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기성
▲유기성 목사. 지난 8년 동안 예수동행일기를 쓰며 삶의 많은 부분에서 변화를 경험했다는 그는 “지금 이 순간, 인터뷰하는 중에도 예수님과 동행함을 느낀다”고 했다. ⓒ김진영 기자
선한목자교회 유기성 목사는 최근 가장 주목받는 목회자 중 한 명이다. 그렇게 된 데는 그가 매일 쓰는 '예수동행일기'의 영향이 크다. 한때 '영성일기'라 부르던 그것이다. 유기성 목사의 설교를 두고 '기승전 예수동행일기'라고들 한다는데, 그 만큼 요즘 한국교회에선 '유기성=예수동행일기'로 통한다. 오는 18일 열리는 '2018 예수동행일기 학술 컨퍼런스'를 앞두고, 7일 선한목자교회에서 유 목사를 만났다.

매일의 일상에서 주님과 동행하는 훈련

-처음엔 '영성일기'였는데, 왜 이름이 '예수동행일기'로 바뀌었나요?

"'영성'이라는 단어의 해석이 제각각이었기 때문입니다. 오해도 많았고요. 그래서 좀 더 분명히 하자는 뜻에서 예수동행일기라고 부르기로 했습니다. 결국 지향하는 바는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이니까요."

-예수동행일기에 대해 보다 구체적으로 소개해주세요.

"예수동행일기의 실제적인 초점은 일기가 아니라 예수님과의 친밀한 동행에 있습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여기서 '예수를 바라보자'를 NIV 성경은 'Let us fix our eyes on Jesus'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24시간 예수를 바라보자고 한 것이고, 이를 위해 매일 일기를 쓰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을 영접하고 난 다음 바로 죽지 않습니다. 구원 문제로 갈등을 하고, 시험에 들기도 합니다. 또 신앙의 길에서 회의에 빠질 때도 있으며,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성에서 어려움을 겪기도 하죠. 이것이 예수님을 영접한 기독교인들의 실존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매일 예수님과 동행하며 사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다는 것은 평생 한 두 번의 특별한 체험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매일의 일상에서 주님을 만납니다. 성경을 읽다가, 예배를 드리다가, 기도하다가, 혹은 책을 읽거나 그저 길을 걷다가... 그렇게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언제나 우리는, 우리와 동행하시는 예수님을 느끼고 그 분을 만납니다. 이것을 매일 기록하자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예수동행일기가 다른 은혜의 수단들, 가령 큐티나 성경읽기, 기도, 제자훈련 등을 대신한다는 건 아닙니다. 다만 이런 것들을 뒷받침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여러 은혜의 수단을 통해 받은 은혜를 담아내는 그릇이 바로 예수동행일기입니다. 사실 주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영적으로 메마르는 것은 그런 은혜를 담아낼 그릇이 없기 때문이죠. 마치 폭포수 밑에 있어도 그릇이 없으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예수동행일기를 쓰는 또 하나의 목적은, 예수님을 나보다 앞세우기 위함입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지만, 알고 보면 예수님보다 먼저 앞서 갈 때가 많습니다. 예컨대 급한 일이 생기거나 난감한 상황에 처하면, 우선 주님의 뜻을 구하기보다 그저 내 판단에 의존할 때가 더 많죠. 이것은 예수님과의 진정한 동행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예수동행일기를 쓰면서 내 앞에서 나를 이끄시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 분을 의지하는 훈련을 하자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구원에 확신을 가져도, 삶이 잘 바뀌지 않는 건, 예수님과 동행하는 훈련이 안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제 주님을 바라보면서 그 분이 내 삶을 바꾸도록, 항상 주님께 순종하는 매일 매일의 훈련을 해보았으면 합니다."

신비·율법주의로 흐리지 않도록…

-6월 18일 '예수동행일기 학술컨퍼런스'를 개최하십니다. 2년 전에 이어 이번이 두 번째라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왜 '학술' 컨퍼런스인가요? 예수동행일기가 신학적인 것과도 관련이 있나요?

"그 동안 예수동행일기 사역이 빠른 속도로 확산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신학적인 검토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과연 성경적인 근거는 있는지, 신학적으로 문제는 없는지 알고 싶어 하신 겁니다. 이번 컨퍼런스는 그런 고민을 나누고 해답을 얻는 자리가 될 것입니다.

기독교의 가르침이 다른 종교의 그것과 구별되는 점이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강조하는 점일 것입니다. 포도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이야 말로 기독교인들이 가장 바라는 것이자, 신앙의 목적일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동행일기는 성경적으로나 신학적으로 전혀 생소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기독교 역사에서 많은 영성가들이 일기를 썼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신비주의로 흐를 가능성입니다. 따라서 지나치게 자신의 감정에 치우치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일기를 매일 쓰면서도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일에 소홀해선 안 될 것입니다. 또 자칫하면 일기만 쓰는 율법주의에 빠질 가능성도 있으니, 이 점도 조심했으면 합니다."

환경이나 사람보다 주님을 더 바라보는 삶

-목사님은 언제 처음 예수동행일기를 쓰셨고, 그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처음 일기를 쓰게 된 건 지금부터 약 8년 전인 2010년부터였습니다. 당시 제 안에 힘든 부분이 있었어요. 겉으로는 목회도 비교적 잘 한다는 말을 들었고, 설교하는 데도, 심방하는 데도 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교회도 성장했지요. 하지만 스스로 '정말 내 안에 주님이 계신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고, 잘 변하지 않는 삶에 자책감도 느꼈습니다. 한 마디로 눌려 있었죠.

지금까지 목회하면서 가장 두려운 것이 '목회 기술'만 늘어가는 것이더군요. 설교나 교육, 상담, 교회 행정 등을 오래하다 보면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됩니다. 하지만 그러다 정작 중요한 걸 놓치면, 그 모든 게 다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바로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이죠. 2010년, 제 안에 이런 고민이 있었습니다.

그 때 보게 된 책이 미국 선교사로 1930년대 필리핀에서 사역하셨던 프랭크 루박의 「프랭크 루박의 편지」였습니다. 루박 선교사님 역시 저와 같은 고민 가운데 필리핀에서 매일 주님을 바라보는 일기를 쓰셨던 겁니다. 이를 통해 주님의 임재를 확신하시며 자신의 달라진 모습을 책에서 고백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읽고 많은 도전을 받았어요. 그래서 저도 그 때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로 8년이 지났습니다. 실제 많은 변화가 있으셨나요?

"아침에 일어나 밥을 먹고, 사람을 만나고, 일을 처리하고,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전하고, 다시 잠자리에 누울 때까지, 항상 예수님을 생각하고 그 분과 동행하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일기로 기록해 왔죠. 그러면서 '항상 복종하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이젠 환경이나 사람보다 주님을 더 바라보게 된 것 같아요. 더 이상 주변 사람들의 평가에 크게 흔들리지 않습니다. 전엔 사람들의 눈을 의식해 칭찬받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칭찬은 아무리 많이 받아도 갈증만 더 깊어질 뿐이었죠. 비난받는 게 싫어 불의한 일을 보고서도 그냥 넘어가곤 했습니다. 지금은 그것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워졌어요. 주님과 동행하면서 오직 그 분의 칭찬에 만족하고, 고난도 복임을 깨닫고 있습니다. 정말 엄청난 변화를 경험했죠."

-선한목자교회 교인들도 예수동행일기를 쓰시죠?

"예수동행일기 어플리케이션(앱)을 개발했는데, 현재 가입자가 8만명 정도 됩니다. 이들 중 스스로 선한목자교회 교인이라고 밝힌 수가 1만1천명 정도구요. 하지만 실제 일기를 쓰고 계신 분들은 약 2천2백 명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교회를 다니신지 3년이 넘은 분들이 주로 일기를 쓰고 계신 것 같습니다."

-그들도 변화된 삶을 간증하고 있나요?

"어느날, 여성 몇 분이 저를 찾아오셨습니다.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사랑하는 동생이 있는데 이 교회를 나오면서 변화되었다고 하더군요. 그게 너무 감사해서 찾아왔다고. 그 동생이 평소 사고를 많이 쳐서 누님들 속을 좀 썩였나 봅니다. 이런 변화의 간증들이 많아요. 한 번은 1천회 이상 일기를 쓴 교인들을 모아놓고 과연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들어본 적이 있었습니다. 실로 놀라운 변화들이 그들 가운데 있었죠.

요즘 한국교회에서 교인들끼리 싸운다는 소식을 종종 듣게 됩니다. 목사의 아들인 저도 어렸을 때 그런 모습을 보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저마다 이유야 있겠지만, 제 머릿속엔 그냥 싸웠다는 것만 있어요. 만약 그들이 자신과 동행하는 예수님을 의식하고 있었다면 과연 그렇게 싸웠을까요? 결국 주님을 바라보는 눈을 뜨는 것이 신앙의 열쇠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사하신 분입니다. 그런 속죄의 예수님을 거의 모든 기독교인들은 흔들림 없이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와 언제나 함께하시는 '임마누엘'의 주님이십니다. 그런데 이 점은 많은 이들이 놓치고 있어요. 눈에 보이지 않으니 의식하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예수동행일기는 그렇게 눈에 보이지 않는 예수님을 24시간 의식하는 훈련입니다."

개인적 영성이 ‘나무’라면 사회적 영성은 ‘열매’

-혹시 비판은 없습니까?

"예수동행일기가 너무 개인적인 영성에 치우친 것 아니냐는 비판을 가장 많이 듣습니다. 성도로 하여금 부조리한 사회와 공동체보다 내면의 영성에만 초점을 맞추게 한다는 거죠. 그러나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개인적 영성에만 치중한 나머지 사회적 영성을 잃어버렸다는 판단은 옳지 않다고 봅니다. 오히려 개인적 영성이 부족해 사회적 영성까지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게 더 정화한 표현 아닐까요?

저는 개인적 영성과 사회적 영성을 별개로 보지 않습니다. 개인적 영성이 나무라면 사회적 영성은 그 나무가 맺는 열매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사회적 영성, 즉 열매가 좋지 못하다면 그건 분명 나무, 다시 말해 개인적 영성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개인적 영성이 건강하면 자연히 사회적 영성도 강해지기 마련입니다.

흔히 기독교의 보수는 개인적 영성을, 진보는 사회적 영성을 강조한다고들 합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엔, 보수든 진보든 둘 다 개인적 영성이 약합니다. 나무의 뿌리가 병든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아무리 사회적 영성을 강조해 봐야 될 리가 없습니다. 하루빨리 개인적 영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럼 사회적 영성은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 동안 '한국교회가 변해야 한다' '사회적으로 책임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낮은 곳을 향해야 한다'는 등의 주장이 계속 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그로인해 한국교회가 정말 변했나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논쟁과 분열만 생긴 것 같습니다. 누가 진정 개혁적인 존재입니까? '사랑과 희락, 화평과 오래 참음, 자비와 양선, 온유와 충성, 그리고 절제'의 열매를 맺는 사람, 그가 참으로 개혁하는 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직접 씻어주셨던 것처럼...."

-끝으로 예수동행일기가 한국교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길 바라시나요?

"지금까지 시대마다, 한국교회를 이끌었던 흐름들이 있었습니다. 예배갱신운동, 큐티운동, 성령운동 등이 그와 같은 것들이었죠. 이런 것들이 하나의 깃발이 되어 성도의 마음을 모았고, 힘차게 달리게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바라 볼 깃발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신앙의 열정이 많이 식었다고. 예수동행일기가 이렇게 힘이 빠진 한국교회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하나의 작은 디딤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미국에 히피문화가 휩쓸었을 때, 청년들이 다 교회를 떠났습니다. 그 때 척 스미스 목사가 '지저스 무브먼트'를 일으켜 청년들을 다시 예수님께 나아오게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청년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예수님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향해 눈을 뜨면 삶은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