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규
▲이상규 박사 ⓒ크리스천투데이 DB
한국기독교학술원이 '3.1운동과 한국교회'라는 주제로 지난 28일 한국교회백주년기념관에서 제52회 공개세미나를 개최했다.

이날 '3.1운동과 기독교-3.1운동에서 기독교의 기여에 대한 고찰'일는 제목으로 발표한 이상규 박사(고신대 명예교수)는 "중국에서의 만세운동 준비를 위한 신한청년단의 조직, 국내의 서울과 평양에서의 독립운동을 위한 조직, 일본에서의 2.8 독립선언 등은 기독교인 중심이었다"고 했다

이어 "민족대표 33인, 혹은 48인의 구성에서도 기독교는 인적 구성에서 50%의 역할을 감당했다. 또 삼일운동의 거사 및 전국적 전개과정에서도 기독교회와 선교학교는 만세운동의 구심적 역할을 감당했다"고 했다.

이 박사에 따르면 3월 1일의 만세운동의 경우, 서울 이외의 8개 지역은 전부 기독교계 중심이었고, 평양과 의주 만세시위의 주동자는 김선두와 강규찬, 유여대 등 목사들이었다. 또 만세운동 초기의 1,200여 회의 시위 중 주동세력이 뚜렷한 340회를 지역별로 정리하면 311개 지역이 되는데, 이중 기독교가 주도한 지역은 78개 지역이었으나 천도교가 주도한 지역 66개 지역이었고, 42개 지역은 기독교와 천도교가 공동으로 주도한 지역이었다.

이 박사는 "이 점은 3.1운동의 전개 과정에서도 다수 지역에서 기독교회나 선교학교가 주도적 역할을 했음을 보여 준다"며 "당시 기독교 인구는 20~22만으로 전 국민의 1~1.5%에 불과했으나 신도 100만 이상의 천도교보다 더 많은 지역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고, 기독교회나 선교학교가 없는 지역에서는 천도교와 협력하였음을 알 수 있다"고 했다.
 
그는 "특히 신앙이라는 연대로 맺어진 전국 규모의 교회조직과 통신망은 만세운동의 전국적 확산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면서 "기독교계의 만세운동에 대한 관여 혹은 참여는 '기독교회'라는 교단적 합의나 결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 개인의 결단에 의한 참여였다는 점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 사이에 경계를 지키면서도 그리스도인의 민족적 혹은 사회적 책임을 실현하려는 의지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이처럼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저항을 불러일으킨 요인은 무엇이었을까? 이 박사는 세 가지로 분석했다. △폭압적인 식민통치에 대한 반발 △기독교계의 민족의식 혹은 민족운동 전통 △기독교 신앙에 대한 탄압이 그것이다.

이 박사는 특히 세 번째 요인에 대해 "기독교는 일제 통치기간 중 가장 강력한 종교였고 한국사회와 국가, 그리고 민족운동과 독립운동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며 "조선총독부는 1910년 당시 조선의 기독교회는 20만의 신도와 3백 개 이상의 학교, 3만이 넘는 학생, 1,900여개의 집회소, 외국인 선교사 270여명, 조선인 교직자 2천 3백여 명을 거느린 무시할 수 없는 집단으로 이해하고 있었다"고 했다.

그는 "그밖에도 많은 병원과 자선기관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것은 신앙이라는 견고한 유대로 결합되어 있었고, 외국인 선교를 통해 세계 여론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래서 조선총독부는 처음부터 한국 기독교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 조선통치에 이용하든지 아니면 한국 기독교를 탄압하여 그 영향력을 약화시키든지 양자택일을 할 수 밖에 없었다"고 했다.

이 박사는 "회유정책이 실효를 거두지 못하자 일제는 한국기독교 탄압과 분열을 시도하여 각종 제재를 가했다"면서 "종교활동을 규제하려는 '포교규칙(布敎規則, 1915)'은 첫 법적 규제였다. 이후 기독교교육을 통제하기 위해 '사립하교 규칙'을 재정하거나(1911), 개정하고(1915), 안악사건이나 105인 사건을 통해 기독교를 탄압했다"고 했다.

그는 "안창호가 기독교계 인사들 중심으로 조직한 신민회(新民會)도 105인 사건으로 해체되었다"며 "이런 환경에서 식민지배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심리적 저항은 만세운동을 통해 표출된 것이다. 말하자면 기독교인들은 독립운동을 통해 신앙의 자유, 선교의 자유를 누리며 자유와 공의 등 기독교적 가치를 실현하고자했던 것"이라고 했다.

아울러 이 박사는 "비록 기독교의 지도적 인물 가운데 일부가 후일 훼절하고 친일의 길을 간 경우가 없지 않으나, 이점을 이유로 3.1운동에 기여한 한국교회의 역할마저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정당하다 할 수 없을 것"이라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