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강 이승훈
▲남강 이승훈 선생.
예나 지금이나 어려운 시절엔 사람들의 마음이 크게 두 갈래로 나뉘어, 영혼 그리고 현실과 투쟁하게 된다.

타협하거나 저항하는 것이다.

하루하루 먹고 살기에도 바쁜 일반 백성에게 큰 기대를 거는 건 무리일지 모른다. 하지만 많이 배우고 많이 갖고 많이 누린 채 이 땅에서 살아온 사람이라면, 바로 그런 위기 때 애국심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왜 이 땅에서 제 맘대로 멋을 부리며 사는가?

서양의 오블리주 노블레스는 그런 정신에서 나온 고귀한 의무이다. 그런데 우리는 잘 먹고 잘 사는 지배층일수록 제 잇속만 채우다, 정작 나라가 어려울 땐 도망치고 만다. 그러면 헐벗은 일반 백성들이 목숨을 바쳐 지켜내었던 것이다.

그런 민족의 격변기에 남강은 '관서자문론(關西資門論)'을 주창했다. 나라의 북쪽 관문인 관서 지방, 즉 평안도와 황해도의 자본가들이 협력해 민족자본을 키워서 장차 침략해 들어올 외국 자본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러일전쟁 후 한반도는 일본의 대규모 자본이 해일처럼 밀어닥치면서 점차 식민지 신세가 되어 갔다.

남강은 우선 서북 지역의 토착 상공업자들을 하나로 모으고, 나아가 전국의 토착 상인과도 연대하여 민족 자본을 키우는 일에 발벗고 나섰다. 이것은 1907년 결성된 신민회의 민족사업 육성 의지와도 통하는 것이었다.

서북 지역 상인들의 항일의식에는 남다른 데가 있었다. 황해도 해주에서는 일본인 쌀 상인들이 한국 상인들에게 밀려 거의 수출을 하지 못할 정도였다.

1909년 일제가 시장세를 만들자, 평북 용천에서는 납세 거부운동을 일으켰고, 평남 순천에서는 일본인 상점을 부수는 사태까지 일어났다.

1908년 봄, 남강은 관서자문론을 실천하기 위해 먼저 평양의 유지들과 재력을 합쳐 평양 마산동에 도자기 회사를 세웠다.

당시에는 일본제 도자기들이 많이 들어와 안성을 비롯한 전국의 유기점들이 큰 피해를 보았다. 이 같은 일본 도자기의 침투에 맞서기 위해, 고려청자와 조선백자 등 우리 도자기의 전통을 살리려 한 것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인 도자기 회사였다.

창립식에서 남강은 이런 말을 했다.

"우리나라의 세계적인 자랑거리인 고려자기는 그 빛이 우아하고 남다릅니다. 우리 경제가 살아나려면 우리가 만든 것을 써야 합니다. 창의적인 산업의 진흥이야말로 조선의 생명선입니다. 여러분, 조국을 살리는 것은 정치력과 경제력이 합쳐져야 합니다. 경제적 침략이 군사적 침략 못지않게 위험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평양 도자기회사는 오산학교와 대성학교의 졸업생 중에서 직원을 뽑았고, 뜻있는 각지의 젊은이들도 훈련생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성실한 이들을 신민회 회원으로 입회시켜 국권 회복을 위한 역군으로 길렀다. 일본 경찰은 이 회사를 '악의 소굴'이라 부르며 한시도 감시의 눈초리를 떼지 않았다.

남강은 사장으로 일하면서 받은 월급을 오산학교에 모두 기부했다.

민족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한다고 해도, 거기에는 여러 가지 동기가 있을 것이다. 자기 민족의 빼어남을 믿기 때문에, 왕실의 후예로서 왕조를 계승해야 하기 때문에, 문화유산을 아끼기 때문에, 높은 벼슬을 했고 조정의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나라를 잃어버림으로 해서 잃어버릴 재산이나 명성을 가졌기 때문에....

그런데 남강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다. 남강에게는 다만 백성과 조국이 불쌍하기 때문이었다. 남강이 민족을 위하여 몸을 바치기로 작정한 데는 다른 까닭이 없었다. 이 땅에서 이 백성이 덕스럽고 넉넉하게 사는 것이 하늘의 뜻이고, 남의 세력 아래 눌리고 짓밟히고 끌리는 것이 진리에 어긋나기 때문이었다.

남강의 민족운동은 단순히 민족의 광복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그 본래의 기상을 회복하여 한 사람의 굶주리고 눌리는 자도 없이 덕스럽고 부강한 조국을 이루는 일이었다.

처음에 남강에겐 민족이란 의식이 없었다. 그는 다만 양반과 천민의 구별이 없기를 원하였다. 그리고 굶주리고 헐벗은 사람이 없기를 바랐다. 어디까지나 인도주의 또는 평등주의였다.

그런데 나라가 남에게 눌리는 것을 보면서, 그는 차츰 민족과 민족 사이에도 양반과 천민이 있고 나라와 나라 사이에도 부자와 가난한 자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김영권 남강 이승훈
▲김영권 작가(점묘화).
김영권 작가

인하대학교 사범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하고 한국문학예술학교에서 소설을 공부했다. <작가와 비평>지의 원고모집에 장편소설 <성공광인(成功狂人의 몽상: 캔맨>이 채택 출간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작품으로는 어린이 강제수용소의 참상을 그린 장편소설 <지옥극장: 선감도 수용소의 비밀>, <지푸라기 인간>과 청소년 소설 <보리울의 달>, <퀴리부인: 사랑스러운 천재>가 있으며, 전통시장 사람들의 삶과 애환을 그린 <보통 사람들의 오아시스> 등을 썼다.

*이 작품은 한국고등신학연구원(KIATS)의 새로운 자료 발굴과 연구 성과에 도움 받았음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