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자연인은 구원을 갈망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운명은 인간에 의해 결정되지 않습니다. 인간의 구원도 인간의 갈망이나 결단에서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천국 가는 것도, 지옥 갈 사람이 어쩌다 예수를 믿어 그렇게 되 것이 아닙니다. 오직 창세 전에 구원 작정을 받아 천국 가도록 예정된 사람이 구원에의 부르심 곧, 복음(살후 2:14)을 듣고 믿음으로서입니다(행 13:45).

반면 믿지 않는 불택자들 역시 단지 예수에 매력을 못 느껴서가 아닌, 창세부터 유기 작정됐기에 돼지에게 진주처럼(마 7:6), 복음에 매력을 못 느껴서입니다.

인간의 죄인 됨이 원죄의 유전에 의한 것이듯, 그의 의인됨도 오직 하나님의 구원 택정에 의거합니다. 죄로 죽은 영혼이 하나님의 구원 택정을 받아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입어 됩니다. 루터의 말대로, 죄로 죽은 인간에겐 오직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멸망에로 치닫는 노예 의지(De Servo Arbitrio, On Un-free Wil)뿐입니다. 따라서 죄인이 하나님께로 나오는 것은 정확하게 말하면 "그리스도의 피의 감동에 이끌림"입니다.

'양과 목자(요 10:3-4)', '노크와 영접(계 3:21)'의 비유를 비롯해, 여러 찬송시들이 다 구원을 하나님의 부르심과 거기에 대한 응답으로 말합니다. "너 설레는 맘 가다듬고 희망중 기다리면서 그 은혜로신 주의 뜻과 사랑에 만족하여라 우리를 불러주신 주 마음의 소원 아신다(찬 341, 너 하나님께 이끌리어)", "이전에 주님을 내가 몰라 영광의 주님을 비방했다 지극한 그 은혜 내게 넘쳐 날 불러 주시니 고마워라(378, 이전에 주님을 내가 몰라)."

또 거듭나지 않는 자연인(Natural man)은 스스로 그리스도께 나올 수 없다는 '중생의 도리'를 통해 인간의 구원이 인간 한계 밖의 일임을 보여줍니다. 자연인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사자가 풀을 먹고(사 11:7) 돼지가 진주를 좋아하는 것처럼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것이 가능해지려면 먼저 성향의 변화 '중생'이 일어나야 합니다.

이 중생을 성경은 "마음에 새 영이 부어져 굳은 마음이 제해지고 부드러운 마음이 주어진 것(겔 36:26)"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중생의 정지작업이 있은 후에라야만 죄인은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불택자가 스스로 하나님께 나올 수 없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그들이 천국의 비밀을 허락받지 못하고 그들의 마음이 사단에게 장악됐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고후 4:3-4)."

성경은 여기서 진일보하여, 하나님이 불택자들에게는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고침을 받지 못하도록 적극적으로 훼방한다고까지 말씀합니다(마 13: 11, 15, 사 6:9-10)."

사랑의 하나님이 어찌 인간의 구원을 막으실 수 있는가 하는 의구심이 드는 대목이지만, 하나님은 택자는 사랑하시고 불택자는 원수시 한다는 성경의 가르침에 비추어볼 때(롬 9:13),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집니다. "택자는 구원 택정을, 불택자는 유기(遺棄) 택정을 했다"는 이 하나님의 경륜을 칼빈은 "이중 예정(double predestination)"이라 명명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 경륜은, 죄인 스스로는 하나님께 나올 수 있는 가능성이 전무함을 보여줍니다.

◈믿음이 구원의 시원(始原)이 아닙니다

성경이 규정하는 이상으로 믿음을 왜곡되게 강조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스스로를 종교개혁자의 후예라고 자처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들의 생각 저변에는, 믿음만 무한히 높이면 올바른 신앙이라는 생각이 깔려있는 듯 하며, "오직 믿음"을 입에 달고 삽니다. 그러나 루터의 "오직 믿음"은 당시 로마가톨릭의 "공로주의"신앙에 대한 반대 개념이었지, 믿음에 무한 개념을 부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종교개혁 당시도, 일부 사람들의 지나친 믿음 강조로 믿음을 또 하나의 구원 조건(공로)으로 등극시켰고, 루터가 주창한 값없이 주어지는 은혜로서의 "오직 믿음"을 퇴색시켰습니다. 이를 감지한 루터는 믿음이 "은혜"에 다름 아님을 강조하려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음으로"라고 말하며, 믿음에 무한 개념을 부여하려는 시도들을 막았습니다.  

믿음을 왜곡시키는 또 한 부류가 믿음을 모든 것의 원천으로 삼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믿음을 하나님으로부터의 모든 축복들을 여는 만능키(Secret Key) 혹은 모든 자원들을 끌어오는 유인력(誘引力, causing power) 쯤으로 여기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곧잘 "믿음은 천국이 보물 창고를 여는 열쇠"라는 경구들을 들먹입니다. 일견 믿음을 높이는 신앙처럼 보이나, 믿음을 하나님의 작정, 주권, 경륜보다 앞세우는, 곧 "수레를 말 앞에 두는(put the cart before the horse)" 오류를 범합니다.

믿음은 모든 것을 끌어오고 존치시키는 시원(始原)이나 만능키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 경륜을 실어나는 통로입니다.

또 하나, 기독교 신앙과 신념을 결탁한 신념주의 신앙이 있습니다. 이들은 언제나 믿음을 능력과 결부시키는 경향이 있으며, 그들이 즐겨 들고 나오는 성경구절이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다(막 9:23)"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표면적으로는 '믿음'을 들고 나오지만 실상 그들을 움직이는 동력은 '신념'인 경우가 많으며, 둘이 너무 깊이 연루되어 있어 둘을 분리시키기 어렵습니다. 특별히 그들의 신념 신앙이 때론 상당한 결과물들을 내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또 하나가 "믿음과 구원의 변증법"에 관한 것으로, 흔히 "만인구원론(universalism)"과 "제한 속죄론(예정론, Limited Atonement)"과 결부되며, 주로 예시되는 구절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입니다.

전자는 "하나님은 독생자를 모든 인류를 위해 내어주셨고, 구원은 오직 인간의 믿음에 의해 결정되도록 했다"고 믿습니다. 반면 후자는 "하나님이 창세 전에 구원 택정한 자들을 위해 독생자를 보내주셨으며, 택자는 선물로 받은 믿음(엡 2:8)을 통해 구원을 얻도록 했다"고 믿습니다.

종합하면, 죄인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을 입기 시작한 것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사랑이 택자들에게 그리스도를 보내셨고, 또 그를 믿음으로 구원 얻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성경적 구원관은 인간이 아래에서 위로 치받아 구원을 끌어내는 것이 아니고,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이 하나님의 영원하신 작정으로부터 내려와서 복음 신앙을 통해 죄인에게 부어지는 은혜입니다.

◈그리스도는 구원의 시원(始原)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의롭게 만들어(롬 3:24) 하나님과 화목시켜 주시고(고후 5:18),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해 주었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길도(요 14:6), 성령으로 거듭남도, 하나님을 알게 하는 것도(요일 5:20) 그리스도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중요한 그리스도이시지만, 그는 하나님과 택자의 관계에 있어 모든 것을 있게 한 시원(始原)이길 자처하지 않았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적대감만 있고 사랑도 관심도 없었는데, 그리스도가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시키므로(롬 5:11, 고후 5:18) 비로소 하나님이 그의 얼굴을 우리에게로 돌이켜 우리에게 관심을 갖도록 만든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오히려 거꾸로 입니다. 하나님은 영원 전 부터 택자들을 아셨고 사랑하셨습니다(엡 1:4, 살후 2:13). 조상 아담의 범죄로 하나님과 그들은 원수처럼 되었지만,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중단되지 않았으며 그 영원하고 불변한 사랑이 마침내 아들 그리스도를 화목제물로 보내 그들과의 관계 회복을 이루셨습니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대속물(마 20:28) 화목자가 되어(롬 5:1)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율법의 수종자가 되셨습니다(갈 1:4, 요6:38-39). 하나님과 동등, 일체이신 그리스도시지만은 시원자(始原者)의 지위를 성부 하나님께 돌리시고 자신을 기꺼히 택자가 아버지께로 가는 통로이길 자처하신 것입니다. 택자가 구원자 그리스도께로 나아오는 것 역시, 하나님의 이끄심으로 인하여 되므로서, 둘의 관계의 시원자(始原者)가 하나님이셨습니다.

"선지자의 글에 저희가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요 6:45)",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요 6:37)",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요 6:44)".

이러한 말씀들은 구원의 중심에 계신 성자 그리스도를 높이고 의지하는 것을 소홀히 해도 좋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은 성부 하나님을 시원(始原)으로 하여 공히 삼위일체적으로 하나님이 높혀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다만 오늘 성령을 강조하고 높이면 이상적인 능력의 신앙인이라고 생각하여 기형적으로 성령을 강조하는 "오순절주의자들(Pentecostalists)", 그리스도만 강조하고 높이면 정통 신앙인으로 생각하여 기형적으로 예수만을 높이는 "예수주의자들(pure Jesuists)"을 경계하고자 함입니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쉽게 풀어 쓴 이신칭의(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