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
▲ⓒUnsplash/RawPixels
용서는 많은 세계 종교의 초석이다. 성서에는 우리에게 죄를 지은 사람들을 용서해 줄 것을 나타내는 여러 가지 구절들이 있다. 개념은 이해하기 쉽다. 피상적인 수준에서 누군가가 당신에게 충돌하여 음료를 흘리면 사과가 보통 충분하다.

그러나 같은 사람이 당신에게 부딪히고 나서도 눈하나 깜짝 않고 계속 걸어간다면 어떻게 될까? 또는 더 나쁘게도 무언가를 무례하게 말한다면 어떨까? 그 사람이 잘못을 뉘우치치 않는다면 당신은 더 강한 반응을 보일 것이다. 그때조차도, 우리 대부분은 아마 그 사건을 우리 마음 속에 담고 있을 것이다. 

우리의 이성적인 마음은 이것을 처리 할 수 있으며 일반적으로 범법자를 용서할 수 있다. 그러나 부상이 훨씬 심각 할 때 어떤 일이 발생하는가? 우리는 종종 음주 운전자가 끔찍한 자동차 사고로 자동차 운전자와 보행자를 살해하거나 심각하게 부상당하는 것에 관한 뉴스 기사를 읽는다. 언젠가는 그런 뉴스 기사를 읽었을 것이다. 그런 끔찍한 범죄를 한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지 궁금해 할 것이다. 특히 치명적인 부상 또는 심지어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초래 한 경우에 더욱 그렇다.

-용서란 무엇인가?

많은 사람들이 용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누가복음 17장 3절에서 예수님은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용서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우리는 학대적인 상황을 용인하거나 다른 사람의 무모하거나 과실한 행동에 대한 공의 추구를 피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지 않다. 

성경은 우리에게 해를 입힌 사람을 그냥 면제하고 일어난 일에 대한 우리의 기억을 억누르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용서 지점에 도달하기

용서에는 시간이 걸릴 수 있다. 진부한 표현처럼 들릴지도 모르지만 그 선상에 진실이 있다. 그것은 사건 자체의 여파에 달려있을 수 있다. 때로는 가해자가 잘못을 뉘우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느끼는 고통, 분노 및 분개를 연장시킬 수 있다. 분명히 정말로 미안해하고 사과하는 한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 훨씬 쉽다. 

분노와 좌절을 안고 있으면 치유 과정이 느려지고 결국 우리의 전체 존재를 먹어 치울 것이다. 이것은 심지어 고혈압과 같은 건강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이러한 유형의 행동이 우리의 관계에 미칠 수 있는 독성 효과는 말할 것도 없다.

아무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잊지 않으려고 한다. 선택적 기억 상실은 필요 없다. 대신, 그 사건이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에 긍정적인 것을 허용하는 것이다.

스스로를 비난하는 것은 또한 비생산적이다. "집에 머물러서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공부했다면, 그 술 취한 운전자가 나를 들이받을 수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당신의 마음에 떠오를 수 있다. 그 생각은 아무 것도 성취하지 못하고 실제로 치유 과정을 늦추게 된다. "what if"(만약) 대신에 현재에 초점이 있어야 한다.

-용서와 정의는 상호 배타적이지 않다.

당신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용서하고 정의를 추구 할 수 있다. 당신이나 사랑하는 사람을 육체적, 정신적으로 커다란 피해를 입힌 사람에 대한 요구를 하는 것은 복수가 아니다. 우리는 이용 가능한 법률 채널을 통해 그 사람에게 책임을 지운다.

용서하는 것은 순교자가 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교통 사고로 중상을 입었다고 할 때 의료 처치가 있을 것이다. 많은 경우 손실된 임금이 있다. 법을 준수하는 시민으로서 공정하고 정당한 보상을 받을 권리가 있으므로 이 어려운 시기를 통해 가족과 본인을 돌볼 수 있다. 개인 상해 법률 사무소는 이러한 장애물을 극복하도록 도울 수 있다.

치명적인 삶의 사건은 때로는 더 큰 그림을 보도록 우리를 이끈다. 아마도 앞서 말한 음주 운전자는 과속 또는 음주 운전 체포의 역사를 가지고 있을 이다. 이 사람은 사회의 위험이므로 운전할 권리를 빼앗아야 한다. 이제 이 사고는 우리가 편안하게 생각하든 그렇지 않든간에 우리보다 더 중요하게 된다. 정의는 더 큰 이익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 결국, 이타주의적이거나 마지 못해서가 아니라 치유하고 용서에 도달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