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론은 젊은 창조 연대에 우호적인가?

입력 : 2018.06.21 10:29

창조연대 논쟁, 왜 문제인가(3)

창조 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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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론은 무엇인가

신정론(神正論)은 "신(theos)"과 "정의(dikee)"를 의미하는 두 헬라어 낱말의 합성으로 이루어진 말로서, 이 세계에 있는 수많은 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정당화하려는 시도를 뜻한다. 성경 속에서도 인간은 이 문제에 대해 하박국 선지자나 시편 등을 통해 끊임없이 창조주 하나님께 질문하고 있다. 하지만 신정론이란 용어를 가장 먼저 직접 사용한 것은 루터란이요 철학자요 자연과학자였던 라이프니츠로 알려져 있다. 라이프니츠는 1670년 <하나님의 전지전능과 인간의 자유>(Von der Allmacht und Allwissenheit Gottes und der Freiheit des Menschen)라는 논문을 통해 본격적인 신정론을 다룬 이후 1710년 <신정론: 하나님의 정의, 인간의 자유와 악의 근원에 대하여>(Essais de Theodic&eacute;e)를 통해 공식적으로 이 용어를 다루고 있다. 이후 이 용어는 신의 정의(正義) 문제를 다루는 이론을 지칭하게 되었다. 따라서 신정론은 신에게 능력과 선함을 동시에 귀속시키려 하는 모든 형태의 유신론에 존재하기 마련이다.

세계적 천재들이 씨름한 신정론

신정론의 문제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딜레마로 표현될 수 있다. '하나님은 악을 막을 수 있는데도 막지 않거나, 아니면 막으려 하지만 막을 수 없거나 이다.' 여기서 만일 후자가 옳다면 하나님은 전능하지 않고, 전자가 옳다면 그는 자비하지 않다는 논리가 된다. 여기에 신정론의 일반적 딜레마가 있다. 악의 문제를 설명하려는 시도는 사실 철학의 플라톤 때부터 있어 왔다. 그러나 가장 역설적 형태의 신정론은 기독교에서 비롯될 수밖에 없다. 이는 기독교가 창조의 선성을 이야기 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이 십자가라는 역사적 사건을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신다고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이 악의 문제에 대해 신학적으로 접근한 이후 루터와 칼빈 그리고 라이프니츠를 거쳐 이후 임마누엘 칸트, 헤겔, 화이트 헤드, 칼 바르트, 포사이스(P. T. Forsyth, 1848-1921), 몰트만 등에 이르기까지 신정론의 결론은 쉽게 나지 않았다. 철학과 신학의 거물들이 이 문제에 뛰어들었지만 결론이 쉽지 않다는 것은 이 문제가 초월의 문제와 닿아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혁신학자 벌콥도 하나님과 죄와의 관계에 대한 문제는 비밀로 남아있다고 언급한다.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서는 아나 하나님을 힘써 아는 일(knowing God)이란 그리 단순하지 않다.

창조의 젊은 연대가 신정론 해석에 우호적인가?

창조과학 운동이 신학과 괴리를 만들면 안 된다는 필자의 거듭된 충고로 최근 한국의 창조과학 운동이 신학자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된 것은 바람직한 현상이다. 지난 2011년 여름 한국창조과학회가 주최한 모임에서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의 김병훈(조직신학) 교수는 창조의 오랜 연대를 수용한 지적설계운동의 상징적 인물인 윌리엄 뎀스키의 견해를 비판하면서 오랜 연대를 수용하면 악의 존재에 대한 설명이 불가하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지적설계 운동을 비판하기보다 창조과학 운동에 힘을 실어주기 위한 덕담이었다고 생각된다. 정통 신정론자(神正論者)들은 한 번도 연대 문제와 연관하여 이 쟁점을 거론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적 존재(마귀, 귀신 등)의 기원이 결코 젊은 창조 연대에 유리하지 않은 것처럼 오히려 악의 문제도 결코 젊은 창조 연대에 우호적이라고 볼 수 없다. 악을 창조 주간(6천 년 전)의 창조에 묶어 놓는다고 악의 문제가 해결 되지 않는다. 물론 지적설계운동의 중심인물 가운데 한 사람인 뎀스키처럼 악의 문제를 창조 6천 년 바깥으로 연장해 놓는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악의 기원에 대한 논쟁은 수백 년 동안 성경, 신학, 철학 분야에서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이것은 초월 속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해결하기 쉽지 않은 신비의 영역일 뿐이다.

기독교적으로 악의 문제를 다룰 때는 세 가지 전제가 있다. (1) 악은 존재한다는 것 (2) 하나님은 선하시다는 것 (3) 하나님은 전능하시다는 점이다. 기독교신학은 이 세 가지를 만족해야 한다. 그냥 "십자가"가 답이라는 식으로 접근하면 간단하나 사실 이 세 가지를 모두 만족하는 성경적 답을 찾아 논증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바로 십자가로 귀결되도록 원인을 제공한 마귀의 기원, 악의 기원 자체가 미스터리이기 때문이다. 마귀와 악의 기원 자체를 잘 모르는데 어찌 답을 제공할 수 있겠는가. 당연히 여기서 연대 문제는 파고들 자리가 없다.

설계(設計)는 근본적으로 설계의 도덕성, 미학, 선악, 최적 또는 완벽함과는 다른 문제이다. 또한 지적설계가 도구로 삼는 "환원불가능한 복잡성"도 도덕이나 선악과는 별개 개념이다. 설계의 왜곡(반목적론)은 설계를 거부함으로써가 아니라 설계를 받아들인 다음에 악의 문제를 직면함으로써 설명되는 것이다. 즉 악의 문제는 신학적이다. 젊은 창조 연대 입장을 거부하는 뎀스키의 견해는 이 같은 신학적 각성에서 나왔다고 본다. 즉 신학은 결코 젊은 창조 연대 쪽에 신정론적 승리가 있다고 편들지 않는다. 신정론 문제에 접근한 어떤 학자도 젊은 창조 연대를 편들지 않는다.

손쉬운 해답이 없는 신정론 문제

바른 신앙은 그리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그것을 해석하는 것이 기독 신학의 사명이다. 그런데 악의 문제는 세계적 천재들이 평생을 씨름해도 일치된 해답을 찾기 어려울만큼 결코 손쉬운 대답은 없었다. 따라서 마귀의 타락과 악의 기원이 신비로 덮여있는 데도 불구하고, 젊은 창조 연대가 신정론에 우호적이라고 함부로 논증하는 것은 "창조과학" 운동이 신학적으로도 옳다는 잘못된 시그널을 줄 수 있으므로 대단히 조심해야 한다. 어거스틴이 고백한 대로 하나님의 질서를 이해할 수 없는 시간 속에서 우리 인간은 각각 흩어져 있을 뿐이다. 창조 연대와 신정론 논쟁에 손쉬운 답은 없는 것이다.

조덕영 박사.
▲조덕영 박사.
악의 젊은 창조 연대 주장은 영지주의 창조론에 설득 당할 수 있는 위험한 주장

필자는 젊은 창조 연대를 수용하면 악과 인간 타락의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게 될 신성모독의 위험성에 노출될 가능성이 더 커진다고 본다. 만일 창조 주간에 천사나 사단의 기원을 배치하고 이것이 6천여 년 전에 일어난 일이라고 논증하면 사단에 의한 아담과 하와 유혹과 인간 타락의 책임도 결국 인간이 아닌 세상이 창조되자마자 타락을 쉽게 방치한 하나님에게 돌리게 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성경 밖 영적 영역에 대해 무리한 논증을 하기 시작하면 신앙은 환타지화(化) 되어 버리고 하나님의 전지전능 교리도 위태로워진다. 하나님의 전지전능 교리가 무너지면 기독교는 미숙한 이 세상 모든 혼란은 미숙한 창조주인 여호와 하나님 때문이므로 더 높은 창조주를 알아야 한다고 주장하는(즉 '하나님의 하나님'을 설명하려는) 영지주의 창조론에 그 주도권을 내주게 된다. 젊은 연대와 악의 문제를 동시에 논증하는 데는 '창조과학'보다 타락한 마귀와 악을 지은 여호와 하나님을 미숙한 창조주로 간주하고 '세상 창조주보다 더 큰 세상 창조주의 창조주'를 논하는 영지주의 창조론이 보다 더 유리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젊은 창조 연대를 함부로 고집하면 안 되는 중요한 신학적 이유이다. 6천 년 전 세상 창조(창세기 1장)에 6천 년 전 영적 존재 창조를 삽입하게 되는 순간 악과 타락의 책임을 창조주 하나님께 돌리게 되어 전지전능 교리가 흔들리게 되고 영지주의 창조론에 승리를 넘겨주는 누(累)를 범할 수 있다. 따라서 마귀 타락과 악의 기원은 성경이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는 이상 그대로 신비의 영역으로 남겨두어야 한다.

내재의 도구 과학은 초월의 창조 신비를 섣불리 규정하려 들지 말아야

신비를 신비로 남겨두지 않고 신비 영역을 인간이 섣불리 규정하려는 순간 인간은 스스로 자신이 성경해석의 창조주 노릇을 하게 되는 누를 범할 수 있다. 창조의 연대 문제는 함부로 규정할 사안이 아니다. 온전한 해석이 오기까지 신비의 영역으로 남겨두어야 한다. 성경이 규정하지 않은 것을 인간이 섣불리 규정하여 젊은 창조 연대를 집착할 경우 신정론 논쟁에 있어 영지주의에게 주도권을 넘겨버리며 성경의 창조주 하나님을 왜곡되게 이해할 수밖에 없는 바른 성경 해석의 걸림돌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아짐을 명심해야 한다. 기독교는 초월의 종교이며 그 계시의 책인 성경의 하나님은 창조주다. 내재의 인간이 함부로 초월의 신비를 규명하려 들면 안 된다. 성경의 신비는 신비로 남겨두어야 한다. 신비(초월의 창조)를 과학(내재의 도구)을 동원하여 규정하는 순간 영지주의처럼 오히려 또 다른 신앙적 신비주의로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계속)

조덕영 박사(창조신학연구소 소장, 조직신학, 평택대 신학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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