 (5) 그리스도의 길

키에르케고어 이창우
▲이창우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그리스도인은 주님이 가신 길을 따라 여행하는 나그네이어야 한다. 먼저 주님이 가셨고 우리를 위해 거처를 예비하셨다. 이 길에서는 떠나지만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

길을 떠나지만 다시 돌아올 수 없다면, 그동안 가지고 있었던 재산, 예컨대, 집, 땅, 심지어는 집에 있는 각종 물건들조차 거추장스럽다. 따라서 나그네가 되기 위해서는 몸을 가볍게 해야 한다.

여행을 떠나야 하는 이유는 그가 원하는 본향이 이 땅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히 11:15-16). 그리스도께서 먼저 가서 예비하신 '거처'를 바라기 때문이다(요 14:2). 그는 이 세상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딘가 의지할 곳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가 포기한 이 세상에 의지할 장소를 가질 수 없다. 그리스도인인 그가 실제로 자기와 이 세상을 부인했다면, 이것을 이해하는 것은 얼마나 쉬우랴!

그러나 실제로 우리의 삶은 어떤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정말로 '정신적 여행'을 하기 위한 것인가? 나그네가 되기를 바라는가?

아니, 오히려 그 반대의 경우가 더 많은 것처럼 보인다. 예수 믿어 이 땅에서 잘 되기를 바란다. 사업이 더 번창하기를 바란다. 마음에 평안을 얻기 바란다. 더 큰 성공을 얻기 바란다.

심지어는 이런 것들을 강조하는 목사님도 많다. 예수 믿으면 모든 것들이 만사형통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복음과 함께 고난당해야 하는 삶을 설교하는 설교자는 왜 이토록 적은가?

바울은 디모데에게 말한다. "우리 주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또한 주님을 위해 감옥에 갇힌 나에 대해서도 부끄러워하지 말기 바랍니다. 오히려 복음을 위해 함께 고난을 받으십시오(딤후 1:8)."

어쩌면 우리는 그리스도와 고난받는 삶을 선택하기보다, 세상을 포기하기보다, 끈질기게 세상을 붙잡기 위해 그리스도를 이용했는지도 모른다. 세상에서 잘 되는 삶을 저 본향의 삶보다 더 갈망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모양만 나그네이고, 길을 떠나기보다 앉아만 있었던 것이다. 주님께서 저 하늘에 '거처'를 예비했고, 그것을 바라보는 자는 이 세상의 더 안락한 삶을 포기해야 정상이다.

사도 바울은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고전15:9)"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앞으로 다가올 삶에 영원한 행복이 없다면, 그리스도를 위하여 세상의 모든 재물을 포기하고 모든 악을 견딘 사람은 사기를 당한 것이고 두렵게 속임을 당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가올 삶에 영원한 행복이 없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 그리스도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 이 세상에 대해 죽은 사람은 가장 불쌍한 사람이 될 것이다.

그가 정말로 이 땅의 이익을 얻으려고 노력하지 않았다면, 심지어는 그런 이익이 제공되었는데도 붙잡지 않았다면, 자신을 희생해야 하는 과업을 선택했다면, 그는 세상의 관점에서는 바보다.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자다.

그렇지만 다가올 삶에 영원한 행복이 있다면, 그때 이 불쌍한 자, 그는 모든 사람들 중에서 가장 부요한 자다. 만약 이 세상 밖에 없었다면, 이 세상에서 최고의 것을 누리고 사는 사람이 가장 복 받은 자이고,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자가 된다.

그러나 영원한 행복이 있다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자는 과연 누구이겠는가? 그러나 바울은 무엇이라 말하는가? 이 영원한 행복이 있다는 것이다.

바울의 삶을 생각해 보라. 그는 복음으로 고난당하다가 감옥에 갇힌 자이다. 어쩌면 세상의 관점에서 그는 모든 사람들 중에서 가장 불쌍한 자이다. 왜냐하면 그는 이 세상의 안전을 위해 노력한 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 세상에서 잘 살기 위해 노력한 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예수 믿으면 이 세상의 안전이 보장된다고 강조하는 설교자는 사기꾼이다. 오히려 예수 믿으면 이 세상의 안전이 제거된다. 이 세상이 비진리이기에 진리의 길을 걷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고난당하기 때문이다. 주님이 고난당한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예수 믿고 여전히 세상의 안전을 구하는 자가 정말로 주님을 믿는 자인지 의심스럽다.

그러나 이 시간 누구를 비난하지는 말자. 각자는 오직 자기 자신만 판단하자. 왜냐하면 이런 관심에서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기 원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자신의 안전을 획득하기 위한 또 다른 시도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지 않다면, 그는 확실히 심판과 영원한 행복 모두가 다른 세상에 속해 있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슬프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것은 되풀이하여 일어났다. 반복은 계속된다. 누군가 먼저 앞에 간다. 다른 사람은 먼저 간 사람을 열망한다. 누군가는 그를 따르기를 바란다. 그러나 어떤 인간도, 어떤 사랑받는 자도, 어떤 스승도 어떤 친구도, 따른 자를 위해 거처를 예비하기 위해 먼저 가지 못 했다.

그리스도의 이름만이 하늘에서와 땅에서 오직 단 하나인 이름이듯이, 또한 그리스도는 이런 식으로 먼저 가신 오직 단 하나인 선조가 되신다.

하늘과 땅 사이에 오직 단 하나의 길이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이다. 시간과 영원에서 오직 단 하나의 선택이 있다. 그것은 이 길을 선택하는 것이다.

이 땅에서 오직 단 하나의 영원한 소망이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따라 하늘에 이르는 것이다. 죽음에서 단 하나의 축복된 기쁨이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따라 생명에 이르는 것이다!

이창우 목사(키에르케고어 <스스로 판단하라> 역자, <창조의 선물>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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