꼼짝할 수 없는 내게 오셔서 윤석언
꼼짝할 수 없는 내게 오셔서

윤석언, 박수민 | 포이에마 | 225쪽 | 13,000원

우리는 기적을 좋아합니다. 아니 기적을 바랍니다. 상황이 위급하고, 치명적인 결함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나 기적이라는 말은 결코 아름다운 말이 아닙니다. 기적을 바란다는 것 자체가 불행이기 때문입니다.

기적(奇蹟)의 정의를 찾아보니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 알려 줍니다. 상식이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범위의 일과 사건들입니다. 기적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일상을 무시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기적은 좋아해야 할 어떤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어떤 사람에게는 기적이 일어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떻게 해줄 수도 없고, 사람의 힘으로는 상황을 역전시킬 수 없는 열악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볼 때입니다. 윤석언 형제의 이야기를 읽고 처음 드는 생각이 '아~ 기적이 일어날 수 있다면'이었습니다. 그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습니다.

'전신마비 27년'. 짤막한 구절 속에 수많은 일상과 사건들이 겹쳐 있다는 것을 압니다. 손과 발, 몸을 전혀 움직이지 못하는 전신마비 환자를 생각하면 불행하다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행 너머, 그 한 사람을 돌보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수고가 없다면 생명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한 사람을 살려내기 위해 가족들의 필사적인 희생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것을 알고 있는 환우는 자멸감과 자괴감에 빠져 수도 없이 자살 시도를 합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지 않고 피해를 준다고 생각하면, 자신의 존재 의미를 스스로 버리려고 합니다. 그런 환우들과 함께 지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책을 읽는 순간 이러한 생각이 기우였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책의 저자이며 주인공인 윤석언 형제는 스물셋의 나이에 교통사고를 당해 전신마비 환자가 되었습니다. 그때가 1991년이었으니, 벌써 27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아이가 태어나 스물일곱이면 결혼도 할 수 있고, 꽃다운 청춘을 보낼 황금의 시간입니다. 그런데 윤석언 형제는 그 시간을 고스란히 침대에만 누워 있었습니다.

소개글만 간략하게 살펴보고, 손은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야 글을 쓰니까요. 손이 안 된다면 말이라도 하리라 믿었습니다. 말을 하면 누군가 대필하면 되니까요. 그러나 한 장 한 장 읽어나가면서, 마음이 한없이 무너졌습니다. 윤석언 형제는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손 하나 까딱하지 못하고, 몸도 움직이지 못하는 철저한 전신마비 환자였습니다. 그럼 글은 어떻게 썼을까요? 추천한 남종성 목사님의 이야기를 직접 옮겨 보겠습니다.

"이 책은 한 글자도 낭비될 수 없는 책입니다. 전신마비인 석언 형제는 특수 스티커를 붙인 안경을 쓰고 침대에 누워 컴퓨터를 사용합니다. 눈으로 자판을 치는 것입니다. 글자의 한 획도 아무렇게나 쓸 수 없는 사람입니다."

이 책은 탁월한 문장으로 자신의 마음과 생각을 드러내지는 않습니다. 사소하고 소소한 일상을 사실대로 표현한 글입니다. 자음 하나 모음 하나, 허투루 쓰지 않고 온 마음으로 담아냈습니다. 데이비드 리의 말처럼 이 책은 '하늘 동행의 속삭임'입니다.

1부와 2부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1부는 윤석언 형제의 병상 일기이고, 2부는 친구로 지내는 박수민 선교사가 윤석언 형제와 나누었던 일상과 메일을 옮겨놓은 글입니다.

책이 도착하고 이틀 만에 읽었지만, 서평하기가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일반 책처럼 서평하려니 제 마음이 허락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온갖 화려한 단어와 수사(修辭)로 채색하는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참을 책꽂이 한편에 두었습니다. 생각을 묵히고, 생각을 정리한 틈을 갖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보름이 지난 오늘이 되서야 책을 집어 들었습니다.

"누군가 올 때까지 가만히 기다려야 한다. 그 외에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없다(27쪽)".

손이 약간만 아파도, 다리가 삐끗하기만 해도 우리는 너무나 힘들어 합니다. 얼마 전 손에 가시가 박혀 힘든 적이 있었습니다. 작은 가시였지만 완전히 낫기까지 신경이 온통 아픈 손에 머물렀고, 행동 하나 하나가 불편해 숨이 막혔습니다.

작년부터 무릎 관절이 좋지 않아 조금만 걸어도 통증이 느껴져 잘 걷지 못합니다. 통증이 느껴져 올 때마다 왠지 모를 절망감이 저의 마음을 짓누르곤 합니다. 그런데 전신마비인 윤석언 형제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없습니다. 누군가 자신을 도와줄 때까지 무작정 기다려야 합니다.

석언 형제의 평균 혈압은 70/50입니다(30쪽). 조금만 건강 상식이 있는 분들이라면 이 숫자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것입니다. 그는 살아 있으나 죽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현재 신학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석언 형제가 좋아하는 손영진 사모의 '광야를 지날 때'를 들어보았습니다.

광야를 지날 때 시험을 당할 때
어려운 순간에 인내하라
주 너를 흔드사 감추인 어두움
드러내 주시리 인내하라

주 안에서 인내하라 기뻐하고 감사하라
주 네 방패되사 그 선하심으로
늘 함께하시며 지키시리

광야를 지날 때 시험을 당할 때
어려운 순간에 감사하라
모든 일 통하여 선을 이루시며
승리케 하시리 감사하라

주 안에서 인내하라 기뻐하고 감사하라
주 네 방패되사 그 선하심으로
늘 함께 하시며 지키시리.

꼼짝할 수 없는 내게 오셔서 윤석언
▲저자의 모습. ⓒ동영상 캡처
'어려운 순간에 감사하라', '인내하라 기뻐하고 감사하라', 이러한 고백들이 고통 중에 있는 이들에게 얼마나 힘이 드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힘들어하는 이들에게 '힘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진작 자신이 고통 중에 있을 땐 그러한 말들이 오히려 마음에 상처를 남길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석언 형제는 일상이라는 고통을 '감사의 계절(33쪽)'로 치환시키고 있습니다.

1. 지난 1년 동안 병원에 한 번도 가지 않았음을
2. 부모님과 동생 식구들이 건강하게 지낼 수 있었음을
3. 폐렴 없이 숨을 편히 쉴 수 있음을
4. 공부하는 동안 심한 욕창으로 고생하지 않음을
5. 입으로 먹고 마실 수 있음을
6. 신학공부를 통해 훌륭한 신앙의 친구들을 만나 교제할 수 있게 하심을
7. 이 큰 머리로 학업을 열심히 좇아갈 수 있는 열정을 유지시켜 주심을
8. 부양해야 할 자식이 없고, 잔소리하는 아내가 없음을
9. 주일마다 교회에 가서 예배드릴 수 있음을
10. 이러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 수많은 하나님의 천사들을 삶 속에 보내주심을....

감사, 석언 형제에 비하며 수천 수만 배의 감사 제목을 가진 제게, 감사는 망각된 단어처럼 가물가물합니다. 그래서 글을 쓰는 것을 내려놓고 감사 제목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남루한 재정 상태로 제 자신을 원망하지는 않았는지, 우여곡절을 겪어 오면서 삶을 비관하지는 않았는지 돌이켜 보았습니다.

비교하는 감사가 가장 하급의 감사라 했지만, 석언 형제와 비교하니 감사할 이유가 산을 이루고 바다를 이룹니다. 완전하지 않지만 그래도 쓸 만한 육체도 있고, 건강이 썩 좋지 않지만 다부지고 예쁜 아내가 곁에 있습니다. 혼자서 걸을 수도 있고, 말도 하고, 화장실도 누군가의 도움을 받지 않고 갈 수 있습니다. 십 년이 넘어 불안하긴 하지만 아직 잘 굴러가는 승용차도 가지고 있습니다. 가끔 말을 듣지 않아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게 하지만 건강한 아이들이 다섯이나 있습니다.

한없이 우울할 것 같지만, 석언 형제는 유머가 많고 개구쟁이입니다. 온 힘을 짜내 이야기하려다 말 대신 방귀가 나온 이야기, 간호사님이 가려운 곳을 긁어주자 자신도 모르게 침이 나왔다는 이야기를 서슴없이 합니다.

사고 나기 전 암벽 등반을 좋아했다는 석언 형제는 성격도 쾌활하고 건강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전신 마비에 걸린 사람이 맞는가 싶을 만큼 마음이 건강하고 밝습니다. 전혀 아프지 않은 사람과 마주 앉아 대화하는 것 같습니다.

책을 읽어 나가면서 불쌍히 여기고 싶은 마음이나 짠~한 생각들은 어느 새 사라지고, 석언 형제 곁에서 함께 웃고 있는 저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석언 형제에게 기적이 일어나게 해 달라고 기도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읽어 나갔습니다. 그런데 책을 덮고 나자, 기적은 석언 형제가 아니라 나에게 일어나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가졌음에도 감사할 줄 모릅니다. 그러니 기적이 필요한 사람은 석언 형제가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이 아닐까요? 언제 죽을지 몰라 이미 써놓은 유서를 보니, 천사가 따로 없다는 생각을 합니다.

책을 덮으며 한 가지 결심을 했습니다. 매일 감사 5가지를 적으려고 합니다. 열 가지 감사를 한 석언 형제에 비하면 부족하지만 시작하는 것으로 위로 삼고자 합니다.

책은 쉽게 읽힙니다.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라 무겁지 않습니다. 하지만 환우가 있는 가족이나 사람들이라면, 석언 형제가 하는 말 하나 하나가 가슴에 깊이 새겨질 것입니다. 평이하나 깊고, 단순하나 높은 전신마비 환우의 일상입니다. 감사를 잃어버리고 척박한 일상을 살아가는 모든 분들에게 추천합니다.

정현욱 목사
크리스찬북뉴스 편집인, 에레츠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