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칼럼] 당신의 예수는 잃어버린 자(the lost)의 주님이십니까?

이대웅 기자 입력 : 2018.07.14 06:45

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가나안(Canaan)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하되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마 15:22-27)."

본문은 어떤 신앙의 장애물이 있을지라도 그것을 돌파하고 나아가라 는 불퇴전의 믿음을 독려할 때 흔히 인용되는 구절인데, 정당성이 없어 보입니다.

성경적으로 볼 때, 그러한 저돌적인 신앙은 인간의 의지를 발분(發憤)시키므로, 신념과 결탁된 '자아 확장(self-expansion)적 신앙'을 유발시킬 수 있습니다. 나아가 인간의 전적 무능에 대한 자각을 무디게 하고, 순수 신앙을 견지하기에 어렵게 만듭니다.

본문이 가르치는 진정한 의미는 개(犬)가 상정하는 바(26), 최소한의 자비를 보장받을 수 있는 카테고리인  '이스라엘 집의 잃은 양(24)' 안에도 끼이지 못하는 '버려진 자'의 구주가 예수님이라는 뜻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버려진 자' 가나안 여인은 그것의 한 예시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귀신들린 딸을 고쳐달라며 예수님께 도움을 호소했지만(22), 예수님으로부터 세 번씩이나 냉대를 받았습니다.

마지막에는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는 굴욕적인 배제를 당합니다. 곧 개(犬)가 상징하는 바, 일말의 호의도 기대할 수 없는 '버려진 자' 취급을 당합니다.

그렇지만 그녀는 그런 그의 응대를 당연시하며, "주여 옳소이다"라고 합니다. 이는 흔히 생각하듯 자기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굴욕을 참으며 억지로 자신을 낮추는 것이 아닌, 율법 앞에서 자신의 진면목을 보고 하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그녀는 겸비함으로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27)"라며 그리스도의 긍휼을 의지하므로 마침내 그의 자비를 입습니다(28).

혹자는 가나안 여인을 개(犬)로 빗댄 예수님의 말을 너무 심하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조금도 지나친 것이 아닌 사실 그대로를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비단 그녀에게 국한지어 말한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향한 것이었습니다.

사실 율법의 목적은 하나님을 반역한 죄인에게 눈꼽만큼의 자비도 없다는 것을 인간들에게 알리는데 있습니다. 율법의 몽학선생 역할이란, 우리를 율법 앞에서 철저히 절망시켜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 들고 옵니다'라며 그리스도의 자비를 의지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갈 3:24).

율법 앞에서 자신이 '잃어진 자(The losts)'라는 자각을 갖지 못한 자는 결코 그리스도께로 가지 않으며, 바리새인 서기관처럼 자기 의를 세우는 헛된 일에 몰두하게 됩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Amazing Grace)'이라는 찬송가로 유명한 아프리카의 노예 상인 존 뉴턴(John Newton, 1725-1807)의 노랫말 내용은 가나안 여인이 가졌던 '개 같은 나(28)'라는 겸비함 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의 그러한 겸비함이 그로 하여금 절체절명의 심정으로(desperately)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했습니다.

동족의 질시 속에서 길바닥의 돌멩이처럼 구르던 삭개오 역시 '나 같은'이라는 겸비함이 있었으며, 그 겸비함이 그로 하여금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뽕나무에 오르게 할 만큼 그리스도를 절실히 원하게 했습니다(눅 19:4).

성전에서 기도하던 세리가 고개를 들지 못한 채 가슴을 치며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18:13)" 한 것 역시 그러한 겸비함의 표현이었습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자신들은 잃어진 자들이다'는 자각이었고, 그러한 '버려진 자(The losts)' 의식이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께 절체절명의 심정으로(desperately) 매달리게 했습니다.

주님은 그런 삭개오를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만들어주었으며(눅 19:9), 세리에게는 당대의 의인들로 칭송된 바리새인보다 더 의롭게 만들었습니다(눅 18:14). "뭐 그 정도까지야"라며 자신에 대한 기대가 단 1프로라도 남아있는 자는, 결단코 그리스도께로 가지 않습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그는 아직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설사 그가 외형적으로는 그리스도께로 가는 모습을 취해도, 그에게로 간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잃어진 자의 구주이기에, '잃어진 자'라는 심정으로 그리스도께 가지 않은 자는 그에게 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어중간한 죄인들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하나님께는 인간이 완전한 의의 상태에 있든지, 아니면 가장 비천한 자리에 있든지 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가장 높고 거룩한 곳', 그리고 '가장 낮고 비천한 곳' 두 극점을 점(占)하셨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동등이시면서 동시에 십자가에 못 박힌 가장 흉악한 죄인의 지위를 점하셨습니다(빌 2:6-8). 하나님은 당신이 점(占)하신 이 두 지위를 통해, 그는 완전한 '의인의 주'이시든지 아니면 '잃어진 자들(The losts)의 주' 되심을 보여주시며, 모든 인간들이 둘 중 하나이기를 기대하십니다.

그러나 세상엔 완전한 의인이 없기에, 그리스도는 오직 잃어진 자만의 하나님이 되실 뿐입니다. "지존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사 57:15)". 하나님은 높고 거룩한 곳에 계시지만, 버려진 겸손한 자들과 함께 하신다는 뜻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전도에서도 드러납니다. 그가 전도한 전도 대상자들은 자기들이 죄인이기는 하지만 구원을 이룰 여력이 있다고 믿는 어중간한 바리새인 서기관들이 아닌, 스스로를 포기한 '잃어진 자들', 예컨대 세리 삭개오, 창녀 마리아, 사마리아 여자, 베데스다의 38년 된 중풍병자 같은 이들이었습니다.

몽학선생 율법 앞에서 스스로 '잃어진 자'임을 자각하지 못한 자는 '율법의 마침'이신 그를 믿음으로 영접하지 않을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롬 10:4).

사실 구원이라는 용어 자체가 잃어진 자들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자신을 건져낼 수없는 자를 타력으로 건져내는 것이 구원이지, 스스로의 힘으로 빠져나올 수 있는 자를 건져내는 것은 구원이 아닙니다.

구명줄은 홍수에 떠내려가는 절체절명의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지, 유유자적하게 유영하는 수영 선수들에게는 필요치 않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10)"고 분명히 한정지었습니다.

따라서 율법 앞에서 '잃어진 자'가 되지 않으면, 그에겐 그리스도가 필요치 않습니다. 은혜의 사도 스펄전(C. H. Spurgeon) 역시 그리스도의 복음은 오직 잃어진 자에게만 필요하다고 역설합니다.

"복음은 잃어진 자들을 위한 것입니다. ^ 만약 당신이 잃어진 자가 아니라면 구세주께서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목자가 길을 잃어버리지 않은 양들을 찾아나서야 되겠습니까? 왜 여인이 지갑에 들어있는 돈을 찾으려고 집을 온통 쓸고 찾아야겠습니까?"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으시는 예수님(눅 15:4)은, 자신을 잃어진 자로 여기는 자들을 찾아 구원하십니다. 이런 점에서 현재 자신의 삶을 긍정하며, 신앙생활의 목적을 보다 더 행복해지고 보다 풍요로워지는 것에 두는 현대 교회들에게는 사실, '잃어진 자들'의 주님이신 예수님이 필요치 않습니다. 잃어진 자신의 모습을 직면하고 절체절명의 심정으로 붙들게 되는 분이 그리스도십니다.

그리스도는 잃어진 죄인들의 구주이시기에(눅 19:10), 그의 몸 된 교회는 당연히 '잃어진 자들(The Losts)의 모임'이어야 합니다. 오늘의 주인공 가나안(Canaan) 여인은 예수님이 개로 상정한 '잃어진 자'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 주려고 오신 분임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이 그녀를 향해 "너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이 아닌 개(犬)"라고 한 것은, 단순히 '네가 이래도 포기하지 않을래?'라며 그녀의 인내심을 떠 보려는 '미끼 질문'이 아님을 그녀는 알아 차렸습니다.

자신은 율법의 정죄를 받아 하나님의 긍휼이 배제된 '버려진 자(The Lost)'이며, 예수는 자신처럼 버려진 자의 구주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는 그가 예수를 "다윗의 자손이여(22)"라고 부르신 호칭에서 발견됩니다.

예수님은 이 여자의 믿음을 만족해하시며 그녀의 딸을 구원해주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구원 얻는 믿음은 예수를 '잃어진 자의 구주'로 믿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신이 믿는 예수는 잃어진 자의 구주입니까?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이신칭의, 값싼 구원이 아닙니다(CLC), 근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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