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네카
▲세네카의 무덤. ⓒ한평우 목사 제공
로마와 나폴리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포르미아(Formia)을 찾아갔다. 그곳에 있는 스토익 철학자 키케로의 무덤을 찾기 위해서다. 거기서 아주 우연히 세네카(Seneca, B.C. 4-A.D. 65)의 묘지가 아피아 안티카(Appia Antica)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세네카라면 네로 황제의 멘토요, 로마의 위대한 스토아 철학자가 아닌가? 호기심이 일어나, 언젠가 그의 무덤을 찾아가기로 했다.

그는 히스파니아(현, 스페인)의 좋은 가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로마에서 수사학 교수로 유명했고, 형 갈리오(행 18:12-17)는 바울과 만난 적 있는 아가야의 총독이었다는 사실 때문에 호기심은 더했다.

그는 어렸을 때 천식으로 시달렸고, 병을 고치려고 당시 이집트에 거주하고 있는 큰 어머니 집으로 갔다. 삼촌은 이집트의 주둔군 사령관 가이우스 갈레리우스였다. 어쩜 이리 가문이 좋을까 싶다.

그는 후에 로마로 돌아왔고, 어떤 사건으로 클라우디우스 황제에 의해 콜시카로 추방을 당했으나, 황제의 부인 아그리피나의 도움으로 49년에 로마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50년에 집정관이 되었다.

집정관으로 있는 동안 근위대장인 브루스 등과 연합하여 권력 집단을 이루었다. 그 후 54년에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암살되자 아그리피나의 요청으로 네로 황제의 스승이 되면서, 권력의 최측근으로 부상했다.

그가 보필하는 동안 그의 충고를 경청한 어린 네로 황제는, 원로원으로부터 원만하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절대 권력을 가진 자를 충고하는 일이 어렵다는 것은 동서양이 비슷하다 싶다.

우리나라의 역대 대통령들도 하나 같이 충고하는 사람들을 싫어했다고 한다. 심지어 젠틀한 이미지의 대통령 케네디도 충고하는 보좌관에게 서류철을 집어던지기도 했다니 말이다. 현대에도 그런데, 절대 권력을 향유했던 2천년 전에야 충고하는 일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싶다.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네로에게 세네카를 붙인 것은 네로의 어머니 아그리피나(Agrippina)였다. 네로 황제는 처음에 세네카에게 아주 고분고분했다. 그러나 20대에 들어서자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결국 어머니 아그리피나와 충돌하게 됐다.  

결국 네로는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 어머니를 죽여야 했다. 자신을 천거한 아그리피나가 죽임을 당하고, 근위대장으로 있던 친구 브루스가 62년에 세상을 떠나자, 세네카는 더 이상 권력을 유지할 수 없음을 느끼게 됐다.

그래서 건강이 좋지 않고, 또 늙었다는 이유로 여러 차례 네로에게 사직을 호소함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결국 홀가분하게 네로의 곁을 떠날 수 있게 됐으나, 은퇴 후의 삶은 그리 순탄하지 않았다.

세네카를 대신하여 그 자리를 차지한 정적들은 세네카가 피소의 음모에 가담했다고 고발함으로써, 황제로부터 자살 명령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 일로 인해 탁월했던 친척들까지 모두 한꺼번에 몰살을 당하고 말았다.

그는 죽음의 면전에서도 철학자다운 면모를 보였다고 한다. 의연하고 침착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다고 하니 말이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그의 묘지가 아피오 안타카(Appio Antica)에 있다니, 의아하지 않을 수 없다. 이곳은 자주 찾아갔던 장소이기 때문이다. 기회를 보다가 토요일 오전에 그곳을 찾았다.

날씨도 맑아 수많은 사람들이 이 호젓한 길을 걷거나 혹은 뛰고 있었다. 사진만 보고 찾는 일이기에, 갈 바를 모르고 무작정 걸어갔다, 시내 쪽으로 올라가야 하는지 아니면 반대쪽으로 가야 하는지 알 수 없어, 행인들에게 묻고 또 물어 보았다.

대체로 운동하는 사람들은 외국인이기에 세네카라는 이름은 알고 있으나, 그의 무덤이 이곳에 있다는 것은 금시초문이라고 눈만 껌뻑인다.  인터넷에 실려 있는 사진을 들여다보며 찾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드디어 동일한 모습의 무덤을 찾을 수 있었다. 얼마나 반갑던지! 아피아 가도 양쪽에 아직도 남아있는 무덤들 가운데 유명했던 사람들이 많을텐데, 여행자들을 위해 무덤의 주인과 그의 약력을 간단하게 표기한다면,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좋을까 싶다.

세네카에 놀란 점은, 그가 역대 최고의 부자였다는 점이다. 요즘 돈으로 6천억원 정도를 소유했다고 한다. 그가 그렇게 많은 재산을 증식할 수 있었던 이유는 브리타니아에 고이율로 투자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지나치게 높은 고율 이자를 받았고, 그 결과 부디카에 반란이 일어나는 동기가 됐으니, 스토아 철학자의 면모로 볼 때 그의 철학과 삶의 현 주소는 거리가 있다 하겠다. 고로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는 이런 사실을 비꼬기도 했다.

권력의 지근의 자리에 있었기에 돈을 벌 수 있는 기막힌 기회가 많았을 것이다. 권력의 내부로부터 오는 경우도 있었고, 외부로부터 즉 권력에 잇대기를 원하는 재벌들로부터 오는 유혹들도 비일비재했을 것이다.

얼마 전 법관들의 공직자 재산 신고를 보고 놀랐다. 어떤 판사는 2백억원 가까운 재산을 신고하였으니 말이다. 부잣집 딸과 결혼하여 부를 물려받기도 했겠고, 아니면 특권을 통해 부를 증식한 이들도 있을 것이다. 공무원 월급만으로 그 많은 재산을 증식하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네카는 그 많은 돈을 어떻게 관리했을 까 싶다. 당시 로마에서 부자는 황제의 표적이 되기 쉬웠다. 황제가 부자의 돈을 뺏는 방법 중 하나는 '국가 전복을 도모했다'는 올가미이었다. 그런 죄에 걸려들면 사형을 당하고, 모든 재산은 국가에 귀속되었기 때문이다.

고로 신하가 재물이 넘치게 되면 생존이 위태로웠다. 그런 사정을 알고 있는 세네카였을텐데, 왜 그리 탐욕에 빠지게 되었을 까 싶다. 그는 보통 사람이 아니라 소위 지혜자의 삶을 강조했던 스토아 철학자 아닌가!

그의 무덤위로 스산한 바람이 묘지 탑을 휩쓸고 간다. 무덤은 높이 2,5미터정도만 남았다. 붉은 색깔의 얇은 벽돌로 켜켜이 쌓았고 위에는 회벽으로 발랐다.

2천년 동안 그 자리에 꼼짝하지 않고 모진 풍상을 견디고 있노라 많이 피곤한 모습이다. 사람들도 눈길한 번 주지 않고 있으니 세네카는 세월의 무상 앞에 몹시 쓸쓸했겠다 싶다. 여기저기 무너져 내렸고, 분명 묘지의 주인에 대한 명패가 찬란하게 붙어 있었을텐데 지금은 흔적 없이 사라져 버렸으니 말이다. 마치 삶의 허무한 모습처럼....

그 많은 6천억의 재물은 어디로 갔을까? 그 큰 재산을 모을 때 집을 잃고 땅을 빼앗긴 무수한 사람들이 생겨났을텐데 말이다. 허무한 재물을 모으는데 시간과 정력을 소모하는 대신, 생계에 핍절함이 없는 정도만 소유했더라면 보다 많은 이웃들과 교제하며 수명을 다했을텐데 하는 마음이 일어난다.

힘이 있을 때 탐욕을 절제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니면 그 많은 재산을 고통당하는 이웃들을 위해 손을 크게 폈더라면, 후일까지 아름답게 그의 통 큰 선행이 박수를 받을 수 있었을텐데 말이다. 무덤의 탑도 당신 생각이 옳다고 박수를 치는 것 같다. 그러나 그런 기회가 주어진다면 과연 나는 그렇게 할 수 있을까?

한평우 목사(로마한인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