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승
▲정호승 시인이 새에덴교회 인문학 강좌에서 강연하고 있다. ⓒ김진영 기자
우리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가치는 무엇일까? 많은 이들이 돈을 좇는 시대. 언제나 존재의 본질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려는 시인(詩人)은, 그러나 돈 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있다고 했다. 바로 사랑이다. 그리고 고통이다.

사랑은 그렇다 쳐도 고통이라니. 이토록 어긋나 보이는 두 단어가 실은 하나라는 이 시인은 다름 아닌 정호승이다. "울지마라/외로우니까 사람이다.../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것..."('수선화에게' 中) 그러고 보니 그는 언제나 사랑을 노래했구나. 사랑이 있으니 외로웠던 것을....

정호승 시인이 19일 새에덴교회(담임 소강석 목사) 인문학 강좌에서 '내 인생의 가장 소중한 가치는 무엇인가? 사랑과 고통의 본질과 이해'라는 주제로 약 2시간 동안 강연했다.

소강석 목사는 "인생 자체가 시다. 인생을 시작하며 사람은 누구나 시를 쓰고 노래를 한다"며 "그런데 시는 논리이기 전에 존재다. 논리가 앞서면 다투고 분쟁하지만, 시는 소통한다. 오늘 이 시간, 시로 현대인의 멍든 가슴을 어루만져 온 시인과의 깊은 교감과 소통의 시간이 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사랑하는 이여 떠나라, 떠나서 돌아오지 마라

정호승 시인은 먼저 자신의 시 '여행'을 예로 들었다.

"사람이 여행하는 곳은 사람의 마음 뿐이다/...그러니 사랑하는 이여 떠나라/떠나서 돌아오지 마라/...사람이 여행할 수 있는 곳은 사람의 마음 설산뿐이다"

"결국 사람은 이 세상을 살면서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고, 그들과 사랑하며 살아가는 존재"다. 그러니 사랑하지 않고, 사랑받지 않고 살 수 없는 게 바로 인간이라고 그는 말했다. "삶이란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 위한 얼마간의 자유시간이다."(피에르 신부)

그런데 그 사랑을 찾아 떠나는 여행은, 마치 설산을 오르는 것처럼 견디기 힘든 일이다. 고통스럽다. 하지만 그것이 어렵다고 떠나지 않으면, 마침내 사랑할 수 없다. 그래서 시인은 말한다. "사랑하는 이여 떠나라/떠나서 돌아오지 마라"

용서

그런데 사랑의 결핍은 어디에서 올까? 우리의 삶은 왜 고통스러운가? 정호승 시인은 용서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용서하지 않고는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는 까닭이다. "마치 철없던 우리를 끊임없이 용서했던 어머니처럼, 그리고 돌아온 탕자를, 아직도 상거가 먼데 달려나가 그를 가슴에 품고 눈물을 흘린 아버지처럼."

시인은 지난날 끊임없이 번민했다. “용서하지 못해서, 그 미움과 증오로 인해 고통스러운데, 이것이 과연 가치 있는 일일까?” 그러던 어느날, 그는 대낮에 길을 걷다가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문득, 별이 보이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그렇다고 저 하늘에 별이 없는 건 아닌데... 그렇다. 별은 어둠 속에서 빛난다.

"내 인생에 사랑이라는 별도 미움과 증오라는 어둠을 통과해야만 빛나는 것이구나!"

하지만 어떻게 용서할 수 있을까? “머리로는 알았지만 마음으로는 잘 되지 않았다”는 정호승 시인. 그는 네덜란드의 화가 렘브란트(1606~1669)가 그의 인생 마지막 순간에 그린 '돌아온 탕자'를 통해, 용서의 길을 조금이나마 보았다고 했다. 조건이 없는 그 무한한 사랑을.

사실 이성의 눈으로 보면 돌아온 탕자는 그가 저지른 행동에 책임을 져야 마땅하다. 아버지의 유산을 탕진해버렸으니, 굶어죽는다 한들, 그 누가 그를 구원할 수 있으리. 어쩌면 아버지 곁을 지킨 첫째 아들의 그 불편했던 심정이 너무 당연한 것 아닌가? 하지만 정호승 시인은 나이가 들어서야 비로소 깨달았다고 했다. "사랑은 불공평함으로 완성된다"는 걸.

"만약 아버지가 공평했다면 둘째 아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 굶어죽었겠지요."

새에덴교회
▲정호승 시인의 인문학 강좌에 많은 이들이 참석해 큰 관심을 보였다. ⓒ김진영 기자
인생이라는 빵의 두 가지 재료

그러면서 시인은 "관계가 힘들 때 사랑을 선택하라"는 헨리 나우웬의 말을 인용했다. "사람은 누구나 관계의 그물망 속에 있습니다. 그 관계가 힘들 때, 여러분은 무엇을 선택하십니까? 저는 그 때마다 미움과 증오를 선택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이젠 사랑을 선택하려 노력합니다."

천년 바람 사이로/고요히/폭설이 내릴 때/내가 폭설을 너무 힘껏 껴안아/내 팔이 뚝뚝 부러졌을 뿐/부러져도 그대로 아름다울 뿐/아직/단 한 번도 폭설에게/상처받은 적 없다

정호승의 시 '설해목(雪害木)'이다. 우리 인간은 눈이 쌓여 가지가 꺾인 나무에 설해목이란 이름을 붙였지만, 정작 나무는 단 한 번도 폭설에겐 상처를 받은 적이 없단다. 다만 너무 사랑해 힘껏 껴안아 팔이 부러졌을 뿐.

정호승 시인에게 이처럼 관계는 사랑이고, 사랑은 또한 고통이었다.

"누구나 고통이 없기를 바라지만, 고통은 생명입니다. 고통이 없으면 사랑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죠. 그렇기에 고통은, 소설가 박완서 님의 말처럼,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견디는 것입니다. 저도 고통이 없었다면 시를 쓸 수 없었을지 모릅니다. 누구나 그럴 겁니다. 저마다 지고 있는 십자가가 있는 까닭에. 그 십자가는, 모양은 조금씩 다를지라도, 다 같은 무게입니다. 그러니 남과 비교하지 말고, 그 십자가를 품에 안고 가세요....

인간은 인생이라는 빵을 만들어 그걸 먹으면서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또 남은 인생을 위한 빵 만들어 그걸 먹어가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빵을 만드는 데 꼭 필요한 두 가지 재료가 있어요. 이게 들어가지 않으면 인생의 빵은 결코 만들 수 없습니다. 무엇일까요? 바로 사랑과 고통입니다. 그래서 인생의 가장 소중한 가치는 사랑이고, 그래서 우리 인생에 고통이 존재합니다. "

한편, 국내를 대표하는 서정시인인 정호승은 198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이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했다. 시집 『슬픔이 기쁨에게』 『서울의 예수』 『별들은 따뜻하다』 『새벽편지』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등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소월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동서문학상, 편운문학상, 가톨릭문학상, 상화시인상, 공초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이날 소강석 목사는 "정말 정호승 시인님이야 말로 이 시대를 푸른 바다로 만드는 한 마리 고래와 같은 시인"이라며 "그의 시들은 고래가 바다 위로 치솟아 바라보는 별들처럼, 메마른 우리 가슴을 사랑과 꿈과 희망으로 반짝이게 하고 있다"고 그를 소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