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준 장로.
▲이효준 장로.
2018년 6월 2일 모 기독교 신문을 읽다가, 너무나 황당한 소식에 펜을 들었습니다. 오는 9월 제103회 예장 통합 총회를 앞두고, 총회는 주제인 '영적 부흥으로 민족의 동반자 되게 하소서(히 13:12-16)'를 주제성구를 설명하면서 "한국교회의 건강한 성장 및 민족과 화해하는 교회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 교단 내적으로 영적 부흥과 목회지원에 초점을 맞추어 외적으로는 민족의 동반자로서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키는 선교 적 교회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함"이라고 취지를 밝혔습니다.

히브리서 13장 12-16절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우리가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므로 장차 올 것을 찾나니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

본문 속 '거룩하게 하려고'는 '거룩하게 하다'이며, 동사는 헬라어로 '하기아조'입니다. 그 뜻은 '죄책을 제거하고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위치에 이르도록 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 서신에서 '거룩하게 하다'는 말은 윤리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이런 뜻으로 히브리서 저자가 이 말을 사용한 곳은 히브리서에서 12장 14절뿐입니다.

'하나님은 이 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이 같은 제사'란 찬송의 제사(15절)'와 '친절과 사랑의 제사'를 가리킵니다. '찬송의 제사'는 그리스도의 속죄에 감사하여 자신의 모든 삶을 하나님께 드리겠다는 정신을 가지고 이를 음악적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친절과 사랑의 제사' 란 구체적인 삶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행동으로 나타내 보이는 삶의 제사를 말합니다. 이런 삶의 제사는 야고보(약 1:27), 베드로(벧전 2:5), 바울(롬 12:1)에게도 나타나 있습니다.

야고보서 1장 27절 말씀에는 참된 경건이란 바른 인격에서 나오는 절제된 언행, 소외된 이웃들에 대한 보살핌, 세속에 물들지 않는 삶임을 강조합니다. 로마서 12장 1절 말씀의 주 내용은 성도의 실생활에 관련된 것니다. 바울은 구원 얻는 자는 성도의 영적 예배, 즉 우리의 영혼과 전 인격을 포함한 예배를 뜻하는 '삶의 제사'를 드리며 살아가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자신의 온몸을 제물로 바쳤듯, 성도는 생활의 전 부분에서 예배하는 자세로 살아가야 함을 깨우치는 것입니다.

또 베드로전서 2장 5절 말씀은 성도가 주의 말씀에 의지하여 주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자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성도는 자신이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거룩한 제사장임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합니다.

총회 주제와 함께, '교회, 노회, 총회에서 시위를 금지하는 헌법 조항의 신설'도 검토하고 있다고 합니다. 총회 임원회는 총회 화해조정위원회가 "최근 총회 재판국 판결 및 총회 지시에 대해 불법 항의집회와 시위가 빈발하여 교회 갈등을 더욱 야기시키고 총회(교회, 노회)의 질서를 혼란케 하고 있으며, 이는 각 치리회의 권위와 위상을 실추시키는 불법적인 행위로 반드시 근절돼야 한다"며 제출한 '교회, 노회, 총회 내외 장소에서의 불법적인 항의집회 및 시위 등을 금지하고 이를 위반할 시 엄벌에 처하는 조항'을 총회 헌법에 신설해 달라'는 청원 건을 헌법위원회에 이첩했다고 합니다. 필자는 이 소식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대한민국 헌법에도 시위 및 집회 결사의 자유가 보장돼 있는데, 하물며 교회 안이나 노회나 총회에서 시위를 할 수 없다니, 시대를 거꾸로 가게 하는 비민주적 법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정말 현장을 몰라도 너무 모르시는 분들 같아 참으로 마음이 아픕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이뤄지는 모든 문제들은 '목사와 장로', 바로 교회 지도자들의 잘못된 고집과 아집, 그리고 탐욕으로 인해 발생하고 있는데도, 이에 대해서는 함구한 채 성도들의 목소리에 대해 아예 귀를 닫아 버리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실과 참상에 총회 임원 여러분들에게도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요?

해마다 부총회장과 총회장, 그리고 임원에 오르는 일에만 몰두하면서, 참으로 교회와 총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진실한 하나님의 말씀을 양식으로 먹고,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을 위한 구원의 능력은 찾을 길이 없습니다. 대신 오로지 자신의 권력과 탐욕에만 눈이 멀어, 밑바닥에서 고초를 당하며 갖은 수모를 감내하며 기도하는 성도들의 울부짖음에는 귀를 닫고 있으니, 이 어찌 교회 지도자들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교회 내 당회가 당회원 전원이 담합해서 일을 그르치고 있음에도, 노회는 눈치 보기에만 급급합니다. 당회원 전원이 합심하여 일을 그르치면, 교회 성도들은 어찌 해야 합니까? 시위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요?

시위를 하면 시위하는 사람들을 노회와 총회는 물론, 사법부에까지 고소·고발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것도 자신들이 일을 저질러 놓고선, 막무가내로 고소·고발을 서슴지 않고 자행하고 있는 모습이 실로 가관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편에 서 있지 않은 성도들을 목사가 직접 재판국장이 돼 면직·출교를 시키질 않나, 오래된 성도들을 시무정지시키고 현재 맡고 있는 교회 직분들을 박탈하지 않나, 심지어 쇠사슬로 교회 문을 걸어 잠궈놓고, 예배 후 자기들끼리 윷놀이를 하며 즐기지를 않나, 심지어 경찰과 법원에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고소·고발을 하지를 않나, 건장한 집사들을 문 앞에 세워놓고, 성도들을 분리해 입장을 시키질 않나....

이게 교회입니까? 신문지상에 이러한 문제를 지적하는 기사가 실려도 노회와 총회라는 곳은 불구경 하듯 손을 놓고 있는 실정입니다. 과연 노회와 총회라는 곳이 필요한지조차 의문스럽습니다.

말씀에서는 거창하게 사랑한다면서 양의 탈을 쓴 늑대처럼 세상 사람들 보다 못한 악한 방법으로 흉계를 꾸미고,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있습니다.

노회와 총회는 지 교회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자신들의 교회만 사랑할 것이 아니라, 이웃 교회나 같은 노회 소속의 교회에도 관심을 갖고, 옳고 그름을 따지는 일에 동참하여 교회를 바로 세워 나가야 할 것입니다.

총대에 나가기 위해 큰 교회 장로나 목사들의 눈치를 보는 현장도 참으로 안타까울 뿐입니다. 노회장과 부총회장, 총회장을 하기 위해 갖은 수법을 동원하여 뜻을 이루려 하지만, 정작 손대야 할 교회의 산적한 현안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롯이 자신의 명예와 권력만을 추구하고 있으니, 예수님 재림하시면 그 분들이 어디로 숨을 것인지 심히 궁금합니다.

분쟁이 없는 한국교회를 꼽으라고 하면, 구세군 교회 정도가 있습니다. 구세군은 지교회에 문제가 발생하면, 본부에서 내려와 즉시 문제를 해결 해 줍니다. 그리고 장로교회처럼 문제가 오래 지속되도록 하질 않습니다. 장로교회의 법은 참으로 어렵고 이상합니다. 법이란 약하고 어려운 성도들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데, 오히려 힘 있는 장로와 목사들을 위해 있는 것 같습니다.

모든 문제는 목사와 장로들에 의해 발생합니다. 시위를 못하게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장로와 목사 그리고 노회와 총회에 있는 잘못된 법들을 고쳐 나가는 것이 더 빠른 방법 아닐까요?

위임목사 제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제도에는 늘 분쟁의 갈등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위임목사 제도가 과연 필요한 것일까요? 한 번 위임되면 70세까지 평생 그 교회의 주인으로, 교회를 자기의 것으로 착각한 채 마음대로 하려는 사고방식 때문에 많은 실수를 저지르는 것입니다.

당회에서 잘못한 일이 있다면, 성도들이 이를 노회에 곧바로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제도도 만들어야 합니다. 모든 것이 당회를 거쳐야 하는 악법 때문에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당회를 거치라는 일면 옳은 법안 같지만, 당회원과 위임목사가 담합해 잘못을 저질렀을 때 하소연할 곳이 없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원로장로와 원로목사 제도도 철폐해야 합니다. 원로가 무슨 큰 상급입니까? 천국 가는 인증서라도 되는 것입니까? 오래도록 주님을 위해 교회에서 수고했다는 위로의 뜻으로 만들어놓은 제도를 악용하여, 원로가 되면 누릴 갖은 혜택 때문에 기를 쓰고 원로목사가 되려 하는 것입니다.

작은 교회에서 평생 주님 위해 교회에 헌신한 목사님들 중에는 아예 퇴직금도 못 받아 생활고를 겪는 경우가 허다한 실정인데, 이런 분들을 위해 위로해주는 제도는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 오로지 자신들의 영욕에만 눈을 크게 뜨고 있습니다. 이웃 교회 목회자들의 애로사항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시위를 못하게 하는 법을 제정하기보다, 오히려 그들의 상처를 어떻게 하면 싸매어줄지, 그리고 기독교의 미래를 위해, 어떻게 하면 부흥성장하고 불신자들의 곁으로 한 걸음 더 다가가 그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진심어린 지혜를 모아 세상으로 한 걸음 더 다가가 자비와 긍휼을 베풀어야 하지 않을까요,

매년 바뀌는 총회장이 무슨 일을 하겠습니까? 최소한 임기가 2년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노회장도 마찬가지입니다. 1년간은 각 지교회를 순회하면서, 애로사항과 함께 기독교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지 성도들에게 직접 물어보면서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남은 1년은 여론을 수렴해서 얻어진 지혜를 임원들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논의하며 실천하기 위해 전심을 다해 목표를 이루는 사명자들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지금 기독교는 암흑의 시대입니다. 순종이라는 명목 아래 입도 뻥끗 못하게 하며 귀를 닫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는 그저 주일이면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의무감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교회를 나오는 분들이 많습니다.

노회나 총회에서 제대로 일을 하지 못해서 시위를 하는데, 그것마저 막으면 공산주의와 다를 것이 무엇인가요? 상급기관에 알릴 유일한 방법이 이뿐인데, 이마저 못하게 한다면, 세상으로 나가는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런 사태가 벌어지기 전에 교회 지도자들은 잘못을 시인하고 고쳐 나가는 것이 최선의 방법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자신들의 자존심, 권력과 명예와 고집 때문에 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허다함을 왜 모르시는지요?

총회보다 더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해결할 수 있는 곳이 노회입니다. 그래서 노회 재판국은 공명정대하게 성도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들에게 다가가 '솔로몬의 지혜'를 발휘해, 하나님 보시기에 한 점 부끄럼 없이 주어진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힘 있는 자들, 자신들과 친한 자들,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자 등의 편에 서서 하나님의 뜻과 무관하게 판결을 하고 있습니다. 저들이 정말 목사, 장로로서 자격이 있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노회 지도자들도 옳고 그름을 판단해 성도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좋은 방향으로 해결될 수 있도록 행정을 비롯해서 모든 사명들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런데 슬그머니 꽁무니를 빼고 굳게 함구하고 있는 모습이 참으로 안타깝기만 합니다.

무엇이 두려워서 그러시는지요. 혹시 총회 총대로 참석하기 위해 필요한 표 때문은 아닌지요. 주님 주시는 양심의 신앙을 올바르게 사용하시기를 바랍니다. 노회만 공정하게 일을 처리해도, 성도들이 굳이 힘들게 시위나 집회를 진행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총회에 참석할 총대를 뽑는 현재의 방법도 개선해야 합니다. 서로 담합해서 총대로 뽑혀 나가는 모습도 보기에 썩 좋지 않습니다. 그 결과 늘 가던 사람만 총대로 참석합니다. 말수가 적거나 작은교회의 목사와 장로들은 총대로 뽑히기가 참 어렵습니다. 이 제도 또한 바꿀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앵무새같이 강단에서 입으로만 사랑을 전할 것이 아니라, 강단 아래로 내려와 성도들을 진심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존심과 고집과 명예를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특히 금전에서 자유롭지 못하면 큰 낭패를 당하며 화를 자초할 것입니다.

이 땅에는 훌륭하고 존경하고픈 목사님, 장로님들이 많습니다. 그들의 행함을 본보기로 신앙생활을 하려 노력하는 분들이 많아져야 합니다. 당회는 물론 노회와 총회는 더 성숙된 모습으로, 주님께서 당부하신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늘 묵상하며, 성도들의 편에서 성도들이 기쁘고 즐겁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지혜를 모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시위를 못하게만 할 것이 아니라 마음과 귀를 열어 그들의 가슴에서 나오는 진정한 소리를 경청한다면, 기독교의 앞날은 더욱 밝아질 것이고 주님께서도 기뻐하실 것입니다.

한 마디만 더 하겠습니다. 시위는 사회법에서도 허용합니다. 정해진 룰대로만 하면 얼마든지 인정해 줍니다. 만약 예장 통합 총회에서 시위금지법을 수용한다면, 아마 다른 교단으로 이탈하는 성도들이 늘어갈 것임을 염두하셔야 할 것입니다.

더구나 시위를 하게 되는 근본 원인제공은 모두가 목사와 장로들이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위는 연약한 사람들의 자기 표현입니다. 그 표현마저 막으려 한다면, 기독교의 정신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현재 지도자들에게 있는 많은 병폐와 갑질, 권력과 기득권, 고집과 아집, 그리고 안주하는 모든 모습들을 내려놓을 때, 그들의 권위와 위상은 더욱 빛나고 존경의 대상으로 아름다운 대우를 누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순간부터 새롭게 거듭나는 주의 종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축복합니다.

이효준 은퇴장로(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