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가 소설을 남용했다’고 할 정도로, 아쉬움이 짙은 책

입력 : 2018.06.10 20:45

[기독교 문학을 만나다 23] 미우라 아야꼬

양 치는 언덕
양치는 언덕

미우라 아야코 | 서치헌 역 | 소담출판사 | 400쪽 | 13,800원

일본 소설입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팔리고 인기 있는 외국 소설은 단연코 일본 소설입니다. <개미> 같은 일어날 법한 상상의 일들을 현실로 규정하고 믿게 하는 프랑스의 베르나르 베르베르도 있고, 법정 스릴러의 대가인 미국의 존 그리샴도 있고, '해리 포터' 시리즈의 영국의 조앤 K. 롤링도 있고, <죄와 벌> 같은 철학적 깊이를 이야기로 담아내는 러시아의 도스토옙스키도 있고, 최근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의 인기로 각광받고 있는 스웨덴의 요나스 요나손도 있고, 우리나라와 가까운 <삼국지>의 중국도 있지만 일본 소설의 인기만은 못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사랑받는 외국 소설을 분석해 보면, '일본 소설'과 '일본 소설 외의 외국 소설'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일본 소설 외의 외국 소설'은 어느 특정 소설로 작가가 사랑받아 작가의 나라를 보게 합니다. 단점은 사랑받았던 작가의 다음 작품이 시들하면, 그 나라의 소설에 대한 관심도 시들해진다는 겁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일본 소설 외의 외국 소설'은 대부분 나라보다는 작가의 영향력이 큽니다. 가령, 위에서 소개한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이 선풍적 인기를 얻어 스웨덴을 포함한 노르웨이, 핀란드 등 북유럽 국가의 소설이 많이 소개됐지만, 이 소설을 쓴 요나스 요나손의 다음 작품이 전작보다 사랑받지 못하니 북유럽 국가의 소설의 관심도 적어지고 있습니다. 작가의 영향력이 지대한 겁니다.

그런데 일본 소설은 작가보다는 나라가 영향을 미칩니다. 아무리 생소한 작가라도 '일본 소설'이라 하면 책에 손이 가게 하고 훑어보게 됩니다. 어떤 유명 작가의 다음 작품이 인기가 없다 해서, 일본 소설 자체에 관심이 줄지 않습니다. '작가는 작가고, 나라는 나라다'가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왜 우리는 일본 소설을 좋아할까요?

제가 분석하기는, 일본 문화에 대한 선망과 생활방식의 일치감이 있어서입니다. 같은 동양권인 중국은 약간 낡은 이미지가 있습니다. 일본은 깔끔하고 세련된 이미지가 있습니다. 여기에 일본 소설에서 보이는 젊은이들의 사고방식과 고민이 우리와 유사합니다. 설정과 대사도 심각하지 않습니다. 유머러스합니다.

여기에 또 하나 한몫 하는 게, 우리나라에서 터부시하고 금기시하여 조심스러워 하는 젊은이들의 성(性)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나오고, 성애 묘사도 노골적이라는 점입니다. 우리와 비슷한 생활 문화의 터에서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성적 표현을 문장으로 도출시키니, 화면으로 볼 때와는 또 다른 '음란의 희열'을 '책이라는 개인적일 수밖에 없는 상품'으로 느끼게 합니다.

그리고 어떤 일본 소설은 문학성이 갖춰진 우수작들이 많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일본 소설을 전문적으로 번역하는 한국의 번역가들이 많다는 점도 일본 소설 대중화에 큰 역할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더 자세하게 설명할 수 있지만 여긴 <양치는 언덕>을 소개하는 자리이니, 이쯤에서 일본 소설의 특징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서두가 길었습니다. 이 소설은 '일본 소설'입니다. 이 책은 작가의 나이 44세인 1966년에 나온 책입니다. 50년도 넘은 겁니다. 오래된 소설이지만 일본 소설 특징이 잘 살아있습니다.

줄거리를 간단하게 설명하겠습니다. 중심 인물은 4명입니다. 고등학교 영어 선생인 다케야마 데쓰야와 그를 선생이 아닌 이성으로 사랑한 여고생 스기하라 교코, 아버지가 목사님인 것이 부끄러운 예쁜 전학생 히로노 나오미, 스기하라 교코의 오빠이자 다케야마 데쓰야의 친구 스기하라 료이치입니다. 여기에 굳이 한 명을 더 넣자면 교코와 나오미의 여고 동창생 가와이 데루코입니다.

교코와 나오미는 영어 선생님인 데쓰야를 좋아하지만, 데쓰야는 나오미를 좋아합니다. 하지만 나오미는 데쓰야가 친구인 교코를 좋아하는 것으로 오해하여 마음을 접고 자신에게 열정적으로 접근해오는 바람둥이 료이치에게 마음이 끌려 결국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하게 됩니다. 결혼한 료이치는 자신의 바람기를 주체하지 못해 데루코와 성적 관계를 맺습니다.

일본 이름이 낯설어 혼동되지만, 이름만 극복하면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습니다. 이야기 구조 자체가 복잡하지 않은데다, 젊은이들의 성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젊은이들의 성을 통해 용서와 이해, 회개와 인내, 사랑이라는 기독교적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이 책의 목적입니다.

성(性)을 다루지만, 1960년대에 쓰여서 그런지 요즘의 일본 소설처럼 직접적인 묘사는 생략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자유분방한 성적 교제에 대해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모습은, 성적 문화에 다소 개방적으로 변해가고 있는 우리에게도 아주 낯설고 당혹스럽기까지 합니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일본 소설에서 느껴지는 자유연애와 감각적이고 동물적인 성 문화의 역사가 오래됐음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중심에 성적 교제를 놓고, 주인공들의 관계가 엮입니다. 교코는 데쓰야를 좋아하지만 데쓰야는 나오미를 좋아하고, 나오미는 데쓰야를 좋아하지만 료이치와 결혼합니다. 결혼을 했으면서도 료이치의 폭력성과 바람기로 데쓰야를 그리워합니다.

처음에 결혼을 반대한 나오미의 부모님은 료이치의 못된 버릇을 앎에도 용서하고 품어주라고 권합니다. 교코와 료이치 남매의 어머니가 자신의 아버지의 첩인걸 알아 싫어하는 데루코는 료이치의 아이를 뱁니다. 또 바람기 많은 료이치를 사랑하라고 한 나오미의 부모에게도 성적 반전이 있습니다.

미우라 아야코
▲저자 미우라 아야코. ⓒmimoonchurch.com
읽다 보면 급작스러운 설정과 이해하기 어려운 감정의 설명, 상황에 맞지 않는 대사로 자주 헛웃음이 나오게 됩니다. '정말 이런 상황에서 이런 감정과 대사가 나오고 이렇게 처신할까?' 나오는 등장인물의 모습이 상식적이지 않습니다. 하다 못해, 가장 멀쩡해보이는 나오미의 부모조차 비상식적입니다. 이 '비상식적'이라는 것은 기독교적 사랑을 증명해 보이려고 일부러 설정해 놓은 것일 수 있습니다.

이 책은 일본 소설이지만, 어찌됐건 '기독교 소설'로도 분류가 가능합니다. 그래서 기독교적 메시지를 전해야 하는데 인물을 목사로 둔다는 것만으로는 너무 평범해 보여, 목사에게도 일부러 결점을 부여한 거 같습니다. '나도 너와 같다. 그러나 나는 주님의 사랑으로 극복했다. 그러니 너도 극복해라.'

이렇게 해서 자신의 딸인 나오미를 설득하고, 이런 넓은 사랑에 감복하여 교회를 아주 싫어하는 료이치에게 기독교적인 변화를 일으키게 합니다.

이런 반전은 이야기의 마지막에 등장합니다. 나오미의 아버지가 목사인 것도 초반에 밝히지만, 그보다는 성적 교제에 중심을 두고 이야기를 진행시킵니다. 교인들이 읽는다면 '왜 나오미의 아버지를 목사로 설정해 놨을까?' 궁금할 정도로 일반 소설과 같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등장하는 기독교적인 메시지에 대해, 작가가 기독교 소설을 쓰려고 시작은 했는데 연애 이야기에 빠져 들다 '아! 맞다, 내가 기독교 소설을 쓰려고 했었지' 하여 막판에 급하게 방향을 튼 것으로 여길 수도 있습니다. 워낙 느닷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일부러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처음부터 '교회와 목사'를 중심에 뒀고, 소설이라는 장치를 빌려 자연스럽게 '주님의 사랑은 넓습니다!'를 강조하려 했던 거 같습니다. 이것이 기독교 소설이 주는 재미이고 강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저는 이 소설의 설정과 전개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더욱이 전반적으로는 <상실의 시대>의 무라카미 하루키의 흐름에 마지막에 우리나라 영화 <스캔들>의 반전으로 끝나는 설정은 지극히 상투적이고 실소를 자아내게 합니다.

그렇게 바람기 많은 료이치가 소설에서는 짧게 나오는 나오미의 부모의 헌신으로 단박에 회심한 것에 대한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물론 회심은 단번에 이뤄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회심을 위해 설치해 놓은 사건들이 너무 뻔하고 빠르며 급합니다.

마치 '기독교가 소설을 남용했다'고 여겨질 정도입니다. 대개 소설이나 영화, 드라마를 가지고 기독교의 본질을 오염시키는 사례가 많습니다. 재미를 위해 성경에도 없는 과도한 설정으로 사람들의 눈길을 끕니다. 하지만 어떤 경우 성경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소설을 이용하는 사례도 있습니다. 'A는 B다'를 말하기엔 너무 직접적이고 멋이 없다 보니, 소설이라는 장치를 빌려 전달하려는 겁니다.

그런 점에서 소설은 아주 탁월한 장르임에는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런 목적으로 소설을 이용하기 위해선, 직접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할 때보다 더 많은 기도와 연구를 해야 합니다. 소설을 많이 읽고, 소설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탁월한 기독교 소설이 나올 수 있습니다. 이 소설은 그런 점에서 '기독교가 소설을 남용했다'는 아쉬움이 짙은 책입니다.

이런 아쉬움은 제가 이 책을 기독교 소설이라는 것을 알고 읽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책에 대해 감상평을 쓰기 위해 읽다 보니, 소설이 주는 재미를 못 느끼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오히려 이 책은 기독교 소설이 아니라 '일본 소설을 읽고 싶다'는 분들이 재미있게 읽으면서 동시에 교훈도 얻을 수 있을 겁니다.

요즘 일본 소설의 기원을 알고 싶은 분들이라면 좋은 읽을거리일 겁니다. 그렇게 읽는다면 저의 이 책에 대한 폄하에 동의하지 않을 겁니다. 어쩔 수 없죠. 저는 성도이고, 글 쓰는 사람이니깐요. 저는 늘 고민합니다. 읽고 글을 쓰면서 '내 평이 맞나?'에 대해.

이 책의 저자는 <빙점>을 썼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유명한 소설입니다. 하지만 저는 <빙점>은 읽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이 책만 놓고 보자면, 소설을 좋아하는 성도로서 좋은 기독교 소설을 찾고 전하기 원하는 저로서 많이 안타까운 책입니다.

소설 쓰기는 어렵습니다. 그리고 기독교 소설 쓰기는 더 어렵습니다. 바라기는 더 많은 고심과 노력으로 훌륭한 기독교 소설이 나와, 읽는 재미와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감동을 받고 싶습니다.

이성구 부장(서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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