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수
▲김준수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발음하기 좋고 뜻이 확 와 닿는 느낌을 주는 '운칠기삼'(運七技三)은 고사성어의 본고장인 중국이나 한자 영향권인 일본에서 온 사자성어가 아니라, 토종 사자성어다.

기지와 해학이 넘쳐났던 우리 선조들도 기발한 사자성어를 만들어냈다, '운칠기삼(運七技三)'을 비롯해 '두문불출(杜門不出)', '오비이락(烏飛梨落)', '이전투구(泥田鬪狗)', '여소야대(與小野大)', '여촌야도(與村野都)', '유전무죄(有錢無罪)', '무전유죄(無錢有罪)', '자린고비(玼吝考妣)', '함흥차사(咸興差使)' 등이다. 이중 어떤 말들은 정식으로 국어사전에 등재돼 있고, 어떤 말들은 아직 등재되지 않았으나 세간에 널리 사용되고 있다.

'운칠기삼'(運七技三)은 어떤 일을 할 때 '운이 7할, 실력이 3할'이라는 뜻으로, 세상 일이 능력보다는 운이 더 크게 작용한다는 것을 일컫는다. 삼성그룹을 창업한 고 이병철(李秉喆) 회장이 만든 말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분명하지 않다.

호암(湖巖)은 죽음을 한 달 앞두고 '신의 존재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 '신은 왜 자신의 존재를 똑똑히 드러내 보이지 않은가?', '신이 인간을 사랑했다면 왜 고통과 불행과 죽음을 주었는가?' 등 24가지에 달하는 종교와 신에 관한 질문서를 작성해 서울 절두산 순교성지 기념관장으로 일했던 박희봉 신부에게 보냈다. 투병 중이던 호암은 삶의 마지막 순간에 던졌던 절박한 물음들에 대한 답변을 듣지 못하고 1987년 타계했다. 박희봉 신부는 이 질문에 답할 겨를도 없이 이듬해 선종(善終)했다.

이병철 회장의 풀리지 않은 궁금한 질문들에 대한 답변은 그가 죽은 지 24년 만인 2011년 <내 가슴을 뛰게 할 잊혀진 질문>이란 제목의 책으로 나왔다. 이 책을 출간한 사람은 천주교 미래사목연구소장인 차동엽 신부였다.

잘 아시다시피 이병철 회장은 26세의 젊은 나이에 사업에 투신, 일평생 사업에 전념하며 이 나라 경제를 눈부시게 발전시킨 주역이었고, 대한민국 최고의 갑부로서 명실상부(名實相符)한 성공의 대명사로 알려진 분이다. 그런 그가 죽음의 목전에서 신의 존재와 세상의 부조리, 그리고 영생에 관한 풀리지 않은 궁금증을 품고 있었다는 것은 일반인들에게 의외로 비쳐졌고, 물질제일주의 풍조가 만연한 한국 사회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던 게 사실이다.

故 이병철 회장은 '기업이 곧 사람이다'라는 인재 제일주의의 경영철학을 가졌던 분이다. 필자가 젊은 시절 이병철 회장은 신입직원을 채용하는 면접장에서 면접관들 뒤에 몰래 비밀스러운 커튼 장치를 해놓고는 관상쟁이와 함께 커튼 틈 사이로 면접생들의 관상을 훑어보고 채용 여부를 결정했다는 소문이 대학가에 파다(播多)했다.

필자는 1980년 늦가을 중앙일보사 취재기자 채용시험에 응시해 1차 시험에 합격하고 2차 면접시험을 기다렸다. 관상이라면 왠지 께름칙하고 인물에 영 자신이 없었던 필자는 면접장소에 이병철 회장과 관상쟁이가 나와서 음산한 눈빛으로 나를 이리저리 살피며 고개를 가로저을까봐 공연히 조바심이 난 적이 있었다.

1차 시험을 잘 치렀다고 자부한 필자는 보무도 당당히 2차 면접시험을 보러 서소문동에 소재한 중앙일보사에 갔다. 그런데 이게 웬일? '당사의 사정으로 인해 부득이 면접일을 연기하게 되었으니 추후 일자가 확정되는 대로 개별 통보해 드리겠습니다'는 정문에 나붙은 벽보를 보고는 의아하게 생각하며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그날 오후 신군부의 '언론 통폐합 조치'가 발표되었다. 필자는 중앙일보 외에 몇 개 유력 신문사 기자채용 1차 시험에 합격을 했다. 그러나 '불운하게도' 언론 통폐합 조치로 중앙일보를 위시해 대부분 신문사들의 기자 채용 시험은 없는 것으로 되었다. 충격적인 언론 통폐합 조치로 그해 수많은 언론인들이 해직을 당하고 직장에서 쫓겨나는 판국에 신문사들이 신입기자들을 채용하는 것은 엄두도 못 냈던 것이다.

필자는 엉뚱하게 신문사 대신 지금의 금융감독원 전신인 증권감독원에 공채 시험으로 들어갔는데, 그 또한 '우연 중 우연'으로 그 기관에 입사했던 것이다. 그 일은 그냥 스쳐 지나가는 가장 낮은 단계의 '우연'으로 생긴 일이었다.

전두환 정권의 언론 통폐합 조치가 없었더라면 필자는 십중팔구는 기자생활을 했을지 모를 일이고, 그렇다면 목사도 아니 될 수도 있었으니 이것을 운수소관(運數小官)으로 돌려야 하나 아니면 섭리(攝理)로 돌려야 하나? 이제부터 이 주제를 가지고 '운칠기삼'(運七技三)이라는 사자성어의 의미를 풀어보기로 한다.  

무릇 일의 성패는 국내외의 수많은 요인들과 그 일에 쏟는 노력들의 총합의 결과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노력은 자기의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것이지만, 국내외의 불확실한 수많은 요인들은 자기의 의지와 상관없이 돌아가는 것들이다.

우리 속담에 '재수 없는 놈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는 말이 있다. 우스갯소리로 들리겠지만 사업을 하는 사람들이 모이면 쓴웃음을 지으며 자주 하는 말이 있다. '능력 있는 놈이 재수 좋은 놈 못 이긴다'는 말이다.

불철주야(不撤晝夜) 제 아무리 공력을 쏟고 최선을 다해도 환율이 급격하게 변동된다든가, 혹은 생산품을 가득 싣고 가던 화물선이 바다에서 침몰해버린다든가 하는 불상사가 발생하면 그간 일궈놓은 사업이 하루아침에 망해버릴 수도 있는 게 사업이다. 30년 무사고 경력이지만 어쩌다 운전 중 뒷좌석에 놓인 물건을 집어들려고 팔을 뻗었다가 지나가는 행인을 칠 수도 있는 게 운전이다.

바로 이런 현상을 세상 사람들은 '운이 7할, 기술이 3할'이라 해서 '운칠기삼'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기술'은 노력 내지 능력을 뜻할 것이다. 대학 입학시험이나 공무원 채용시험도 그렇고, 하찮은 운전면허 시험도 '운칠기삼'이 작용한다.

내 주변에는 서울 유수한 대학의 법대를 좋은 성적으로 졸업하고도 사법시험에 번번이 고배를 들어야 했던 사람들 몇이 있다. 자기보다 성적이 못한 동기생들은 사법고시에 잘도 합격했는데 말이다. 그 '불운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한 마디로 '운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도 철저히 시험 준비를 했는데 하필이면 제일 자신 없는 문제가 출제되었다는 것이다. 아니면 시험 당일 연탄가스가 새어 골이 아프다 보니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다든가....

그런데, 세상만사가 '운칠기삼'으로 돌아간다면 거기에 하나님이 일하시는 공간은 없는 게 아닌가 하는 심각한 질문이다. 구체적으로는 하나님이 역사와 인간사에 간여하시지 않는가 하는 질문이다. 아니 그보다 더 노골적으로, 혹시 하나님은 안 계시는 게 아닌가 하는 불경한 질문이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이스라엘을 창건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구원을 일으키시고, 과거와 현재와 장래의 세상 일들에 속속들이 간여하시고 통제하시며 자신의 기뻐하시는 뜻에 맞게 세계와 역사를 일정한 방향으로 인도해 가신다는 우리 기독교인들의 사고 저편에 야릇하게 자리잡아 경건한 신앙심을 마구 흔들고,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의심하게 하는 불경건하고 불순한 생각, 그게 바로 '운칠기삼'의 역사법칙이다.

그리하여 신실한 신앙인마저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도 부단한 학습효과를 통해 무심결에 모든 세상 일에는 '운칠기삼'의 법칙이 작용하고 있다고 믿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신학을 잘 모르는 그리스도인에게는 실로 위험천만하다.

적절한 수위에서 차단하지 않으면 신문이나 휴대폰에서 '오늘의 운세'를 즐겨 찾거나 심한 경우에는 점집을 찾아가 점쟁이에게 자신의 운명에 대해 물어보게 되는 불신앙의 세계에 빠져들고 만다. 그런 불신앙적인 행동을 하나 둘 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인생관, 세계관은 무신론적으로 변해가는 법이다.

고스톱이나 포커 도박이나 경마장 등 투전판에 과연 하나님이 간여하실까? 거룩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러한 볼썽 사나운 장소에서 벌어지는 온갖 추악한 일들에까지 끼어드실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필자는 초월적인 하나님은 우리들 인간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그러한 일들까지도 총체적으로 간여하실 거라고 굳게 믿는 사람 중 하나다. 이것을 비합리적이라고 몰아붙여도 필자는 전혀 물러날 생각이 없다. 필자는 많은 경험들을 해 보고 그 경험들을 성찰한 결과, 하나님께서 이 세계의 모든 역사와 인간의 대소사 일들에 직접 간여하시어 자신의 선하신 뜻을 드러내 보이신다고 믿고 있다.

그러기에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차를 몰고 먼 길을 떠나기 전에 잠시 차 안에서 안전을 위해 기도를 하고, 음식점을 개업해 장사를 시작하기 전 먼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며 장사가 잘 되기를 간구하는 개업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그럼에도 차 사고가 났거나 음식점이 장사가 안 돼 문을 닫게 되면 그 기도가 효력이 없는 게 아닌가? 기도가 효력이 없다면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으셨거나, 기도를 들으시고도 그 기도를 성취할 능력이 없는 것은 아닌가? 이것은 하지 않아도 될 쓸데 없는 걱정이다. 기도대로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신앙인은 그것을 통해 하나님이 자기를 어떻게 인도하실지 오히려 기대하는 마음이 있고, 그래서 감사를 할 수 있게 된다.

아전인수(我田引水)라고? 아니, 오히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훨씬 마음이 편하고 합리적이라고 여기고 있다. 필자의 경우 그것은 철저히 신앙적일 뿐 아니라 신학적이다. 사도 바울은 이런 원리를 터득하였기에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고 고백할 수 있었다. 이처럼 신앙의 눈으로 이 세계를 보는 가치관을 '기독교적 세계관'이라고 하고, 그러한 기독교적 세계관을 가지고 인생을 보는 가치관을 기독교적 인생관이라고 한다.

과학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시대에 사는 현대인들도, 이 신묘막측한 섭리(攝理)를 맹목적인 팔자(八字)로 이해하고 인생만사를 '팔자소관'이라고 말한다. 한국인들에게 무신론적 팔자소관의 세계관은 무의식중에 짙게 드리워져 있다. 초고층 빌딩을 짓거나 우주선을 쏘아올릴 때 돼지머리를 올려놓고 고사를 지내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을 만큼, 극성스러운 팔자소관 세계관이다. 팔자(八字)는 섭리(攝理)가 지배되는 기독교 세계관과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 기독교 세계관은 인간과 역사를 섭리의 안목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여 삶의 가치로 여기는 태도를 말한다.

필자는 중앙일보에 입사하지 못한 게 '운수소관(運數小關)'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섭리'였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다(고전 15:10)"고 말한 사도 바울처럼, 필자 또한 지금의 나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임을 고백한다.

필자가 즐겨 부르는 경배와 찬양곡 중 '온 맘 다해'라는 노래가 있다. 곡도 좋지만 가사가 더 좋다.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이니 흔들리지 않고 묵묵히 주님만을 사랑하고 따르겠다는 내용이다. 여기 2절 가사 전체를 게재한다.

"나 염려하지 않아도 내 쓸 것 아시니
나 오직 주의 얼굴 구하게 하소서
이해할 수 없을 때라도 감사하며
날마다 순종하며 주 따르오리다
온 맘 다해 사랑합니다
온 맘 다해 주 알기 원하네
내 모든 삶 당신 것이니
주만 섬기리 온 맘 다해".

김준수 바른 말의 품격
▲김준수 목사의 저서 <바른 말의 품격> 한자편, 한글편(왼쪽부터).
김준수

중앙대 신문방송학을 전공하고 정부기관과 대기업 등에서 일하다 50대 초반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에 입학했고, 풀러 신학대학원 목회학 박사 과정을 하면서 교회를 개척했다. 저서로는 베스트셀러 <내 삶을 다시 바꾼 1%의 지혜>와 지난 10년간 집필해 온 신·구약 성경신학 7권 중 첫 권인 <모세오경: 구약신학의 저수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