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강 이승훈
▲남강 이승훈 선생.
잃어버린 나라의 땅이지만, 봄이 오자 파란 새싹이 돋고 새들이 지저귀었다.

남강은 유영모라는 기인을 오산학교에 초빙했다.

유영모는 그때 20대 청년으로 동경물리학교를 나온 수재였다. 다석 유영모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면서도 우리나라에 알맞은 토착적인 신앙을 강조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욕망을 조절하려 노력했다. 하루 한 끼만 먹었으며, 수레는 결코 타지 않았다. 하나님이 주신 두 다리를 사용하지 않고 남의 것을 빌린다면 죄악이라는 거였다.

교장실에 놓인 탁자 위에 무릎을 꿇고 올라 정좌를 하고 하루종일 앉아 있기도 했다. 또 추운 겨울에도 날마다 냉수마찰을 했다. 동네 사람들은 물론이고 멀리 떨어진 데서까지 구경을 하러 왔다. 그러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간곡히 들려 주었다.

"우리가 씨순길을 걷는 것은 둑을 쌓는 일입니다. 개인이나 단체나 언젠가는 소멸되는 생애를 가지고 있으며, 스스로 그 생애의 한계를 정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실오라기 같은 제한된 인생이 아름다운 인생이며, 쓸데없이 오래 살기를 바랄 것이 아니라 짤막한 인생을 빛나게 살기를 바랄 것입니다. 빛나는 인생은 사명을 가지고 사는 실오라기입니다.

마치 둑을 쌓아 강물을 막으면, 강물은 흐르지 못하고 차차 불어올라 골짜기에 차고 산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과 같습니다. 물이 깊어짐에 따라 생명의 물고기가 뛰고 하늘에 솔개가 날아오릅니다.

인생도 자기 생애의 한계를 정하면 물속에 물고기 뛰듯 머리에 새로운 생각이 솟아오르고 하늘에 솔개 날듯 가슴에 호연지기가 울려퍼집니다.

나와 네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모두 다 한 나무에 핀 꽃입니다. 우리는 다만 그 사람의 긋(얼의 나타남)을 알면 그만입니다. 곧 그 사람의 인격, 그 사람의 정신, 그 사람의 생각, 그 사람의 말씀을 알면 그만입니다.

그 말씀 속에서 또 내 얼(참 나)을 내 긋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 우리 모두에게 희망을 걸 수 있는 일이 생긴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는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어느 날 나라 걱정으로 시름에 잠겨 있는 남강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유영모가 말을 꺼냈다.

"우리 민족은 점점 목이 졸립니다. 이런 괴로운 시기에 남강 선생님께서 신앙생활을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학교 역시 힘이 생길 것입니다."

"음, 고맙네. 생각해 보겠네."

일본은 민족학교에 대해서는 억압하면서도, 기독교계 학교는 아직 지켜보고 있었다.

하루는 답답한 마음으로 가을 바람을 쐬며 남강은 평양으로 나갔다. 대성통곡도 하였지만, 그것만으로는 끓어오르는 울분을 풀 길이 없어 무작정 나선 길이었다. 평양 거리를 거닐던 남강은 문득 이런 말을 듣게 되었다.

"오늘 밤에... 한석진 목사가 특별 설교를 한다는군."

남강은 호기심을 갖고 그 사람 뒤를 따라 걸었다.

인간은 자기 힘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어려움 앞에 놓였을 때 전지전능한 능력을 지닌 존재를 찾게 된다.

일본 제국의 폭압에 짓눌린 조선 땅은 지옥과도 같았다. 더구나 일반 백성들의 삶은 죽음보다 더 처참한 실정이었다.

만일 이승훈이 자기 한 몸과 가족의 행복만을 추구했다면 그런 고민을 할 필요도 없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우리나라와 백성들의 행복을 자신의 행복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자기 한 몸을 희생해서라도 그들을 구하고 싶었다.

황폐한 산하를 장사꾼으로 떠도는 동안, 그는 우리 민족을 살릴 새로운 시야와 기운이 필요함을 절실히 느꼈다.

입으로만 공자왈 맹자왈 뇌까리는 양반 유생들에게서는 더 기대할 만한 게 없었다. 중국만을 우러러 받드는 사대주의적인 양반들에겐 침이라도 뱉어 주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당시 신문물과 함께 들어온 기독교를 지켜보며, 그것의 단점을 피하고 장점을 어떻게 활용할지 심사숙고했던 것이다.

교회당 안에는 사람들이 가득 모여들었다. 신자가 아닌 일반인들도 많이 참석한 듯했다. 목사의 설교가 시작됐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어렵사리 참석해 주신 평양 주민 여러분.... 나라가 망해 우리 삼천리 강토는 눈물바다가 되고 말았지만, 이제 우리는 우리의 눈물을 쓸데없는 것으로 흘려버려선 안 되겠습니다."

그는 숨을 고루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눈물을 기억하시고 뺏긴 나라를 찾을 수 있는 힘을 주실 수도 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 민족이 겪고 있는 엄청난 고통은 예수님이 죄없이 십자가 위에 매달려 죽으신 고통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고통을 겪으셨기에 인류의 죄가 사해지고 구원의 길이 열린 것처럼,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수난도 우리 하기에 따라 새로운 소망을 가져다 줄 수 있습니다."

김영권 남강 이승훈
▲김영권 작가(점묘화).
김영권 작가

인하대학교 사범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하고 한국문학예술학교에서 소설을 공부했다. <작가와 비평>지의 원고모집에 장편소설 <성공광인(成功狂人의 몽상: 캔맨>이 채택 출간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작품으로는 어린이 강제수용소의 참상을 그린 장편소설 <지옥극장: 선감도 수용소의 비밀>, <지푸라기 인간>과 청소년 소설 <보리울의 달>, <퀴리부인: 사랑스러운 천재>가 있으며, 전통시장 사람들의 삶과 애환을 그린 <보통 사람들의 오아시스> 등을 썼다.

*이 작품은 한국고등신학연구원(KIATS)의 새로운 자료 발굴과 연구 성과에 도움 받았음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