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마 17:17)."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 17:20)."

그리스도의 변용
▲그리스도의 변용, 라파엘로, 1516-20년, 목판에 유채, 바티칸 미술관 소장.

라파엘로 산치오 다 우르비노(Raffaello Sanzio da Urbino)

이탈리아 르네상스 3대 거장 중 한 명인 그를, 그 중에서도 전설이라 부르고 싶다.

그는 천재들인 레오나르도 다빈치나 미켈란젤로보다 나이는 어렸지만 어깨를 나란히 한 화가였으며, 동시대에 활동한 미켈란젤로와는 라이벌 아닌 라이벌 관계였다.

더욱이 그는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호탕한 성향에 외모까지 호감형이었다. 그에 반해 미켈란젤로는 폐쇄적이고 고집불통이었기에 더욱 비교가 된다. 그러니 당대에 그의 인기가 어떠했을지 상상이 되고도 남는다.

'르네상스의 절정기, 그 정점에 서 있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에 비견되거나 그들을 넘어 서는 예술가가 더 이상 나오겠는가?' 라는 질문에 "당연하지, 바로 나요"라고 대답을 하듯, 그의 그림은 두 사람의 영향을 받은 듯 보이지만 그만의 밝고 우아한 작품세계를 선보인다.

'그래, 그가 천재라는 것은 인정하겠다. 그런데 전설이라 불릴 만큼은 아니지 않나?' 라고 고개를 갸우뚱할 수도 있겠다. 그러면 지금부터 그가 왜 전설인지 설명하겠다.

실력만으로는 전설로 회자되기에 부족하다. 천재가 전설이 되려면, 사람들의 입에서 탄성이 나올 만한 독특한 스토리가 입혀져야 한다. 라파엘로에게는 앞선 두 사람이 갖지 못한 두 가지의 스토리가 있다.

그는 두 사람과 달리 37살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68세, 미켈란젤로는 무려 90세를 살았다.) 라파엘로는 1483년 4월 6일에 태어나, 1520년 4월 6일에 사망했다.

혹시 눈치를 챘는가? 그를 전설로 만든 첫 번째 스토리는 그가 세상에 태어난 날과 세상을 떠난 날이 같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생일날 죽었다. 그리고 여기에 두 번째 스토리가 덧붙여지는데, 바로 죽는 순간까지 그림을 그렸고, 완성되지 못한 유작을 남겼다는 것이다.

엄청난 실력과 호감을 주는 성향, 그리고 잘생긴 외모까지 갖춘 천재 예술가, 그런 그가 젊은 나이에 그림을 그리다 자신의 생일날 요절하여 유작을 남긴다.

어떤가? 이 정도의 천재적인 실력과 스토리를 가지고 있는 인물이라면, 천재들 사이에서도 전설이라 불릴 만 하지 않은가?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리에게는 레오나르도 다빈치나 미켈란젤로에 비해 라파엘로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오늘은 독자들에게 라파엘로와 그의 그림 한 점을 소개하고 싶다. 필자만의 상상력이 덧입혀진 이야기로 말이다. 오늘의 칼럼은 바로 라파엘로의 그림에 대한 필자의 상상력이 가미된 감상평이다.  

'그리스도의 변용'은 라파엘로의 마지막 작품이자 그의 유작이다. 그는 이 그림의 80%를 그린 후 세상을 떠났다. 나머지는 그의 제자 '로마노'가 완성했다고 한다.

그림의 주제는 성경에서 기록하고 있는 사건에 기초해 있다. 그 내용 중 마태복음에 있는 예수님 말씀을 칼럼 앞부분에 옮겨놓았다. 그리고 그 말씀은 왠지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것에 대부분 동의할 것이다.

자, 그럼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풀어보자. 라파엘로는 이 주제에 어떤 생각을 담아 그려갔을까? 이 그림이 자신의 마지막 작품이라는 것을 모르고 그리기 시작했을까? 개인적으로 그렇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과학적으로 검증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사람들은 자신이 죽을 때를 어느 정도 느낀다고 한다. 라파엘로는 자신이 죽을 날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 않았을까? 그래서 성경에 기록된 이 말씀을 떠올리며 스토리를 담지 않았을까? 그리고 자신의 마지막 혼을 불태우며 작업에 전념하지 않았을까?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자. 지금부터 세 가지 시선을 통해 이 그림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 한다.

◈아래 부분에 혼잡하게 모여 있는 사람들의 시선

라파엘로는 마태복음 17장 14절 이후 기록된 귀신들린 아이를 고치려는 제자들과 주변 사람들의 모습을 예수님의 변화된 모습이 기록된 말씀(마 17:1-8)과 동시에 일어난 하나의 사건으로 그려내고 있다. 빛과 어둠의 대조를 통해 이는 더 극대화된다.

자, 이제 사람들의 모습을 보자. 대부분의 시선이 귀신들린 아이를 향해 있다. 혹은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여러 모습과 시선으로 엉켜있는 듯 보인다. 그런데 왼편을 보면 두 사람이 산 위를 가리키고 있다. 하지만 서서 가리키는 사람의 시선은 사람들을 향해있다. 약간 주저앉은 듯 보이는 사람은 산을 올려다보는 듯 보이나, 내 눈에는 정확하게 시선이 어디로 향하는지 불분명하다.

하여튼 이들은 산 위를 가리키며 이렇게 외치고 있다. "이봐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야! 저 위에 산을 보라고!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저기를 보라고!"

그러나 그의 외침은 사람들에게 전혀 들리지 않는 듯 하다. 사람들은 벌어지고 있는 지금의 사건에 집중돼 있다.

예수님의 이름, 성부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 아이를 고치는 일을 하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그 일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기에 더욱 매몰되어 있다. 주변 사람들도 동일하게 이 사건에 매여 있다. 현실은 혼란스럽고 혼잡하다.

지금 우리가 이렇지 않는가? 나의 시선을 어디에 두고 있는가? 정말 바라봐야 할 것을 보고 있는가? 혼란스러운 현실에 매몰되어 정작 기준이 되는 주님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저 그림의 사람들처럼 예수님께서 변화되신 그 중요한 순간과 영광스러운 순간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사역이라는 이름으로, 부르심을 쫓는다는 이유로 현실에 어려운 환경을 핑계로 말이다.

사역을 감당하면서, 부르심을 쫓아가면서, 현실에 어려운 환경에 놓일 때 우리는 시선을 어디에 두고 누구를 바라보아야 하는가?

◈산 위에 있는 제자들의 시선

성경에 따르면 베드로, 야고보, 요한 이 세 명의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산 위에 올라간다. 그리고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되신 예수님과 위대한 선지자인 엘리야 모세가 대화를 나누고 계신 현장에 함께하고 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이들은 그 위대한 장면을 제대로 보고 있지 못하는 것 같다. 이 장면에 대한 이러한 상상은 내게 또 하나의 교훈을 준다.

우리는 때때로 흔히 말하는, 은혜 받는 자리에 내가 있다는 것으로 혹은 은혜의 통로로 내가 쓰임을 받기에 올바로 살아가고 있다고 착각한다. 제대로 된 시선으로 주님을 올바로 바라보고 산다고 여긴다. 하지만 내가 있는 그 자리가 그것을 온전히 증명해 주지 못함을 알아야 한다.

세 명의 제자들은 저 위대하고 놀라운 현장에 있지만, 정작 영광스러운 주님은 바라보지 못하고 있다. 그들의 시선은 온전히 주님을 향하고 있지 않다. 현장에 있기에 어떤 은혜 혹은 영광이 느껴질지는 모르겠으나, 그것은 은혜와 영광을 제대로 보고 누린 것이라 말 할 수 없다.

그들은 은혜가 넘치고 영광스러운 자리에는 있었으나 정확하게 무엇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주님이 어떤 모습으로 변하셨는지는 보지 못했다. 그들의 시선으로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 것이다. 라파엘로는 이것을 이야기 해주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산 위로 올라가 변화된 주님을 바라보는 시선

제자들의 왼편을 보라. 여기에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장면이 그려져 있다. 바로 이 부분이 내 상상력을 끄집어 낸 계기가 되었다. 16세기를 살아간 위대한 예술가인 라파엘로의 생각이, 이 그림을 통해 21세기를 살고 있는 내게 전달된 듯 했다.

놀라운 두 사람이 보인다. 스스로 혼잡하고 혼란스러운 사람들의 틈바구니에서 벗어나 산 위에 올라가 영광스러운 예수님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그들 말이다. 온전히 자신들의 시선을 주님께 두고 그분의 영광에 동참하고 있는 두 사람이다.

하나님 나라에는 이런 자들이 늘 존재한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자라 불리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 들을 통해 주님께서는 자신의 역사를 이루어 가신다. 이들이 진정한 통로가 된다. 바로 이들이 현실 안에 온전히 부르심을 쫓아가는 자들이다.

◈막차와 첫차가 공존하는 시대를 향한 라파엘로의 조언

이 그림을 그리던 시대는 종교개혁이 일어나고 매우 혼란스러운 시대였다. 무엇이 진리인지, 어떤 것이 올바른 삶인지, 무엇을 믿고 버려야 할지, 옛 것이 저물어가고 새 것이 일어나는 시대였다.

또한 라파엘로는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삶의 마무리를 살고 있었을지 모르겠다.

그러한 시대에 살던 그때, 그는 붓을 들고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작품을 후대에 남긴다. 그리고 우리에게 이렇게 질문하고 있다. "지금 당신은 어디에 시선을 두고 있는가?"

또한 우리에게 숙제를 던져주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를 바라보아야 하는가?"

그리고 당시의 그림 스타일과는 다른 스타일로 이 작품을 그렸다. 저물어가는 지금의 시대에게 다가올 시대를 어떻게 맞이해야 할지 알려주듯 말이다.

라파엘로는 이 새로운 스타일로 르네상스 말기에 바로크 양식을 제안한다. 천재이자 전설인 그는 자신의 마지막 삶을 막차가 아닌 첫차를 타고 마무리했다.

지금은 패러다임이 전환되는 매우 중요한 시대다. 저물어가는 시대와 떠오르는 시대가 겹치며, 막차와 첫차가 공존한다.

당신은 어떤 차를 타겠는가? 막차인가? 첫차인가?

당신은 어디에 시선을 두고 있는가? 어디를 바라보며 살아가겠는가?

이것이 우리의 믿음을 지적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아닐까?

김준영

마커스 미니스트리 설립자 및 대표를 역임했으며, 현재 나의미래공작소 대표, 예학당 설립자 및 주강사이다. 주요 저서로 <나는 마커스 입니다(샘솟는기쁨)>, <고백수업(와엠퍼블)> 등이 있으며, '부르신 곳에서', '주님은 산 같아서', '동행' 등 40여 곡을 작사했다. 숭실대, 명지대, 총신대, 감신대 등 다수 대학교에서 강연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