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혁 목사
▲김명혁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제가 2008년 1월 13일 강변교회에서 은퇴한 다음 지난 10년 6개월 동안 주일마다 전국에 있는 작은 교회들을 주로 방문하며 설교를 하고 있는데 오늘 2018년 7월 15일 주일 여기 통영 도산제일교회 다시 와서 여러분들과 함께 예배 드리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되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김용진 목사님과 성도 여러분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제가 2008년 10월 26일 주일 여기 처음으로 와서 "고넬료 집에 임한 부흥" 이란 제목으로 설교를 했고, 2011년 10월 30일 주일 여기 두 번째로 와서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고, 2014년 10월 26일 주일 여기 세 번째로 와서 "전도의 비결"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는데, 오늘 2018년 7월 15일 주일 여기 통영 도산제일교회에 네 번째로 와서 "신앙 오도의 삶"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김용진 목사님이 "변화되는 믿음의 삶"에 대한 설교를 해 달라고 부탁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의 삶"이 너무 귀중하지만 형식적인 믿음의 삶이 아닌 지정의언행이 "변화되는 믿음의 삶"이 너무너무 귀중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들의 믿음으로 구원함을 받은 신자들에게 제일 먼저 권면한 말씀이 "영적 예배"를 드리면서 "변화되는 믿음의 삶"을 살라는 권면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1,2).

우리들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는 즉 "영적 예배"를 드리되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고 권면했습니다. 믿음의 생활을 올바로 하려면 몸을 하나님께 드리는 "영적 예배"와 함께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는"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우리 죄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귀중한 것은 "믿음"을 지니고 "신앙생활"을 올바로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제일 먼저 전파하신 말씀이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 성경은 "믿음"이 없이는 죄 사함도 없고 구원도 없고 의롭다 함도 없고 영생도 없고 천국도 없다고 가르칩니다.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막 2:5).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막 10:5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 예수님께서 근심 걱정에 쌓여있던 제자들에게 간곡하게 부탁하신 말씀도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으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1).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이 죄인들이 예수님을 믿고 생명을 얻는데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1).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도 없다고 히브리서는 지적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히11:6).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가장 기본적으로 필요하고 귀중한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을 지니고 "신앙생활"을 바로 하는 것입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부모님과 주일학교 선생님들 때문에 아니 하나님의 망극하신 은혜로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4학년과 5학년 때 평양에서 살았고 평양 제5인민학교에 다녔는데 공산당 정부가 일요일 날 교회에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학교에 오도록 명령을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2년 동안 일요일 날 학교에 가지 않고 교회에 갔습니다. 하나님을 바로 믿고 하나님께 바로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종일 교회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월요일마다 학교에서 벌을 받았고 때로는 정학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하나님을 바로 믿고 하나님께 바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제일 좋았습니다.

결국 저는 11살 때 부모님과 동생들과 고향을 떠나 38선을 혼자서 뛰어넘어 남쪽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주일을 바로 지키며 하나님을 바로 믿기 위해서 부모님과 고향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캄캄한 밤 중에 38선을 넘다가 인민군에서 붙잡혔습니다. 모두 손을 들고 서지 않으면 총을 쏘겠다고 위협을 했습니다. 어른들은 모두 손을 들고 섰습니다.

그러나 저는 설 수 없었습니다. 분명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면서 하나님을 바로 믿고 하나님께 바로 예배를 드리기 위한 분명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혼자서 남쪽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40여분 동안 언덕을 넘고 파밭을 달리고 목에까지 차는 강을 건너 무사히 남쪽으로 왔습니다.

그 때 저에게는 무서움이나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바로 믿고 바로 섬기기 위한 분명한 목적을 지니고 힘을 다해서 뛰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약간의 스릴까지 느꼈습니다.

그런데 38선을 넘은 그 사건은 저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11살 때 하나님을 믿은 저의 "믿음"은 저의 삶과 운명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믿음" 보다 더 귀중한 것은 세상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죄인 중의 괴수인 저를 너무 많이 축복하신 것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망극하신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은혜 때문이지만 둘째는 아버지를 비롯한 순교자들이 흘린 순교의 피 때문이고 셋째는 제가 "믿음"을 지키기 위해 어릴 때 아브라함처럼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남쪽을 향해서 달려온 일 때문이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버지는 제가 월남 한지 2년 후에 평양에서 순교하셨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믿음"을 지니고 "신앙생활"을 바로 하는 것이 어떤 삶인지에 대해서 다섯 가지로 나누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믿음의 삶"이 너무 귀중하지만 "삶의 변화"가 없는 형식적인 믿음의 삶은 아무 소용이 없는 헛된 삶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말세에는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니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게 된다고 사도 바울이 경고했는데(딤후 3:1-5) 오늘의 한국교회와 세계교회가 그와 같은 세속화와 인간화로 치닫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 18:8) 라는 비슷한 경고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믿음"을 지니고 "신앙생활"을 올바로 하는 것이 어떤 삶인지에 대해서 다섯 가지로 나누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즉 "신앙 오도의 삶"이 어떤 삶인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첫째로, "신앙 오도의 삶" 이란 "회개" 하면서 살아가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제일 처음에 전파하신 말씀이 바로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라는 말씀이었습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 4:17).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부탁하신 말씀도 "회개"의 메시지를 세상에 전파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눅 24:47, 48).

예수님께서는 부활 승천하신 다음에도 아시아에 있는 다섯 교회들에게 편지를 써서 보내시면서 "회개하라", "회개하라"는 말씀을 다섯 번이나 반복하셨습니다. 사도 베드로가 오순절 날 제일 먼저 전파한 말씀도 "회개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행 2:38).

예루살렘 교회는 "회개"하므로 시작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소아시아 선교지에서 전파하고 증거한 것도 "회개"와 믿음에 관한 말씀이었습니다. "내가 항상 너희 가운데서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 바니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이라"(행 20:18, 21).

"회개"는 "신앙생활"의 입문이고 과정이고 출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회개"는 자기가 죄인임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고백하면서 무릎을 꿇고 항복하는 것인데 "회개" 없이는 죄 사함도 구원도 의롭다 함도 영생도 천국도 없다고 말씀했습니다.

"회개"는 한 번 크게 삶의 방향을 돌이키는 데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울면서 돌이키고 또 돌이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을 "참회" 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회개"와 "참회"를 계속해서 가장 많이 가장 처절하게 한 사람이 다윗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다윗은 밤 낮 울면서 "회개"와 "참회"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시 6:6).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은혜와 사랑을 입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다윗의 뒤를 이어 처절한 "회개"와 "참회"의 제사를 평생토록 계속해서 드렸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롬 7:24).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귀중한 종으로 사용하셨고 순교의 제물로 받으셨습니다.

사도 바울의 처절한 "참회"의 고백 때문에 성 어거스틴과 길선주 목사님과 이기풍 목사님과 이성봉 목사님과 김치선 목사님과 한경직 목사님과 박윤선 목사님도 그 뒤를 이어서 "회개"와 "참회"의 길을 걸으면서 하나님의 귀중한 종들로 쓰임을 받았습니다.

올바른 "신앙생활" 이란 "회개"하고 "참회"하면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회개"와 "참회"가 없는 믿음은 형식적인 믿음이고 위선적인 믿음이고 거짓된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제사는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회개"와 "참회"의 제사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주장과 고집이 센 사람은 "회개"와 "참회"를 하지 못합니다. 의인 의식을 지닌 사람은 "회개"와 "참회"를 하지 못합니다. 근심 걱정 원망 불평이 많은 사람도 "회개"와 "참회"를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셔서 날마다 "회개"와 "참회"의 제사를 드리는 "신앙생활"을 올바로 하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신앙 오도의 삶" 이란 정성껏 "예배" 드리면서 살아가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배"의 중요성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니라"(요 4:23).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으로 구원 받은 죄인들이 제일 먼저 우선적으로 하여야 할 일이 몸을 하나님께 제사로 드리는 "영적 예배" 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아벨이 양의 첫 새끼를 잡아서 제사를 드렸을 때,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고 했을 때, 다윗이 상하고 통회하는 눈물의 제사를 드렸을 때, 하나님께서 너무너무 기뻐 받으시며 저들을 크게 축복하셨습니다. 베다니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지극히 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씻었을 때, 예수님께서 너무너무 기뻐하시면서 저들을 축복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죄인들을 창조하시고 구원하시는 목적은 우리 죄인들로 하여금 우리들의 몸과 마음과 눈물과 시간과 정성과 물질을 다 쏟아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와 예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는 "제사"와 "예배"의 종교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약시대에는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며 성막과 성전에서 "제사" 드리게 하셨고, 신약시대와 교회 시대에는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며 교회에서 "예배"드리도록 하셨습니다. "신앙생활"이란 "예배"드리면서 살아가는 삶을 의미합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며 교회에서 종일 "예배" 드리는 것이 기독교의 중심입니다.

사도 바울이 안식 후 첫날인 주일날 아침부터 밤까지 드린 예배의 모습이 사도행전 20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행 20:7-11). 청교도들이 가장 귀중하게 여기면서 강조한 것은 주일성수와 예배였습니다. 한국교회도 그 초기부터 주일성수와 예배를 강조해 왔습니다. 주일에는 온종일 모든 세속적 업무를 중단하고 예배와 전도와 봉사에 바쳐야 할 것을 엄격히 가르쳤습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헌법 제6부 예배모범은 주일성수의 원리를 엄격히 규정했습니다. "이 날은 주일인 즉 종일토록 거룩히 지킬지니 공동 회집으로나 개체로 예배하는 일에 씀이 옳으며 모든 사무와 육신적 쾌락의 일을 폐할지니 세상 염려와 속된 말도 금함이 옳다. 먹을 것까지라도 미리 준비하고 이 날에는 가족이나 집안 사환으로 공동 예배하는 일과 주일을 거룩히 함에 구애가 되지 않도록 함이 옳다."  

올바른 "신앙생활" 이란 "예배"의 제사를 정성껏 드리면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의 제사를 바로 드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주일을 종일 거룩하게 지켜야 합니다. 우리들이 주일을 종일 거룩하게 지키며 정성을 다해서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며 우리들을 축복하십니다. 우리들의 삶이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으로 채워지게 됩니다. 그리고 앞으로 하늘에서 이루어질 영원한 안식의 축복을 누리게 하실 것입니다.

히브리서 4장은 앞으로 하늘에서 이루어질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도록 힘쓰라고 권면했습니다. 올바른 "신앙생활"이란 주일을 종일 거룩하게 지키며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일에 모든 정성을 쏟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교회는 점점 주일성수의 영적인 유산을 모두 저버리고 세속화와 인간화로 치닫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일 저녁 예배를 드리지 않는 교회가 너무 많은데 이것은 가장 큰 죄라고 생각합니다. 너무 불행한 일이고 너무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는 부족하고 또 부족하지만 어릴 때부터 하나님의 은혜로 주일 날 종일 교회에 가서 예배 드리는 것을 너무너무 좋아했습니다. 사실 저는 어릴 때부터 한 평생 주일에는 종일 집에 가지 않고 교회에서 예배 드리면서 살았습니다. 올바른 "신앙생활"이란 주일을 종일 거룩하게 지키며 교회에서 "예배" 드리는 일에 모든 정성을 쏟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셋째로, "신앙 오도의 삶" 이란 십자가에 나타난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을 지니고 "섬김"과 "봉사"의 손길을 펴면서 살아가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을 강조하셨습니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마 9:13).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할찌니라"(마 18:22).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마 12:7).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예수님께서는 도움이 필요한 불쌍한 사람들에게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는 "섬김"과 "봉사"의 삶이 바로 주님 자신을 섬기고 봉사하는 삶이라고 강조하면서 천국은 바로 그런 사람들의 것이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 25:34-36).

사도 바울도 믿음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이 없고 "섬김"과 "봉사"가 없는 믿음은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씀했습니다(고전 13:2). 그리고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을 베풀며 "섬김"과 "봉사"의 삶을 살라고 권면했습니다. "너희는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골 3:12-14).

요사이 한국교회가 "회개"와 "예배"와 "섬김"과 "봉사"를 소홀히 하고 각종 프로그램과 행사에 치중하고 있는데 너무너무 불행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옥한흠 목사님이 왜 교회가 학원처럼 프로그램과 행사에 치중하냐고 책망한 일이 있었습니다.

방지일 목사님도 시끄러운 음악과 다양한 프로그램에 치중하는 잘못을 지적하셨습니다. 다른 것들은 다 집어치우고 "회개"와 "예배"와 "섬김"과 "봉사"에 전력을 다한다면 교회의 아름다운 모습을 되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성 프랜시스와 손양원 목사님과 한경직 목사님의 믿음은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으로 그리고 "섬김"과 "봉사"로 나타났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감히 이런 분들과 비교할 수 없는 이기적이고 정욕적이고 탐욕적이고 배타적이고 비판적이고 위선적이고 독선적인 죄인이지만 주님께서 지니셨던 그리고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지니셨던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섬김"과 "봉사"의 조그만 아주 조그만 부스러기라도 지니고 참 믿음의 삶을 살아가기를 간절히 소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프리카로, 방글라데시로, 북한으로, 중국 연변지역으로, 아프가니스탄으로, 달려가서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섬김"과 "봉사"의 손길을 조금씩 아주 조금씩 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누군가에게 사랑과 섬김의 손길을 펴면서 제물 되는 삶을 살다가 제물 되는 죽음을 죽게 하시옵소서." 라고 기도하곤 합니다.   

넷째로, "신앙 오도의 삶" 이란 근심 걱정 불평 불만 염려 두려움을 모두 하나님께 맡겨버리고 "평안"과 "기쁨"과 "감사"를 그리고 "모험심"과 "담력"을 지니고 담대하게 살아가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1).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요 14:27).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요 15:11).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18).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벧전 5:7).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사 41:10).

올바른 "신앙생활"이란 근심 걱정 불평 불만 염려 두려움을 다 하나님께 맡겨버리고 "평안"과 "기쁨"과 "감사"를 지니고 그리고 "모험심"과 "담력"을 지니고 담대하게 달려가면서 살아가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니엘은 사자 굴 속에 들어갈 것을 잘 알면서도 근심 걱정 불평 불만 염려 두려움을 다 하나님께 맡겨버리고 "평안"과 "기쁨"을 지니고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감사"했습니다(단 6:10). 그리고 "담력"을 지니고 사자 굴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 관원들에게 붙잡혀 많이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혔지만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평안"과 "기쁨"과 "감사"를 지니고 옥 중에서 기도하며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행 16:25).

사도 바울은 나중에 로마 옥에 갇힌 죄수의 몸이 되었지만 근심 걱정 원망 불평 염려 두려움을 지니는 대신 "평안"과 "기쁨"과 "감사"를 지니고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1-13).

예수님께서는 믿음을 지닐 때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 9:23). 믿음이 한 겨자씨 만큼만 있어도 못할 것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7:20, 눅 17:6).

올바른 "신앙생활" 이란 근심 걱정 불평 불만 염려 두려움을 모두 다 하나님께 맡겨버리고 "평안"과 "기쁨"과 "감사"를 몸에 지니고 그리고 "모험심"과 "담력"을 지니고 담대하게 달려가면서 살아가는 삶을 의미합니다.

저는 부족하고 부족하지만 어릴 때부터 믿음으로 살면서 근심 걱정 원망 불평 염려 두려움을 모두 다 하나님께 맡겨버리고 "평안"과 "여유로움"과 "기쁨"과 "감사"를 몸에 지니고 그리고 "모험심"과 "담력"을 지니고 한 평생을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사실 저는 한 평생 "모험적인" 일들을 즐기면서 살아오고 있습니다. 제가 11살 때인 1948년 8월 38선을 혼자서 넘은 일을 생각하면 그것은 대단한 "모험"과 "담력" 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서울에 와서 서울 중 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를 졸업한 후 1년 동안 총신에서 공부한 다음 1962년 8월 단 돈 100불을 가지고 배를 타고 미국으로 유학을 간 일도 대단한 "모험"과 "담력"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12년 동안 유학을 마치고 귀국해서 목회와 교수의 일을 했는데 주일성수를 방해하는 군사정권의 정책을 비판하다가 1977년 11월 20일 남산 중앙정보부에 붙잡혀 가서 아침부터 밤까지 하루 종일 그리고 다음날 새벽까지 심문을 받으면서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심문하는 사람들을 충고한 일과 잠깐 쉬는 시간에 설교 준비까지 한 일도 대단한 "모험"과 "담력"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1999년 1월 평양을 방문했을 때 소신껏 말하고 소신껏 비판하고 소신껏 행동한 일도 대단한 "모험"과 "담력" 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2005년 12월 굳게 닫힌 타직 국경과 아프간 국경을 캄캄한 밤에 뛰어넘어 아프가니스탄으로 가서 아프간 무라취드에 세운 학교 준공식에 참석한 일도 대단한 "모험"과 "담력" 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올바른 "신앙생활" 이란 근심 걱정 불평 불만 염려 두려움을 모두 다 하나님께 맡겨버리고 "평안"과 "여유로움"과 "기쁨"과 "감사"와 함께 "모험심"과 "담력"을 몸에 지니고 담대하게 달려가면서 살아가는 삶을 말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은혜를 부어주시고 또 부어주셔서 고난과 환난이 많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근심 걱정 불평 불만 염려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말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의지하면서 모든 것을 다 하나님께 맡겨버리고 어떤 일을 당해도 "평안"과 "기쁨"과 "감사"를 몸에 지니고 그리고 "당당함"과 "여유로움"과 "모험심"과 "담력"을 몸에 지니고 "막 뚫고 나아가면서" "즐겁고" "멋지고" "행복하게" 살아가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다섯째로, "신앙 오도의 삶" 이란 하늘을 바라보면서 "천국 소망"을 지니고 가볍게 살아가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팔복을 말씀하시면서 첫째 복과 여덟번째 복은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라는 복이었고 팔 복의 결론은 하늘을 바라보면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마 5:12).

예수님께서는 또한 하늘을 바라보시면서 근심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요 14:1, 2).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면서 하늘을 우러러 보셨다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요 17:1).

사도 바울의 마음과 눈은 항상 하늘을 바라보며 "천국 소망"을 지니고 살았습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 하노니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고후 5:1-3).

사도 요한이야말로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면서 "천국 소망"을 지니고 살았습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계 4:1).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책이 있으니"(계 5:1). "내가 또 보니 힘센 다른 천사가 구름을 입고 하늘에서 내려 오는데"(계 10:1). "하늘에 큰 이적이 보이니"(계 12:1). "내가 또 보니 어린양이 시온 산에 섰고"(계 14:1). "이 일 후에 다른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니"(계 18:1). "이 일 후에 내가 들으니 하늘에 허다한 무리의 큰 음성 같은 것이 있어 가로되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계 19:1). "또 내가 보매 천사가 무저갱 열쇠와 큰 쇠사슬을 그 손에 가지고 하늘로서 내려와서"(계 20: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계 21:1).

기독교 신앙의 중심과 목표는 새 하늘과 천국입니다. 믿음의 조상들은 모두 이 세상의 본향을 바라보지 않고 하늘에 있는 더 나은 본향을 바라보며 사모했다고 기록했습니다(히 11:16). 올바른 "신앙생활" 이란 하늘을 바라보며 "천국 소망"을 지니고 기쁘게 살아가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은 잠시뿐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이 "밤의 한 경점"(시 90:4) 같고 "아침에 돋는 풀"(시 90:5) 같고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게"(약 4:14) 같다고 성경 말씀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원한 하늘 집을 바라보고 준비하면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마라나타" 라는 인사를 주고 받았는데 "마라나타" 라는 말의 뜻은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였습니다. 한국교회의 아버지 길선주 목사님은 요한계시록을 만 독을 하고 암송을 하며 천국을 바라보고 사모하면서 한 평생을 "천국 소망"을 지니고 살았습니다. 한국교회의 무디라고 불리던 이성봉 목사님은 밤에 자다가 옆집 방앗간에서 방아 찢는 소리만 들려도 주님이 오시지 않나 하고 밖으로 나가서 하늘을 쳐다보곤 하셨다는 간증을 저는 중학생 때 여러 번 들었습니다.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님도 감옥에 갇혀 있을 때 힘들고 지칠 때마다 하늘을 바라보면서 손수 지은 "주님 고대가"를 불렀다고 했습니다. "낮에나 밤에나 눈물 머금고, 내 주님 오시기만 고대합니다. 가실 때 다시 오마 하신 예수님,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고적하고 쓸쓸한 빈 들판에서, 희미한 등불만 밝히어 놓고 오실 줄만 고대하고 기다리오니,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먼 하늘 이상한 구름만 떠도, 행여나 내 주님 오시는가 해 주님 계신 그 곳에 가고 싶어요.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천 년을 하루같이 기다린 주님, 내 영혼 당하는 것 볼 수 없어서 이 시간도 기다리고 계신 내 주님, 오 주여 이 시간에 오시 옵소서."

오늘날 한국교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 중의 하나는 천국 신앙을 포기하고 세상의 정치 경제 문화 유행에 정신이 빠져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부족한 저에게 우리 믿음의 선배님들이 지녔던 "믿음"과 "사랑"과 "소망"의 부스러기를 조금씩, 조금씩 부어주셨습니다. 저는 참으로 부족하지만 천국을 바라보면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어릴 때 사랑하는 어머니와 아버지를 이별했기 때문에 천국을 더욱 더 사모하게 되었습니다. 어린 아들 철원이가 네 살 때 저의 곁을 떠났기 때문에 천국을 더욱 더 사모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2008년 8월 31일 밤 천국을 바라보면서 "주님 앞에 섰을 때 나의 모습" 이란 제목의 글을 쓴 일이 있었는데 그 글의 일부를 요약해서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저는 얼마 전에 자동차를 운전하고 가면서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내가 앞으로 아버지 집으로 올라가서 주님 앞에 섰을 때 나의 모습이 어떠할까? 기뻐 뛰는 모습일까? 소리 지르며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모습일까?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소리 없이 흐느끼며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그런 모습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죄송하고 부끄럽고 고마워서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흐느껴 우는 그런 모습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또 하나의 나의 모습을 그려 보았습니다. 아브라함과 모세와 다윗 그리고 길선주 목사님 주기철 목사님 손양원 목사님 이성봉 목사님 김치선 목사님 박윤선 목사님 한경직 목사님 등 신앙의 선배들 앞에 무릎을 끓고 감사와 존경과 사랑을 표시하고 또 표시하는 나의 모습을 그려 보았습니다.  

"저는 또 하나의 나의 모습을 그려 보았습니다. 나를 세상에서 가장 슬프고도 아름답게 사랑하시던 어머니를 붙잡고 뜨거운 사랑의 눈물을 흘리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옆에서 빙그레 웃으시면서 나를 바라보시는 나의 아버지 품에 힘껏 안겨드리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내가 너무나 슬프고도 아프게 사랑하던 어린 아들 철원이를 품에 안고 너무너무 보고 싶었다고 속삭이는 모습입니다.

"저는 또 하나의 나의 모습을 그려 보았습니다. 사랑하는 나의 가족들과 친족들과 성도들을 만나서 너무너무 반가워하는 행복한 나의 모습입니다. 나의 부족한 전도와 목회와 선교를 통해 주님을 알게 되고 믿게 되고 사랑하게 되고 섬기게 된 수 많은 성도들을 만나서 너무너무 반가워 하는 행복한 나의 모습을 그려 보았습니다.

저는 너무너무 부끄러워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흐느껴 울다가 너무너무 반갑고 너무너무 고마워서 소리 내어 웃으면서 행복해 할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토록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긍휼과 자비와 지혜와 권능과 위대하심을 무릎을 꿇고 두 손 높이 들어 찬양하고 또 찬양하고 또 찬양할 것입니다." (2008년 8월 31일 밤).

우리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가장 기본적으로 필요하고 귀중한 것은 "믿음"을 지니고 "신앙생활"을 올바로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죄 사함도 구원도 영생도 의롭다 함도 천국도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우리들의 운명을 바꾸어 놓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고 라고 주님께서 탄식을 하셨습니다.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 18:8). 사도 바울은 믿음을 지켰다고 이렇게 고백을 했습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딤후 4:7).

참된 "신앙생활" 이란 어떤 삶입니까? "신앙생활의 기본 도리"가 무엇입니까? 첫째로, "회개" 하면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둘째로, 정성껏 "예배" 드리면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셋째로, 십자가에 나타난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을 지니고 "섬김"과 "봉사"를 베풀면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넷째로, 근심 걱정 불평 불만 염려 두려움을 모두 하나님께 맡겨버리고 "평안"과 "기쁨"과 "감사"와 함께 "모험심"과 "담력"을 지니고 담대하게 멋지게 살아가는 삶입니다. 다섯째로, 하늘을 바라보면서 "천국 소망"을 지니고 가볍게 살아가는 삶입니다.

"믿음"은 우리들이 스스로 지니는 것이고 우리들이 지키는 것이지만 동시에 하나님께서 우리 죄인들에게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그런데 교만한 사람들에게는 주시지 않고 겸손한 사람들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복잡한 사람들에게는 주시지 않고 단순한 사람들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사모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주시지 않고 사모하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이렇게 간구했습니다. "우리에게 믿음을 더 하소서"(눅 17:5). 우리도 제자들처럼 "주여, 우리들에게 믿음을 더 하소서." 라고 간구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믿음"을 더하시고 또 더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가장 좋은 선물인 순수한 "믿음"을 지니고 날마다 "회개"하면서, 날마다 "예배" 드리면서, 날마다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을 지니고 "섬김"과 "봉사"를 베풀면서, 날마다 "평안"과 "기쁨"과 "감사"와 함께 "모험심"과 "담력"을 지니고, 그리고 날마다 하늘을 바라보면서 "천국 소망"을 지니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귀중하고 아름답고 행복한 "신앙 오도"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아침 설교가 좀 길어졌지만 한 마디 더 드리고 말씀을 마무리 하려고 합니다. "변화되는 믿음의 삶"즉 "올바른 믿음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한가지 필요한 것이 또 있다고 생각합니다. 징계와 채찍과 고난과 핍박과 환란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믿을 수 없는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징계를 받는 사람은 복이 있는 자라고 말씀했습니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 하심이니라"(히 12:6). "하나님께 징계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그런즉 너는 전능자의 경책을 업신여기지 말찌니라"(욥 5:17).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을 때 이상하게 생각하지도 부끄러워하지도 말고 즐거워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도 말씀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벧전 4:12, 13, 16).

시편 기자는 고난당하기 전에는 그릇 행했는데 고난 당하므로 주의 말씀을 지키게 되었고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67, 71).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이 세상에서 핍박을 당하고 환난을 당할 때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담대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 5:10-12),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한국 교회의 대표적인 순교자들인 주기철 목사님과 손양원 목사님들께서는 징계와 채찍과 고난과 핍박과 환란을 당하시다가 죽임을 당했는데 너무너무 기뻐하고 감사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셨습니다. 일제와 공산 치하에서의 징계와 채찍과 고난과 핍박과 환란과 죽임 당함이 없었다면 아마 한국교회는 일사각오의 주기철 목사님과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님을 가지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부족하고 또 부족한 죄인인데 저에게 이별과 고향 떠남의 고난과 슬픔과 아픔이 없었다면 김명혁 목사가 존재하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이제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세속화와 인간화로 치닫고 있는 한국교회 안에서 부족하고 또 부족한 우리들이 "신앙 오도"의 올바른 믿음의 길로 걸어가는 것이 너무너무 귀중한데 그러기 위해서 만약 우리들에게 징계와 채찍과 고난과 핍박과 환란이 필요하다면 우리들에게 징계와 채찍과 고난과 핍박과 환란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귀중하고 아름답고 행복한 "신앙 오도"의 삶을 올바로 살다가 죽게 하시기를 바라고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