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수
▲김준수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은 '동쪽 집에서 밥 먹고 서쪽 집에서 잠을 잔다'는 뜻으로, 이 말은 원래 동식서숙(東食西宿)이라는 고사성어에서 나온 말이다. 이 말이 유래된 배경은 다음과 같다.

제(齊)나라에 혼기가 찬 처녀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그녀에게 동쪽 집과 서쪽 집에서 동시에 청혼이 들어왔다. 동쪽 집에 살고 있는 총각은 얼굴은 추남인데 잘 살고, 서쪽 집에 살고 있는 총각은 집은 가난한데 생기기는 탤런트 뺨치는 미남자였다. 두 집 다 아까운 생각에 고민에 빠진 처녀의 부모는 결정권을 딸에게 맡기기로 하였다.

"너는 어느 집 총각에게 시집을 가고 싶냐? 동쪽 집 총각이 맘에 들면 왼쪽 어깨 옷을 내리고, 서쪽 집 총각이 맘에 들면 오른 쪽 어깨 옷을 내리렴."

그 말을 들은 딸은 한참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양쪽 어깨를 모두 벗는 게 아닌가? 의아해 한 부모는 그 이유를 딸에게 물었다. 그러자 딸이 멋쩍은 듯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낮에는 동쪽 집에 가서 먹고, 밤에는 서쪽 집에 가서 잘래요." 처녀는 욕심꾸러기였던 것이다.

동쪽 집에서 밥 먹고 서쪽 집에서 잔다는 뜻을 가진 '동식서숙'(東食西宿)은 민간에 전래되면서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이란 말로 굳어져, 오늘날에는 경제 형편이 어렵거나 처지가 어려워 딱히 한 군데서 오래 머물지 못하고 이곳저곳으로 떠돌이 생활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테면 갑신정변을 일으키다 실패한 김옥균(金玉均)이 여기저기 의지할 곳이 없어 피신생활을 했다든지, 5·16 군사혁명을 일으키고 2인자의 지위에 올랐지만 반대세력의 모함으로 정계 일선에서 물러나 후일을 도모해야 했던 풍운아 김종필(金鍾泌)이 미국 등지에 외유를 하며 떠돌아 다녔다든지 하는 경우다. 이 말은 또 집이 없거나 집을 뛰쳐나와 서울역 등에서 잠을 자며 그날 그날 살아가는 불우한 노숙인(露宿人)들에게도 이따금 쓰이기도 한다.

그런데 이 고사성어를 건성으로 안다든가 혹은 주의력이 부족해 꽤나 유식한 사람도 '동가식서가숙'을 '동가숙서가식'으로 잘못 말할 때가 있다. 음률이 비슷하기 때문에 빨리 발음하면 말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식별하기 힘들어 그냥 지나쳐버리므로, 헷갈리지 않도록 몇 번이고 '동가식서가숙' 소리를 내면서 미리 연습해 둘 필요가 있다.

'동가식서가숙'은 설교자가 적절한 때 써도 운치 있는 말이다. 구약성경의 인물들 가운데 이 말의 상황에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은 다윗이라고 하겠다. 사사건건 사울 왕에게 견제를 받던 다윗은 사울을 피해 10년 이상을 가나안과 블레셋 땅과 요단 넘어 모압 등지를 전전하며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사무엘상 20장-사무엘하 1장).

하나님은 사울을 버리고 마침내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그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셨다. 강력한 왕권을 가진 다윗은 근동 일대에 명성을 떨쳤지만, 아들 압살롬의 반란으로 젊었을 때 그랬던 것처럼 또 다시 이리저리 떠돌며 신세를 져야 하는 처지에 빠지고 말았으니 다윗이야말로 '동가식서가숙'의 대명사라고 할 것이다.

'동가식서가숙'이란 말을 한 번 사용하겠다고, 아무데나 가져다 쓰면 안 된다. 가령 기근을 피해 아내와 함께 이집트로 내려간 아브라함의 딱한 처지를 설명하려 "여러분, 아브라함이 이집트에서 동가식서가숙하고 있을 때 절대 권력을 가진 이집트 왕 바로는 사라가 굉장한 미인이라는 말을 신하들에게 들었습니다"라고 한다면, 어째 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든다. 창세기 12장의 본문을 아무리 살펴보아도 아브라함 부부가 먹고 잘 곳이 없어 여기저기 떠돌아다닌다는 정보를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신약성경에서 '동가식서가숙'이란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장면은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들을 전도하러 보내실 때의 감동적인 사건이다. 주님은 제자들을 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내쫓는 권능을 주시고 지팡이 외에는 돈이나 양식 등 아무 것도 지니지 말라고 명령하셨다(막 6:7-13).

제자들은 이 마을 저 마을로 돌아다니며 하나님 나라를 알렸는데, 그때 제자들은 이 집에서 밥을 얻어먹고 저 집에서 잠을 자며 사람들에게 신세를 졌다는 건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다. 이 경우 제자들이 '동가식서거숙'했다고 말한다면 크게 무리가 없지만 자연스럽지는 않다. '동가식서가숙'의 적용이 까다로운 이유다.

사도 바울의 경우는 어떨까? 바울은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터키와 유럽을 부단히 돌아다니며 선교에 힘쓴 사람이다. 생명을 내놓고 기독교 복음을 전파한 그는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고생이 심했다. 바울이 고백한 고생담(고후 11:22-33)을 묵상하노라면 부끄럽기도 하고 눈가에 눈물이 촉촉이 젖어오는데, 이것은 비단 필자만은 아니고 복음에 빚진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같은 심정일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의 선교 상황의 경우 이 말은 딱 떨어진다고 본다. 예수님은 집도 없었고 예금 통장도 없었다. "어디로 가시든지 제가 따르겠습니다"라고 제자 되기를 자청한 한 서기관의 말에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시는 예수님이 정처 없이 이 마을 저 마을로 떠돌아다니시며 하루하루를 보내시는 것을 미루어 알 수 있다.

예수님이 어디 한곳 편하게 먹을 곳과 잠잘 곳이 없다는 사실은 주께서 직접 하신 말씀에서 명확히 나타난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과연 예수님은 눕는 곳이 호텔이었고 길을 가다 먹는 음식이 뷔페였다. 그러므로 '동가식서가숙'이란 고사성어는, 별로 가진 것 없이 전도하시려고 이스라엘의 마을들을 두루 돌아다니신 예수님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말이라 할 것이다.

가련하고 딱한 처지를 한 마디로 집약해주는 이 말이 우리 예수님에게 적용되면, 한없이 은혜롭고 숙연한 말로 변모되는 것이다.

김준수

중앙대 신문방송학을 전공하고 정부기관과 대기업 등에서 일하다 50대 초반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에 입학했고, 풀러 신학대학원 목회학 박사 과정을 하면서 교회를 개척했다. 저서로는 베스트셀러 <내 삶을 다시 바꾼 1%의 지혜>와 지난 10년간 집필해 온 신·구약 성경신학 7권 중 첫 권인 <모세오경: 구약신학의 저수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