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7 판문점 선언' 이후 우리 정부는 '평화'를 위해 북한에 풍선을 날려 보내는 행위를 중단할 것을 대북 단체에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진정한 평화는 정부와 선언문을 통해서가 아닌, 다수의 사람에 의해 동시다발적인 회복을 통해 이뤄질 수 있다는 주장이 나와 주목받고 있다.

한국 순교자의 소리 CEO 에릭 폴리 목사는 최근 '평화를 위한 풍선, 우리는 왜 풍선을 북한에 띄우나?'라는 칼럼을 통해 남북 사이의 화해 분위기 가운데 위축된 풍선 사역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시류에 휩쓸려 다수 사람에 의해 진정한 평화를 이루는 방법을 간과해선 안 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한국 순교자의 소리는 대부분 대북 단체처럼 대북 전단지와 함께 미화 1달러 지폐, 한국 드라마, 예능, 시사 방송, 가요 등이 담긴 USB, 구충약, 연고, 라디오 등을 보내지 않고, 헌법상 북한 주민이 합법적으로 읽을 수 있는 북한 정부가 출판한 성경책만 담아 풍선을 날리고 있다. 이렇게 매년 약 3~5만 권의 성경이 배포된다.

한국 순교자의 소리
▲한국 순교자의 소리 CEO 에릭 폴리 목사(좌)와 대표 폴리 현숙 박사(우) ⓒ한국 순교자의 소리

에릭 폴리 목사는 "평화는 정부로부터가 아닌, 한 사회 전체에 걸쳐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역사가 보여준다"며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당시에도 "정부 역할은 평화를 만들어 내거나 평화를 성취하거나 평화를 정의하거나 평화를 예정하거나 평화를 조직하는 것도 아니라, 다만 평화를 저해하는 행위를 중단하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남북한 평화도 정부가 만들어 놓고 유지하고 있었던 인공적인 방해물이 제거되었을 때 작동되는 사람의 자연스러운 본능으로 '발발'하는 것"이라며 "전쟁이 동시다발적으로 발발하는 것과 비슷한 양상으로 진정한 평화도 사회 각 장기의 동시다발적인 회복으로 일어난다"고 주장했다. 그렇지 않은 정부에 의한 평화는 "사전에 계획된, 제도화된 평화이며, 역사적으로도 선언문에 의한 평화는 무너지기 쉽고 빈약하며 부자연스럽고, 그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연명 조치가 필요하며, 그것을 보호하고 보존하기 위해 물리적인 힘이 항상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대북 전단에 대해서는 "풍선을 날리는 대북단체들의 전단 내용이 가끔 과장되고 투박할지도 모르나, 이 전단을 북한에 반하는 전단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북한 주민을 그들의 지도자와 동일시함으로써 이들을 정치적 논쟁거리로 삼는 지독한 오류를 범하는 것"이라며 "남북 관계의 정치 이슈화는 평화에 큰 걸림돌"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이어 폴리 목사는 "풍선을 날리는 사람들은 남한과 북한의 정부가 계속 유지해온 장벽을 극복하고, 평범한 남북한 사람끼리 서로 직접 대화하기 위해 풍선을 날리는 것"이라며 "남북한 정부는 평화를 이루는 과정에서 자신들이 해야 할 역할이 있지만, 평화를 이뤄내고 서로 소통할 수 있는 우리의 수단들을 정부가 독점하게 허용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오히려 우리가 더 걱정해야 할 것은 한국전쟁이 끝나고 65년이 지났는데도 "우리 스스로 평화를 이루려는 노력과 방법, 심지어 이산가족 문제까지도 그것들을 처음부터 우리에게서 앗아간 정부에게 맡기지 않는 법을 아직도 배우지 못했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에릭 폴리 목사의 칼럼을 2회에 걸쳐 연재한다.


<평화를 위한 풍선, 우리는 왜 풍선을 북한에 띄우나?>

북한에 풍선을 날려 보내는 일은 절대 지루한 일이 아니지만, 특히 요즘이야말로 풍선을 날리기엔 흥미로운 시점이다. "풍선 날리지 말고 좀 기다려줄 수 있나요?" 이 말이 바로 필자가 반복해서 듣는 질문이고 정부 당국자, 경찰, 매체, 페이스북 댓글, 심지어 친구들로부터 불만스럽게, 그리고 긴급하게 듣는 말이다. '당신이 이 평화 협상 절차보다 더 중요한 사람이야?' '우리 모두를 위험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나?' '당신의 그 편파적인 목적이 모두의 평화보다 더 중요해?'

들리는 바에 의하면, 통일부까지도 풍선을 날리는 어떤 단체들에 다른 인권 활동으로 전환하면 지원하겠다고 한다. 통일부가 판단하기에 최근 열린 평화회담의 분위기를 망치지 않는 그런 활동들을 말이다. 모두가 남북 사이에 이루어진 긍정적인 협약과 상호 존중의 분위기에 감명을 받은 듯 보인다. 풍선 날리는 일을 하는 사람들을 뺀 모두가 말이다.

분명히 말하건대, 내가 풍선을 날리는 모든 사람을 대변할 수는 없다. 날려 보내는 풍선의 양으로 따지면 우리 단체, 즉 한국 순교자의 소리는 풍선 사역에서 '거목'임에 분명하지만, 대북 풍선을 날리는 다른 단체들과 우리 단체의 공통점은 거의 없다. 우리는 인권에 관련된 대북 전단이 아닌, 오직 성경만 날려 보낸다. 이 성경은 바로 북한 정부가 출판한 번역본으로, 북한 정부가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북한 헌법에 의해 모든 북한 주민들이 합법적으로 읽을 수 있는 성경책이다. 우리는 풍선을 날릴 때마다 항상 경찰에게 알리지만 대중 매체들에는 절대 알리지 않는다. 항상 밤에 풍선을 날리고 인적이 드문 외딴 곳에서 작업을 한다. 고가의 최첨단 기술을 사용해 풍선과 성경책들이 안전하게,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북한으로 유입될 수 있게 한다. 이 기술들은 고도의 컴퓨터 모델링과 GPS 추적장치, 또한 기상 관측이 가능한 풍선(크기가 작아 레이더망에 잡히지 않으며, 착륙하지 않고 흔적 없이 공중에서 터지는)에 사용되는 기술들이다. 올해부터는 헬륨가스만 사용하고, 훨씬 더 저렴하며 논란이 많은 수소는 사용하지 않는다.

한국 순교자의 소리의 풍선 사역 현장
▲한국 순교자의 소리의 풍선 사역 현장. ⓒ한국 순교자의 소리
분명히 이 풍선들은 효과가 있다. 북한인권기록보존소의 "2015년 북한종교자유백서"에 따르면, 북한에 있을 때 성경책을 보았다는 북한 주민들의 수가 2000년 당시 0%에서 2014년에는 7.6%로 늘어났다. 그리고 이건 우리가 풍선으로 보낸 성경책 때문만은 아니다. 어쨌든, 순교자의 소리와 다른 단체들이 다수의 경로로 북한에 성경을 보내고 있다. 이러한 다른 수단을 다 합쳐도 우리가 매년 4만 권씩 10년 이상 보내왔던 성경책들의 효과에는 턱없이 미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이렇게 묻는다 해도 이해할 수 있다. '단지 기독교인들이 북한 주민들을 전도하고, 탈북자들이 북한 정부에 항의할 목적으로 평화 과정을 위태롭게 해야만 하는가?' '표현의 자유와 종교의 자유가 아무리 중요하다지만, 긴급한 국가의 이익을 해칠 만큼 중요한 것인가?'

이런 방식으로 전형적인 논쟁이 진행되고, 결국 풍선을 날리는 사람들의 편에는 적은 수의 사람들만 남아있게 된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이 논쟁이 진행되는 방식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풍선 날리지 말고 좀 기다려줄 수 있어요?" 하는 질문에는 "당신은 왜 이 평화협상 절차를 존중하고 신뢰하지 못해요?"라는 의미가 숨어있다. 그러나 정부 간 평화협상 절차를 진심으로 존중하고 당당하게 행동하면서, 평화에 관한 우리의 이해와 실천을 충분히 살릴 수 있다.

달리 말하면, 평화는 매우 중요하고 너무 큰 사안이기 때문에 정부가 홀로 이루어 낼 수 없는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 뒤에 DMZ 남쪽에 사는 모든 이들이 줄줄이 따라가고, 김정은 뒤에 DMZ 북쪽에 사는 모든 이들이 줄줄이 따라와서 누구도 그 행렬에 벗어날 수 없는 그 순간에 만들어지는, 그런 종류의 평화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사전에 계획된, 제도화된 평화이다. 정부가 공급한 깃발들이 휘날리고, 소셜 미디어에 적합한 사진들을 찍고, 남북 정부가 편한 그들만의 속도대로 그들의 편의에 맞춰 서로의 관계를 쌓기 위해 스포츠나 문화를 교류함으로써 말이다.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선언문에 의한 평화는 무너지기 쉽고, 빈약하며, 부자연스럽고, 그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연명 조치가 필요하며, 그것을 보호하고 보존하기 위해 물리적인 힘이 항상 필요하다.

그와는 반대로, 우리는 사람들이 베를린 장벽을 오르던 장면을 기억함으로써, 분열된 사람들을 하나로 만드는 진정한 평화는 보통 선언문을 통해서가 아닌, 다수의 사람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평화협상 절차에 있어 정부의 역할은 평화를 만들어 내는 것도, 평화를 성취하는 것도, 평화를 정의하는 것도, 평화를 예정하는 것도, 평화를 조직하는 것도 아니라, 다만 평화를 저해하는 행위를 중단하는 것이다. 스포츠와 문화 교류를 통해 나누는 사랑이나, 아시아 횡단 철도에 대한 환상, 또는 서로가 가진 전쟁에 대한 반감을 확인하는 것으로 남북한의 두 나라가 서로 깊이 연결되지 않는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