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악함인가 약함인가?

종종 악(惡)함과 약(弱)함은 한 끗 차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이는 결코 악의 기준을 느슨하게 만들기 위함이 아닙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타인의 행위를 쉽게 단죄하는 것에 대해 재고하자는 뜻입니다. 타인의 행동에 대해 열린 마음으로 보면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며 공감해줄 만한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문제가 되고 있는 소음 문제 역시 단적인 예일 수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층간 소음 문제 때문에 단순한 말다툼을 넘어 살인에까지 이르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층간 소음문제를 제기하는 이들에 대해 "이웃 간에 대충 참아주고 살지 뭘 그런 사소한 것들로 문제를 일으키나?"고 말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닐 수 있습니다.

이들은 특정한 소리에 흥분하는 변연계(limbic system)를 '전두엽(frontal lobe)'이 다독이고 통제하는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해 생기는, 소위 '미소포니아(misophonia) 증후군(선택적 소음 과민 증후군, 혹은 청각과민증)'환자들입니다. 그들에게는 그런 소음이 고문에 가깝습니다.

또 식사 때 타인의 음식 씹는 소리를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오죽 하면 그 소리를 피하려고 늘 혼자 식사를 할 정도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주위로부터 괴팍한 사람들로 낙인찍히고, 자기 스스로도 그런 자신이 별종 같이 느껴져 싫습니다. 만일 자신이나 주위 사람들이 그것이 '미소포니아(misophonia)증후군'이라는 일종의 질병인 것을 알게 되면, 그것을 좀 더 너그럽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신경이 무딘 사람들에게는 웬만한 소음도 대수롭지 않을 수 있지만, '미소포니아(misophonia)증후군' 환자들에게는 사소한 소음도 견딜 수 없는 고문이 됩니다. 역사적 인물들 중에도 이런 증후군(Syndrom) 을 가진 사람들이 더러 있었습니다.

그 중 압권은 <의상 철학(衣裳哲學, Sartor Resartus)>, <프랑스 혁명사> 등의 저자 토마스 칼라일(Thomas Carlyle, 1795-1881)입니다. 그는 저술에 방해를 주는 주위 소음을 막기 위해 방 사방에 옹벽을 칠 정도로 소리에 예민했습니다.

아랫집에서 키우는 작은 새가 밤에 가끔씩 소리를 내는 날이면, 그는 영락없이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습니다. 그런 칼라일은 주위 사람들로부터 괴팍스러운 별종으로 낙인 찍혔을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원인과 동기가 어떻든, 사람들의 이런 괴팍스러움과 까탈스러움은 사람들 사이에서 다툼과 불화를 일으키며, "관용하며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내라(딛 3:2)"는 성경의 가르침과 명백히 배치되는 악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들이 그들에게서 까탈스러움만을 보는 것과는 달리, 그 속에 숨겨진 약(弱)함도 간과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죄를 용서하기를 즐기시는 것은(시 86:5), 악(惡)함 속에 감춰진 우리의 약(弱)함을 긍휼히 보시기 때문입니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시 103:12-14)".

◈아버지의 눈인가 재판관의 눈인가

율법은 공명정대하여 그 어떤 예외 규정도 허용하지 않습니다. "행하면 살리라(레 18:5)", "죄의 삯은 사망(롬 6:23)"이라는 율법의 엄중성은 아담의 원죄를 타고난 모든 인류에게 예외 없이 적용됐습니다.

타락이 '율법의 범함'이었듯, 구원 역시 '율법의 성취', 곧 그리스도의 대행과 대속으로 됐습니다. '인간의 타락과 구원은 율법의 어김과 성취'라는 공의적 경륜과 맞물려 있습니다. 불완전한 아담에게서 시작된 율법의 요구가 율법의 마침이신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된 것은(롬 10:4) 당연한 수순입니다.

그러나 율법의 엄중성과 공명정대함과는 달리, 율법의 범법(犯法)인 죄에 대한 체감(體感)은 주관적 입장에 따라 경하게도 중하게도 느껴질 수 있습니다. 물론 이는 율법 자체의 엄중성엔 하등의 영향을 줄 수 없는, 말 그대로 율법과 죄에 대한 체감(體感)일 뿐입니다.

예컨대 타인의 사소한 범법은 크게 보이지만, 사랑하는 자식의 중대한 범법 행위는 부모의 눈엔, 그저 철부지의 개구진 행동으로 보이는 것과 같습니다. 부모는 그의 자식이 본래 착한 아이인데 친구를 잘못 만나서 혹은 부모인 자신이 교육을 잘못시킨 탓으로만 한(恨)합니다.

택자의 허물에 대한 하나님의 안목도 자식 사랑에 눈먼 부모의 안목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류가 '원죄'와 '자범죄'에 대해 심판받는 것을 당연시했지만, 그의 사랑 안에 있는 택자들의 죄에 대해서는 정죄 이전에 긍휼이 그의 눈앞을 가립니다.

하나님은 택자들의 죄에 어쩔 수 없이 징계하시지만 징계로 아파할 그들에 대한 연민에 마음이 녹습니다(사 1:5). "내가 저희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저희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 8:12)고 하신 말씀 그대로입니다.

'하나님이 불의를 긍휼히 여긴다'는 말씀이 공격자들에겐 기독교를 '불의'까지 동정하는 무도(無道)한 종교라고 공격할 빌미가 될지 모릅니다. 그러나 택자의 불의에 대한 하나님의 연민이 결코 택자들에게서 율법적 요구를 면제시킨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대속에서 율법의 요구를 받아내셨기에, 택자의 불의에 대해 긍휼을 흩뿌릴 수 있었습니다. 택자나 불택자나 다 율법으로 말미암은 사망의 정죄 아래 있었지만, 불택자는 영벌로 마감됐고 택자는 긍휼을 입어 영원한 하나님의 의(義)와 영생(딛 3:7)을 얻었습니다.

택자에 대한 이런 하나님의 자비는 당연히 편애로 보입니다. 아니 사실 하나님 사랑은 편애이며, 성경은 하나님의 편애를 말하는 구절들로 넘쳐납니다. "내가 땅의 모든 족속 중에 너희만 알았나니(암 3:2)",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롬 9:13)". 아니 단지 편애 정도가 아니라 택자를 위해 불택자를 희생시킬 정도로, 하나님께는 택자가 전부입니다.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의 대신으로 주었노라(사 43:3)".

구원 예정(predestination) 역시 택자에 대한 하나님 편애를 상징합니다. 사람들이 예정 교리(predestinarianism)를 거부하는 것은 구원을 평등 원리로만 접근하고, 하나님의 편애를 알지 못한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편애(favoritism)를 수용한 자만이 하나님의 구원 예정을 인정할 수 있습니다.

◈사랑의 징계냐 심판의 유기(遺棄)냐?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이 잘못할 때 징계하십니다. 때론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죽음도 불사할 만큼(고전 5:5, 히 3:17) 그들을 심하게 징치하시지만, 그럼에도 결코 그들을 버리는 법은 없습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을 내다보시고 예수님이 우셨던 것은, 그들이 받을 징계가 얼마나 혹독한 것인가를 말해줍니다. 그럼에도 그것은 결코 유기적(遺棄的) 심판이 아닌 사랑의 징계였습니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날이 이를찌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눅 19:41-44)".

이 예수님의 모습에서, 눈물을 머금고 자식을 초달하는 부모의 심정을 봅니다. 이렇게 때론 그의 자녀들을 무섭게 징치하시는 하나님이시지만, 결코 그들을 버리시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 손으로 고치시나니(욥 5:18)", "여호와께서는 그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시며 그 기업을 떠나지 아니하시리로다(시 94:14)", "너는 나의 종이라 내가 너를 택하고 싫어버리지 아니하였다 하였노라(사 41:9)".

성경에서 하나님과 일시적인 관계를 맺다가 버림을 당하는 이들이 등장합니다. 예컨대 가롯 유다(행 1:25), 가인(요일 3:12), 에서(히 12:17) 같은 이들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그냥 하나의 종교인이었을 뿐, 처음부터 하나님과 무관했습니다. 사실 그들은 본래부터 유기된 자들이었기에 새삼 버림받을 일도 없었습니다. 그냥 본래의 가라지 자리로 돌아간 것뿐입니다.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주여 주여" 하는 자들 중에, 하나님이 모른다 할 이들이 있을 것을 말씀했는데(마 7:21), 그들은 한때 택함을 받았다가 유기된 자들이 아닙니다. 그들 역시 처음부터 하나님을 "주"로 부르는 종교 숭배자였을 뿐,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하나님 아들은 아니었습니다(마 7:21).

어느 날 갑자기 택자 아들이 유기(遺棄)된 불택자로, 혹은 유기된 불택자가 택자 아들로 바뀌지는 법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어느 날 갑자기 징계가 유기로 혹은 유기가 징계로 바뀌는 일도 없습니다. 징계는 아들이 받는 것이고(히 12:6-8) 유기(遺棄)는 불택자가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평생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연합 속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그리스도를 구주라 부르며, 내주하는 성령의 임재와 인도 속에서 살았던 성도가 어느 날 갑자기 다 무(無)로 돌려진 채, 재판장 앞에 심판받을 죄수로 전락될 순 없습니다.

아버지었던 분이 어느 날 갑자기 그를 지옥에 유기할 재판장으로 돌변할 수 없습니다. 그가 아버지였다면, 그는 아들을 결코 유기에 이르도록 방치하지 않으십니다. 아버지는 그 전에 아들을 징계로 고칩니다. 그것이 아버지이십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종교 교주로 믿습니까, 아버지로 믿습니까?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쉽게 풀어 쓴 이신칭의(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