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닝
▲<버닝>의 한 장면. 인생의 참된 가치에 대한 무지와 방황은 오늘날 젊은 세대가 겪는 근본적인 심적 고통 가운데 하나다.

※본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다소 들어 있습니다. -편집자 주

◈초월의 열망: 온전한 존재, 온전한 삶을 향한 갈망

이창동 감독의 작품들은 관객들로 하여금 인생의 원초적이고 근원적인 의미를 고민해보게 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그래서 때론 무겁고, 때론 난해하며, 때론 서글프다. 마치 인간의 삶 자체가 그런 것이니 영화도 그럴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듯 하다. 비교적 염세적인 분위기가 그의 작품 전반을 지배하고, <버닝> 역시 연장선상에 있다.

소설가 출신으로서 영화라는 대중적 미디어에 깊이를 담아내려는 그의 노력을 지켜보자면, 문학에 철학을 담아내려던 사상가들의 모습, 특히 사르트르나 카뮈 등 실존주의 문필가들의 모습이 연상된다. 이창동 감독의 작품은 인간의 실존에 대한 무겁고 진중한 여운을 남긴다는 점에서 사르트르의 소설 <구토(La Nausée, 1938)>나 카뮈의 소설 <이방인(L'Étranger)>과 닮아 있다.

사르트르나 카뮈의 소설 속에서 대중성을 기대하기란 무리다. 일반적인 입장으로 볼 때 참으로 허무하고 난해하다. 그렇지만 그 허무함의 난관을 고통스레 감내하고 작품을 다 읽어낸 이들에게 "나는 왜 사는가?"라는 진중한 물음을 곱씹을 수 있는 기회를 선사한다. 그리고 이런 이유로 인해 명작으로 평가된다.

<버닝> 역시 그런 관점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영화를 볼 때보다 보고 나서 더 생각에 남는 작품이다. 그런데 이런 류의 작품들 속에는 항시 인간의 삶 깊은 층위로부터 유발되는 '종교적' 갈등이 관여된다. 사르트르나 카뮈는 무신론자였다. 이창동 감독 역시 그 작품 세계를 보면 무신론적 입장을 고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작품 속에는 인간의 종교성의 문제가 어김없이 다뤄지고 있다.

버닝
▲해미가 사는 집에서 본 풍경. 남산타워가 한눈에 보이는 용산구의 한 허름한 주택. 비루한 삶 가운데 어떤 고결하고 높은 것을 바라보는 해미의 심정을 표현한다.
여기서 인간의 종교성이라 할 때는 외견상 어떤 특정한 신앙의 형태를 드러내 보이는 것만을 말하지는 않는다. 종교학자들은 특정한 교의나 신앙의 형태, 혹은 종교 전통 이전에 인간이 본원적으로 갖고 있는 초월에 대한 의식과 갈망을 지목해 종교성이라 명명한다.

이들의 관점으로 보면, 종교성이란 인간이 삶의 난관과 고난을 겪으면서 갖게 되는 온전함과 완전성에 대한 열망으로부터 나온 것으로 파악된다. 무지, 질병, 고난, 죄악, 그리고 종국적으로는 죽음까지 인간의 삶에 결부된 숱한 부정적 요소들로부터의 해방과 자유에 대한 열망이 초월을 지향하는 인간의 근원적 종교성 이면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 종교학자들의 해명이다.

<버닝>의 서사를 이끌어가는 인물은 종수(유아인 분), 벤(스티븐 연 분), 해미(전종서 분) 이 세 사람이다. 이 셋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자신들을 옭아매는 삶의 굴레로부터 초월을 시도한다. 셋 모두 초월을 바라지만, 그 의미는 서로 다르게 규정된다. 그리고 그 다름으로부터 유발되는 갈등은 결국 서로가 서로를 죽이고 한 사람만 허무하게 살아남는 파국을 초래한다.

<버닝>의 파국적 결말을 보면서, 인간의 종교적 열망에 대해 이창동 감독이 갖는 애증과 같은 태도를 엿볼 수 있었다. 그의 작품은 전편에서 언급했듯 난해한 듯 치장되어 있으나, 사실 명료하고 단순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버닝>은 인간의 초월 욕망이 얼마나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런 종교적 열망이 인간의 삶을 얼마나 생동감 있게 만들어 주는지도 확인시켜 준다.

삶에 운명처럼 깃들어 있는 거부할 수 없는 이런 근원적인 열망을 어떻게 통제할 수 없어 고민하고, 마음 아파하고 결국 살인까지 이르는 오늘날 젊은 청년들의 모습, 감독은 이를 보여주려 하는 듯 하다. 자기에게 주어진 삶의 굴레 안에서는 결코 실현될 수 없는 고결한 존재적 가능성, 그렇지만 마음 깊숙한 곳에 항상 자리잡아 마치 희망고문과 같이 인간을 끊임없이 괴롭히는 이 온전함과 자기-초월의 가능성 앞에서, <버닝>의 세 주인공은 기뻐하는 동시에 좌절한다.

◈초월의 몸짓: 원시부족의 자기-초월 제의로서 춤과 사냥

해미는 작중 자기-초월 열망을 가장 '종교적으로' 표현하는 인물이다. 나레이터 모델 아르바이트로 연명하며 카드 빚에 쫓겨 사는 그녀는 자신에게 닥친 리틀 헝거(경제적 빈곤)에도 불구하고, 그레이트 헝거(삶의 참된 목적과 가치의 결여)를 끌어안고 의식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녀가 전혀 넉넉지 않은 형편에도 불구하고 아프리카 여행을 결심한 이유도, 바로 이런 삶의 목적 및 의미의 부재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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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동 감독과 전종서(해미 역). 전종서는 나레이터 모델로 근근이 살아가는 가운데 초월을 꿈꾸는 해미의 삶을 연기했다.
해미가 아프리카에서 기대했던 바는 바로 원시부족적 삶의 모습을 유지하며 살고 있는 칼라하리 사막의 부시맨(Bushman)을 만나는 것이다. 해미가 종수에게 설명한 리틀 헝거와 그레이트 헝거라는 개념 역시 그들로부터 나왔다. 그리고 해미는 작중 실제 아프리카로 가서 부시맨을 만나고, 그들과 대화하며 그들의 제의 형식인 몰아지경 상태에서 추는 춤(trance dance)을 배워온다.

통상 서구에 부시맨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산(San)족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민족 가운데 하나로, 대대로 아프리카 남부에서 거주해 오다 아프리카의 반투(Bantu)족, 츠와나(Tswana)족, 남아공 백인 이주민 등에 의해 척박한 사막으로 쫓겨나 살고 있다. 이들은 외부의 침입자가 몰려올 때 저항보다는 타협과 순응을 선택했고, 전통적인 삶의 방식을 고수했다. 그리고 그 결과 빈곤과 질병에 취약한 사막의 환경 속에 살아가고 있다.

이들 대다수는 보츠와나의 중앙 칼라하리 사막에 거주해 왔는데, 근래 그들이 살아가고 있는 사막에 대량의 다이아몬드가 매장된 사실이 알려지며 사막에서조차 터전을 잃고 대다수가 기아와 탈수로 고통받거나 난민캠프로 쫓겨나 살고 있다. 일부는 관광객들에게 원시적 삶의 모습을 보여주며 대가를 받는 재연 배우로 살고 있다.

어쩌면 전 세계에서 가장 극한 리틀 헝거와 그레이트 헝거로 고통받고 있는 이들이라 볼 수 있다. 물리적으로 생존 자체가 위협받고 있을 뿐 아니라, 외부의 모든 이들로부터 이물질 취급을 당해 존재가치 자체를 부정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버닝
▲아프리카 칼라하리 사막에 거주하는 원시부족 부시맨의 제의인 춤.
해미는 이런 가운데서도 자신들의 원시부족적 삶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부시맨들이야말로, 참된 고난 속에서 그들만의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찾아가는 자기-초월의 모범이라고 여기는 듯하다. 그래서 아프리카로 건너가 그들이 초월 경험을 위해 채택한 방법, 즉 춤을 배워온다. 해미가 배운 춤은 산족 고유의 샤머니즘 종교 제의로서, 주로 병든 이의 치료를 위해 부시맨 원주민 주술사들이 추던 춤이다.

한국으로 돌아온 해미는 친구인 종수, 그리고 아프리카에 만난 낯선 남자 벤 앞에서 노을을 배경으로 그녀가 배운 이 초월의 몸짓을 선보인다. 마치 조금은 자기 삶이 온전해진 것 같지 않냐며 자랑하려는 듯. 그러나 이 춤에 대한 종수와 벤의 반응은 뒤틀려 있다. 종수는 해미에 대한 일종의 소유욕 때문에, 벤은 해미의 초월을 번제물 삼아 자기-초월을 이루려는 욕망 때문에 해미의 초월을 향한 몸짓을 온전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이창동 감독은 산족 종교로부터 춤이라는 제의와 함께 사냥이라는 생존 방식을 영화의 모티프로 삼는다. 산족 종교는 사냥한 동물 가운데 특별히 영양(eland)의 기름을 신의 생명이 담긴 것으로 여겨 제의에 활용한다. 특히 장례식 때 이 영양 기름을 사용한다. 이 사냥과 장례 모티프는 벤에 의한 해미의 죽음, 그리고 종수에 의한 벤의 죽음에 반영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버닝
▲해미를 사냥한 자 벤, 그리고 그 벤을 다시 사냥한 자 종수.
벤은 부족할 것 없는 삶이 주는 무료함에 지쳐 자신에게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여성들을 사냥하듯 했고, 종수는 벤이 해미를 사냥한 데 격분해 벤을 사냥한다. 벤은 재미로 일삼는 사냥을 자기 삶의 굴레를 분쇄하는 초월의 제의로 삼고, 종수는 자신에게 그레이트 헝거를 일깨워준 소중한 친구이자 연인을 사냥한 자를 사냥함으로써 자기의 지긋지긋하고 비루한 인생으로부터 초월을 시도한다.

원래 종수는 해미가 겪고 있는 그레이트 헝거를 봉인하고 살아가고 있었다. 삶의 의미 및 온전한 가치 문제로 고민하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을 것 같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종수의 삶은 망가져 있었다.

제대로 된 부모 노릇을 하지 못하는 역기능적인 가정, 대학에서 배운 바(문예창작과 출신)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택배 배달원으로 거의 날품팔이처럼 살아가는 처지에서, 삶의 고결함과 의미를 찾는다는 것은 분노만을 유발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 종수에게 분노가 아닌 삶에 대한 애정으로 자기-초월을 시도할 수 있게 도와준 이가 해미다. 그리고 그런 해미를 파괴한 이는 벤이다. 종수는 보다 온전한 방식으로 자기 종교성을 표현할 기회였던 해미의 삶을 박탈해 버린 벤을 사냥함으로써, 결국 원래 종수의 삶에서 나올 수밖에 없을 법한 분노와 자기파괴의 초월을 감행한다.

◈초월과 방황: 종교성을 표현할 모범이 사라진 시대

결국 감독이 <버닝>에서 전하는 메시지는, 우리 인간의 원초적 종교성이 삶에 희망과 생명력을 선사하는 동시에 파괴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국 사회가 이런 종교성을 어떻게 표현하고 다뤄야 할지 가르쳐줄 힘을 상실했다는 점 역시 지적하고 있다.

종교에 대한 이런 태도는 이창동 감독의 작품들을 통해 꾸준하게 유지되고 있다. <박하사탕>의 홍자(김여진 분), <밀양>의 신애(전도연 분), 그리고 <버닝>의 해미를 통해 유형화된, 종교에 대한 이런 비관적이면서 비판적인 메시지는 오늘날 한국 사회 전반에 대한 심층적 비판의식을 반영한다.

버닝
▲고된 삶 속에서 초월에 대한 희망고문으로 기뻐하는 동시에 절망하는 젊은 세대에게 기독교인들은, 그리고 종교계는 어떤 해답을 줄 것인가? 영화 <버닝>이 던지는 질문이다.
<버닝>의 세 주인공은 각자의 방식으로 자기-초월을 시도한다. 그리고 그 종국은 허무한 파국이다. 이 피할 수 없는 종교성을 보다 온전하게 감내할 방법은 없을까?

<버닝>은 바로 이런 문제의식이 기독교계를 비롯한 종교계에서 진정 고민해야 할 바임을 훈수하는 듯 하다. 교세 확장과 이권 다툼 외에 제대로 한 일이 무어냐는 우회적 비판이기도 하다. 획일적 교의에만 천착해 삶의 현장에서 겪는 고민과 절망과 분노를 외면하는 경직된 제도화에 대한 질타이기도 하다.

물론 <버닝>에서 볼 수 있는 오늘날 젊은이들의 초월을 향한 '종교적' 방황이 순전히 기독교를 비롯한 기타 기성종교의 무능 탓만은 아니다. 그보다는 실존철학적 성찰을 바탕으로 종교의 다원성, 가치의 다원성을 부르짖는 오늘날의 '포스트모던한' 세태 역시 한몫하고 있다.

<버닝>은 어떤 가치를 찾아야 할지, 어떤 방식으로 우리의 근원적 종교성을 일깨우고 표출해야 할지, 적절한 해답은 주지 못하고 있다. 아울러 진보적 정치색이 깃든, 이창동 감독 특유의 염세적으로 고착된 인간이해 때문인지, 오직 자기파괴적인 방식으로만 진정으로 개별화된 자기 인생을 살게 되는 인간 군상을 그리고 있다. 이로 인해 그가 우리 사회 전반과 종교계에 던지는 물음 가운데는 상당한 수준의 편향적 태도가 엿보인다.

그렇지만 적어도 삶의 참된 가치를 초월에서 찾으려 하는 근원적 종교성에 대한 고찰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독교적으로 눈여겨볼 만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젊은이들은 어디에서 자기를 초월하는 희망을 찾는가?" 이 물음은 우리 기독교인들 역시 고민해봐야 할 문제임에 틀림이 없다.

박욱주
▲박욱주 박사.
박욱주 박사(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 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냈다면 쉽게 공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