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릭 폴리 목사.
▲에릭 폴리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한국 순교자의 소리는 “북한 기독교인들과 관련된 문제를 이해하고 해석하길 원한다면, 북한 기독교인에게 그 답을 묻는 것이 가장 최선”이라는 본질적인 원칙 위에 설립됐다.

사실, 우리는 이렇게 믿는다. 북한 기독교인들을 위해 기도하거나 그들을 돕기 전에, 우리가 먼저 그들에게 배워야 한다고 말이다. 북한에 대해서 배울 뿐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상황 속에서 어떻게 우리 각자가 신실한 기독교인이 될 수 있는지 그들에게서 배워야 한다.

이는 지난 4월 27일 열린 남북정상회담이 북한 기독교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까 하는 질문에 대한 최선의 답이다. 이런 사안들에 대해 질문할 수 있는 북한 기독교인을 찾는 것은 확실히 어렵고 시간이 많이 소요될 것같이 보인다. 정부 지도자들, 기자들, 논평가들, 그리고 북한 전문가들의 목소리와 의견을 듣는 것이 훨씬 쉽다. 나는 신성하고 새로운 역사를 쓴 날이 이 회담을 통해 열렸음을 자축하는 김정은과 문재인이 사용한 문구를 그대로 빌려 쓰는 전 세계의 많은 기독교인들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주말 내내, 이 회담을 그들의 수십 년 기도의 응답으로, 우리가 그동안 목격하지 못했던 ‘카이로스’의 순간으로 묘사하며 넘쳐흐르는 감정으로 페이스북 포스트를 올리는 기독교인들을 보았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전 세계 기독교인들이 우리와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의견을 성급히 나누기보다, 이 같은 순간에 할 수 있는 것이 한 가지 있다고 믿는다. 그것은 바로 북한 기독교인들이 사실 존재하며, 우리와 한 몸을 이루고 있으며, 그들이야말로 북한을 위한 하나님의 중요한 영적 공급이며, 당신과 내가 목격하는 대부분의 사건들을 알고 있으며, 그들의 형제인 우리 기독교인들이 배울 만한 관점을 나누고 싶어 한다는 사실이다.

한 예로, 60~80%의 탈북민들이 매달 정기적으로 북한 내에 있는 그들의 친척들과 연락을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길 바란다. 또한, 북한 주민들은 최근 일어난 사건들에 대한 소식이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빠르게 전달되는, 지속적이고 신뢰할 만한 정보 시스템을 구축해 왔다. 이 사실 때문에 아마도 “북한 기독교인들의 목소리를 기다려보자”라는 페이스북 게시물의 제목이 조금 싱겁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의 목소리를 낼 기회가 거의 주어지지 않았던 이 사람들에게 그들의 목소리를 낼 기회를 주는 것은, 우리의 눈물 어린 희망적 숙고보다 더 많은 것을 성취할 수 있도록 해준다.

히브리서 13장 3절 말씀은 이런 기다림이 효과적임을 말해주고 있는 것 같다. “너희도 함께 갇힌 것 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너희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받는 자를 생각하라.” 세상으로 하여금 이들의 목소리를 기다리도록 상기시키는 것이 바로 우리가 핍박받는 자들을 기억하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방법 중 하나가 되는 것이다.

북한 기독교인들의 의견을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세상의 논평가들이 쓴 글들을 조심스럽게 읽어보며 우리가 이미 북한 기독교인들로부터 배웠던 것들과 비교할 수 있다.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철회할 수 없는 비핵화 평화가 북한 기독교인들이 우리에게 기도해달라고 가르쳐주었던 기도제목인가? 아니다.

이것은 북한 기독교인들이 순진하거나, 편협하거나, 비현실적이거나, 이상주의자들이어서가 아니다. ‘북한 문제’는 본질상 영적인 문제이며 정치는 이차적인 문제라는 것을 북한 기독교인들이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었다. 나라 전체가 악(惡)에 사로잡혀서 복종한 것이며, 핵무기는 이런 악을 표면적으로 나타낼 뿐이다. 표면적인 문제들만 가지고 고심하는 것은 근본적인 원인을 간과하게 만든다. 여기서 근본적인 문제는 바로 북한 정부가 “인간”이 무엇인지 다시 정의했다는 것이다. 북한 정부에게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피조물’이 아닌, ‘김씨 일가에게 유용하고 충성하는 존재’일 뿐이다.

전 세계 많은 기독교인은 이 정상회담을 통해 세대 간 이어오던 영적인 견고한 진이 파괴되고, 북한과 김정은이 자유롭게 되어 새로운 생각과 행동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되었다고 보았다. 그러나 자유세계에 사는 우리는 한심하게도 항상 순진하다. 악(惡)의 깊이와 그 천성, 그것이 가진 비타협적인 태도와 놀랍도록 기만적인 기질에 대해서 말이다. 우리는 그 악의 실체가 과연 무엇인지 우리에게 상기시켜 줄 수 있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이들은 바로 매일같이 그 악의 채찍질로부터 상처받는, 핍박받는 나라에 사는 우리의 형제 자매들이다. 그들이 너무 지쳐있고, 몹시 피로하고, 극도로 폐쇄된 나라안에서 살다 보니 올바른 희망을 품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핍박받는 기독교인들은 진짜 소망을 보았을 때 그것이 진짜인지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 기독교인들이 상대하고 있는 악(惡)의 실체를 알기 때문이다. 그들이야말로 어떻게 하면 우리가 가짜로부터 진짜 소망을 구별할 수 있는지, 인간의 스케줄이나 언론 플레이를 통해서 거의 일하지 않으시는 주님을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 가르쳐 줄 수 있는 사람들이다.

지난 주말 동안 나와 대화를 나눈 북한 기독교인들은 전 세계 기독교인들이 김정은과 문재인이 나눈 대화를 전혀 새로운 것인 양 쉽게 받아들이는 것을 보고 놀랐다고 말했다. 우리는 지난 남북정상회담을 돌아보고는 그 당시의 감상, 쓰인 단어들, 제안된 사안들, 그리고 심지어 그들이 찍은 사진과 함께 먹은 음식들이 이번 회담과 높은 유사성을 보임을 발견했다. 한 예로, 사상 첫 남북정상회담을 보도한 1991년 뉴욕타임스의 기사를 보자.

남과 북의 지도자들이 오늘 아침, 화해와 불가침에 관한 조약에 서명했다. 이 조약은 서로를 향한 무력 행위를 포기하고 38년의 휴전을 공식적으로 끝내는, 한국 전쟁의 종전을 선언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협약을 통해 양국 간 정기적인 대화의 수단, 즉 전화선 및 우편, 경제 교류, 1950년 한국 전쟁 이후 서로 떨어져 있던 이산가족 상봉 등의 수단들이 복구된다. 또한, DMZ로 알려진, 즉 40년 가까이 군사분계선의 상징이었던 무장지대를 관통하는 철도와 도로의 재건도 이 협약에 명시되어 있다.

양국의 당국자들은 이번 합의가 그들이 말하는 ‘한반도의 필연적인 통일’을 향한 첫 번째 단계라고 묘사했다.

남한의 이동복 대변인은 이 협약을 “남북관계에 역사적으로 획기적인 사건이며 또 하나의 진화”라 칭했다.

이 협약에서 양국 모두 무력 행위나 서로의 체제를 전복시키는 그 어떤 시도 또한 포기한다고 합의했다.

이번 정상회담의 모두발언에서 김정은은 ‘새로운 역사가 쓰이는 순간’에 관해 말했지만, 그가 말하는 새로운 역사가 쓰이는 순간이란 ‘이미 채택된 북남 선언, 모든 합의를 철저히 이행해 나가는 것’으로 열릴 것이라 했다. 이번 판문점 선언과 마찬가지로 이미 채택된 선언과 합의에 빠진 한 가지 주제는 바로 김정은이 자신의 국민들과 벌이는 전쟁에 관한 것이다. 북한은 오랫동안 동서남북 주변에 있는 여러 나라와 평화를 이야기해 왔지만, 이 문제에 관한 한 다른 이들이 상관해서는 안 될, 협상의 주제가 될 수 없을 뿐 아니라 언급조차 할 수 없는 자기 집안만의 문제로 항상 간주해왔다. 전 세계 기독교인들은 이제 북핵 문제에서 북한 인권 문제로 대화의 주제가 자연스럽게 흘러갈 것으로 생각하겠지만, 이것은 이들이 북한에 대해 잘 모르고 하는 생각이다.

미국에 의해 아주 드물게 언급되는 인권문제들은 북미 정상회담의 사전준비에 있어 북한으로 하여금 미국의 진심을 의심하게 만든다. 북한 정부로부터 학대받는 평범한 북한 주민들에 대하여 언급하는 것은 금요일 정상회담으로 온기가 돌고 있는 남북관계에, 북한말로 표현하자면 ‘찬물을 끼얹는’ 행위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당신네를 향하고 있는 핵무기에나 신경을 쓸 것이지, 우리가 우리 사람들을 때리는 몽둥이는 신경 쓰지 말라는 것이다.

이러한 통찰력들은 우리로 하여금 정치 평론가가 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북한 기독교인들, 즉 김정은이 예수를 믿고 변화되게 기도해달라고 부탁한 이들을 기억하게 한다. 정치 평론가들은 이런 종류의 대화를 듣는 즉시 무시하겠지만, 기독교인들은 그러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 하나님은 나라들을 훈련하시고 상 주시고 벌주시기 위해 다른 나라들을 사용하시기도 한다. 그러나 그분의 행동과 관심은 이런 일들에 국한되어 있지 않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지도자들의 마음에 끊임없이 집중하고 계시는 분으로 묘사되어 있다. 성경을 공부하는 우리가 어떻게 이토록 쉽게 이 진리를 놓칠 수 있는가? 나라와 지도자들을 위한 우리의 기도 특히 북한, 미국, 그리고 남한을 위한 기도를 하면서 말이다.

이것이 아마도 현재 도사리고 있는 가장 큰 위험일 것이다. 사무엘 선지자를 기다리지 못하고 먼저 자신이 제사를 드린 사울 왕처럼, 우리 기독교인들 또한 북한 기독교인들로부터 배운 것들, 그리고 성경으로부터 배운 것들을 놀랍게도 이렇게 기꺼이 포기하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바로 우리 눈 앞에서 우리가 해 온 기도가 응답되었다고 정말 믿고 싶기 때문이다. 우리는 눈물을 닦으며 우리가 수년 동안 북한에 획기적인 변화가 생기도록 기도해 온 것을 생각해본다. 그리고 우리는 김정은과 문재인이 그 획기적인 변화를 제안한 것처럼 받아들인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부터 3대에 걸친 김씨 일가의 체제까지, 100년을 넘게 천국의 도래를 기도해 온 북한 지하교인들은 그들이 기도하고 있는 천국에 관해 조금 더 인내하고 까다롭게 분별한다. 지금까지 고난을 통해 훈련받았기에, 진정한 왕국이 왔을 때 그것을 더 잘 알아차리고 훨씬 덜 속을 것이다. 그들의 생각, 조언, 그리고 긍정적인 확인을 기다려보자.

판문점 선언에 대해, 우리가 지난 주말 동안 이야기를 나눈 북한 기독교인들의 첫 반응은 전 세계에 있는 형제자매들의 반응만큼 낙관적이지 않다. 이 사실을 통해 우리는 우리 마음을 성찰하고, 우리가 해 온 기도의 내용을 살펴보아야 하며, 천국의 도래는 이러이러할 것이라고 상상했던 방식을 다시 돌아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우리는 회개해야 하며 배울 것이 아무리 없어도 북한에 관해서만은 북한 기독교인들에게 배우려는 노력을 배로 강화해야 한다.

이곳 서울에서, 우리는 긴 여름을 위해 준비하고 있다. 우리와 함께 사역하는 사람들에게 접촉해서 우리를 염탐하려는 시도들이 있었다. 남한 정부가 “지상과 해상, 공중을 비롯한 모든 공간에서 군사적 긴장과 충돌의 근원으로 되는 상대방에 대한 일체의 적대행위를 전면 중지한다.”는 판문점 선언을 이행하는 데 우리가 진행하는 풍선 사역, 라디오 사역, 제자훈련기지, 탈북민 선교훈련과정 중 어떤 사역 프로그램들이 걸림돌이 될 것인지에 관해 매일같이 루머가 나돌고 있다. 방송과 풍선 사역은 끊임없이 북한에 대한 적대행위로 간주되어 왔고, 이 두 사역에는 벌써 적신호가 켜진 상태이다.

그러나 우리는 걱정하는 대신 이 모든 것을 우리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온 선물로 보아야 함을 북한 기독교인들에게 배워왔다. 우리를 향해 시행되는 그 어떤 제약 가운데서도, 항상 새로운 사역들이 생겨나고 이와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감수하는 사랑에 참여할 새로운 기회 또한 항상 따라왔다. 복음 사역을 위한 우리의 비밀실험실은 언제나 가동 중이며, 항상 이렇게 유지된다. 우리가 무엇을 하고 무엇을 계획하는지 아직은 공식적으로 밝힐 수 없다. 확실한 것은, 우리가 항의하고 걱정하는 데에는 시간, 에너지, 재정을 거의 쓰고 있지 않으며, 북한 주민들에게 오늘, 그리고 어디에서나 복음을 갖고 다가가고 있는 북한 교회와 협력하는 데에 가장 많은 시간, 에너지, 재정을 쓰고 있다는 사실이다.

판문점 선언은 이 사실을 더 나아가게도, 뒤로 물러서게도 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 선언에 대해 기뻐하지도, 슬퍼하지도 않는다. 대신, 우리는 정부가 승인할 수 없고, 보류할 수도 없으며, 이루어낼 수도 없는 평화와 자유에 계속 집중하기 위해 북한 기독교인들에게서 배워왔다. 북한 지하교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 평화와 자유를 누리며 100년 이상을 살아왔고, 이 일이 어떻게 가능했는지를 기꺼이 우리에게 가르쳐 줄 것이다. 우리는 다만 그들과 하나님의 목소리를 기다리고, 최근 대중에 영합한 인터넷 매체의 방식을 넘어선 겸손과 인내의 태도를 지니고 이를 배워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