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에서 신화로: 판테온의 경이로운(Marvel) 부활, 어벤져스

입력 : 2018.05.06 19:21

[박욱주의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 영화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上)

 

어벤져스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의 아이언맨.
◈과학과 경이(Marvel): 아이언맨이 문을 연 경이의 세계,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2008년, 마블 스튜디오가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arvel cinematic universe, 이하 MCU)의 첫 작품으로 <아이언맨(Iron Man)>을 개봉했을 당시만 해도 MCU가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변모할 것이라고 생각한 이들은 많지 않았다. 물론 마블 코믹스의 단골 팬들은 예외다.

MCU의 첫 시작은 한 사람의 영웅이었다. 백만장자에, 과학기술의 천재에, 끝없는 여성편력을 자랑해 대는 유쾌한 무기상인의 고뇌에 찬 회심이 만들어낸 첨단 메카닉 히어로 아이언맨이 그 주인공이다. <아이언맨>의 전체적인 서사는 비록 기술적으로 상당한 과장이 들어가 있기는 해도, 신화와는 전혀 무관해 보이는 현대과학 및 전쟁의 내러티브였다.

사실 2008년 <아이언맨>의 개봉과 폭발적인 흥행 성공 이전까지, 아이언맨은 여러 슈퍼히어로 캐릭터들 가운데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캐릭터는 아니었다. 백만장자에 과학기술의 힘을 빌어 영웅이 되는 캐릭터라면, 대부분 아이언맨이 아니라 DC 코믹스의 배트맨을 떠올렸다. <아이언맨> 개봉 전까지 코믹스에 등장하던 아이언맨은 딱히 인기가 없다고 할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확실한 매력을 갖추었다고 보기도 힘든, 상당히 애매한 위치에 자리잡고 있던 캐릭터였던 셈이다.

2007년 <아이언맨> 제작 당시, 마블 엔터테인먼트(마블 스튜디오의 모기업)는 이미 소니 엔터테인먼트에 자사 최고의 인기 캐릭터 스파이더맨을, 그리고 폭스 스튜디오에 엑스맨 캐릭터들의 판권을 매각한 상태였다. 말 그대로 '차 떼고 포 뗀' 상태에서 슈퍼히어로 영화를 제작해야 했던 마블 스튜디오는 MCU가 가진 최고의 장점을 부각시킬 수 있는 캐릭터로 아이언맨을 선택했다.

2007년 마블 스튜디오 사장으로 임명된 케빈 파이기(Kevin Feige)는 마블 코믹스의 강점을 과학과 유머로 보았다. 경쟁상대인 DC 코믹스의 세계관보다 현실적이고 재치있는 서사를 풀어내기에 아이언맨 캐릭터가 가장 적당할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의 판단은 적중했다.

여기에 더해, 아이언맨 배역에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Robert Downey Jr.)를 캐스팅한 것 역시 최고의 판단이었다. 다우니 주니어는 이미 10대 후반부터 최고 수준의 연기력을 갖췄으나, 20-30대를 심각한 마약 중독으로 방황한 까닭에 <아이언맨> 캐스팅 당시 B급 배우 취급을 받고 있었다.

2004년을 기점으로 마약과 알코올 중독에서 벗어나 연기자로 재기해 가던 그의 이미지는 무기상인으로서 호사스러운 삶과 여성 편력에 함몰돼 살다가 도덕적으로 각성한 슈퍼히어로 아이언맨의 이미지에 완벽하게 부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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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U의 시작을 알린 캐릭터, 아이언맨.
이처럼 MCU의 출발은 나름 현실성을 갖춘 과학의 이야기였고, 인간의 이야기였다. 2008년 당시 코믹스의 아이언맨 서사를 알지 못하던 이들에게는, 우주에 존재하는 생명체 절반을 살해하는 비현실적 빌런 타노스에 대항하는 신화적 영웅의 일원이 된 아이언맨을 상상하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특수기관 실드(S.H.I.E.L.D) 요원인 필 콜슨(Phil Coulson, 클라크 그레그 분)과 국장인 닉 퓨리(Nick Fury, 새뮤얼 L. 잭슨 분)가 잠시 등장하여 서사가 대규모로 확장될 것을 암시하기는 했지만, 그 활동 무대가 신들의 세계를 포함한 우주 전체로 확장될 것을 예견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신화와 경이(Marvel): 마블 혹은 디즈니 판 아르고 원정대,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

<아이언맨>을 통해 과학으로 출발했던 MCU는 10년 새 과학기술 모티프를 완벽하게 압도하는 신화의 세계로 거듭나 있는 상태다.

MCU가 과학을 신화의 부속물로 삼기 시작한 시점은 2011년, <토르: 천둥의 신(Thor)>과 <캡틴 아메리카: 퍼스트 어벤져(Captain America: The First Avenger)>가 개봉되면서부터다. 두 영화 모두 외계 행성으로부터 지구에 온 신화적 존재들을 등장시키면서, MCU가 신화적 세계로 변모할 것이라는 점을 확인시켜 주었다.

2012년 <어벤져스(The Avengers)>에서는 과학이나 초월적 능력으로 무장한 영웅들이 우주적인 악의 세력의 침공에 맞서 싸우는 장면을 보여줌으로써 MCU의 신화화가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이후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Guardians of the Galaxy)>를 통해 우주적 세계관의 지경이 급격하게 확장되고, 2018년 현재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에서는 물리적-신적 우주 전체가 MCU의 영역 안에 들어왔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점이 발생한다. 과학과 인간의 세계로 출발했던 MCU가 신화와 신들의 세계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단지 상상력에 의한 내러티브의 범위 확장에 불과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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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에는 그간 지속적으로 확장되어 온 MCU의 거의 모든 캐릭터들이 한꺼번에 등장한다.
고대로부터 대부분의 신화는 항상 그 세계관을 확장하는 속성을 가졌다. 서구 문화의 뿌리로 인정되는 고대 그리스 신화가 대표적이다. 고대 그리스 신화는 주전 7세기경 호메로스의 <일리어드>와 <오디세이아>를 출발점으로, 후대의 위대한 희곡 작가들에 의해 내러티브의 구체성을 확보해 갔다.

종교학자들이 신화의 확장을 통해 공통적으로 확인하는 바는, 바로 인간의 초월을 향한 그침없는 욕망이다. 인간이 세계를 맞댄 채 영위하는 삶의 모습은 항상 역동적이고 예측 불가능하다.

실존철학자 하이데거는 이처럼 우연으로 가득한 인간의 삶, 그래서 불안을 선사해 주는 삶에 대해 다음과 같이 고백한 바 있다. "불확실성만큼 구원을 받지 못하고 지옥에 떨어지는 것과 흡사한 것이 달리 있을까?"

삶을 자기 뜻대로 안정적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장악하지 못한 데서 오는 불안과 불만은 인간이 자신의 분수를 넘어선 초월 욕망을 갖게 하는 근본 원인으로 작용한다. 종교철학자 정재현은 인간의 초월 욕망을 깊이 있게 성찰한 후 다음과 같이 해명한 바 있다.

"인간의 초월 욕망은 최초 신화로, 그리고 다음 단계는 철학(φιλο-σοφία, philo-sophia)이라는 방식으로 구현됐다. 원래 철학, 즉 지혜의 여신으로부터 오는 앎(σοφία, sophia)을 사랑하는 행위(φιλο, philo)는 신화에 깃들어 있던 초월에 대한 욕망을 이성의 힘을 빌어 추구하고 표현하는 모든 활동을 통칭하는 것이었다.

최초 그리스 철학자들은 신에 대한 진리(참)를 파악하는 것이 곧 실존을 초월할 수 있는 신적 권능(힘)을 장악하는 길이라고 여겼다. 이들로부터 유래된 '힘-즉-참-즉-신'의 등식은 역사상 어느 한 순간도 힘을 잃지 않고 인류의 학문과 문화를 근본으로부터 지배하는 신념으로 작동해 왔다. 이런 자기 신격화 욕망은 인간의 삶이 맞닿아 있는 모든 분야를 지배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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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의 빌런 타노스와 그에게 초월적 힘을 선사하는 인피니티 스톤. 인피티니 스톤은 신적인 힘을 얻으려는 인간의 초월 욕망을 반영한다.
정재현의 종교철학적 성찰과 해명대로, 현대 대중문화 역시 이 자기 신격화 욕망의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이 상시적으로 확인된다. 오늘날 자기 신격화 욕망은 실존철학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 때문인지, 자주 이전과는 차별되는 새로운 형태로 구현되는 듯하다.

원래 자의적 초월의 욕망, 자기 신격화 욕망은 주로 사후 세계에 대한 종교적 확신이라는 양태로 구현돼 왔다. 이는 고대 그리스 신화를 비롯해 전 세계의 신화들이 예외없이 공유해 온 기본 신념이다.

반면 성서는 이런 신화적 욕망과 전혀 다른 방향의 복된 소식을 전해준다. 성서, 특히 신약성서는 자기 신격화에 정면으로 대치되는 하나님의 자기-비우심과 겸비를 중심에 둔 복음을 가르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신(빌 2:6-7)" 이로서 자의적 신격화의 욕망을 원천으로부터 전복하는 삶을 사셨다.

그리스도의 삶은 겸비의 모범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찾아갈 때 항상 스스로 신적인 존재가 되려는 욕망을 전적으로 포기하고, 삶의 불안, 한계, 고통, 비루함, 그리고 죄악 속에서 그분을 찾도록 하신 모범이다.

현대 실존철학은 바로 이런 인간의 유한성을 절박하게 체감하고 수긍하는 데서 발아했다. 키에르케고르, 하이데거, 불트만 등은 삶이 붙잡을 수 있는 경험과 진리에 주목했고, 그로부터 사후 세계에 대한 신화적 표상들과 순진한 확신에 담겨 있는 자기신격화 욕망을 버릴 것을 촉구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실존론적 해석학자 불트만이 내세운 성서해석 원리인 '비신화화(de-mythologization)'이다. 이런 반성적 움직임들로 인해, 일각에서는 실존철학 이후 신화의 시대가 종결될 것이라는 전망도 제시됐다.

그러나 현재 이런 전망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오늘날 대중문화는 자기 신격화 욕망을 버리기는커녕, 새로운 형태로 개편해 발전시켜 가고 있다. 오늘날 대중문화에 깃든 인간의 욕망은 실존철학 전에 즐겨입던 옷을 다시 걸치지는 못한다. 다시 말해 죽음마저 극복하는 초월에 대한 이상을 계속 고수하지는 못한다.

오늘날의 대중문화는 고전적-신화적 욕망에 대한 실존철학의 비판적 성찰을 우회하는 대안으로 존재의 확장이 아닌, 능력의 확장을 통한 자기 신격화를 추구한다. 이로써 신화의 시대는 종결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융성한 상황을 맞고 있다. 불트만이 주장했던 비신화화와는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선두에는 MCU가 자리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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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에 등장하는 슈퍼히어로 중 닥터 스트레인지, 토니 스타크(아이언맨), 브루스 배너(헐크), 주술사 웡.
이들은 모두 신비스러운 오컬트적 힘 혹은 과학의 힘을 통해 인간의 한계를 넘는 능력을 보유하게 된 이들로서, MCU가 추구하는 신격화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캐릭터들이다.

MCU는 과학의 힘을 빌어, 혹은 외계인이라는 출생신분을 빌어 초인적 능력을 획득한 캐릭터들로 가득하다. 물론 이 캐릭터들은 어느 정도 한계를 인정하고 수긍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번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는 그런 한계를 제대로 보여주려 하는 듯 하다. 무리지어 등장한 슈퍼히어로 가운데 절반을 형체조차 남기지 않고 '죽여버리는' 서사를 통해, 고전적이고 순진한 존재적 확장의 욕망에 별 미련이 없음을 천명하는 듯하다.

그렇다 해서 부당한 초월의 욕망이 포기된 것은 아니다. 회를 거듭하면 할수록 MCU, 특히 <어벤져스> 시리즈는 각 캐릭터의 능력을 기하급수적으로 확장시킴으로써, 스스로의 힘으로 신처럼 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을 보다 노골적으로 반영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번 회차의 빌런 타노스(Thanos, 조시 브롤린 분)는 역대 최강의 힘을 가진 악당으로서, 우주 전체에 존재하는 생명체를 몰살시킬 힘을 갖게 된 존재다. 이런 막강한 악역의 등장은, 그런 초월적 악에 대항하는 인간 영웅들 또한 신적인 존재로 격상시키는 효과를 연출한다.

MCU 출발 당시 아이언맨은 심각한 부상을 입고 불과 1주일도 살지 못할 상태로 테러집단에 포로가 된 인물이었다. 그랬던 그가, 지난 10년 간 여러 단계의 진화를 거쳐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에서는 세계의 명운을 쥔 인물로 초월적 악과 싸우는 영웅이 된다.

물론 MCU에 속한 영화들은 누가 뭐라 해도 가볍게 '시간을 죽이는' 영화다. 관객들이 그 이면에 반영된 신격화 욕망이라는 사상적 내막을 다 따지면서 영화를 관람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가 재미와 카타르시스를 선사하는 포인트는 결국 인간이 전 우주를 아우르는 신적 존재로서 자력으로 삶의 한계를 극복하는 것이다. 이로써 관객들은 능력의 확장을 통한 자기신격화 욕망에 자주 노출되고 거기에 익숙해질 수밖에 없다.

과거보다 노골적인 모습으로 변양된 '힘-즉-참-즉-신'의 사고방식이 현실을 사는 우리들에게 강요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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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벤져스: 인피니티 워>는 대중문화가 만들어낸 새로운 우상의 집, 곧 판테온(만신전)이라 할 수 있다.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를 통해 확인된 MCU는 오늘날 대중문화가 설립한 하나의 새로운 판테온(Πάνθειον, Pantheion), 즉 만신전(萬神殿)이다. 그 안에는 스스로 신격에 오른 것으로 자고(自高)하는 인간의 모습을 우상화한 형상들이 가득하다.

신인동형론적 사고 깊숙이 자리잡은 욕망이 이제는 영혼의 고양이 아닌, 과학과 초능력, 외계인 등에 의해 정당화된 능력의 고양이라는 양태로 현실화되고 있는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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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에 위치한 판테온 내부. 고대 그리스-로마 신화의 인간형 신들 모두를 기념하는 건축물이다.
박욱주 박사(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 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박욱주
▲박욱주 박사.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냈다면 쉽게 공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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