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유와 탄압’ 일제의 기독교 핍박 양면정책… 절정은 ‘신사참배’

입력 : 2018.04.13 09:42

[기고] 끈기와 저력으로 한국교회가 회복해야 할 순교신앙

신사참배
▲일제 시대 학생들이 신사참배하는 모습. ⓒ연구원 제공
1910년 경술년 '국치조약', 즉 '일제에 의한 병탄조약'이 있었다. 8월 16일, 통감은 비밀리에 총리대신 이완용에게 합병조약안을 제시하고, 같은 달 22일 이완용과 데라우치 사이에 합병조약이 조인됨으로써 한국은 암흑의 일제의 침략시대 36년간을 맞이하게 되었다.

일본 제국주의는 한국 식민지 정책에서 처음부터 '동화정책'을 넘어, 곧 한민족 자체를 해체시키려는 '민족말살 정책'에 목표를 두었고, 전 식민지 기간 한국교회를 식민지 통치의 거침돌로 인식했다. 즉 한국교회를 반일의식을 고취하는 '불령선인의 집단'으로 규정했다.

일반적인 침략 사례로 볼 때 침략은 수탈과 예속적 관계로 그치지, 그들의 고유한 관습과 종교, 교육까지 파괴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일본 제국주의는 달랐다. 그들의 목표는 처음부터 '충실한 신민'을 만드는 데 있었다.

매켄지 기자의 보고서『조선의 비극 』에 따르면, 한국을 자국의 영원한 식민지로 복속시키기 위해 한국 민족 자체를 해체·동화시키려는 '민족말살정책'을 전개했던 것이다.

그런 일제가 한국교회를 경계와 주목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교회가 가진 유일신 교리적 특성과 세계사적 역사성 외에도 한국 내 기독교의 위상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기독교는 개항 이후 일본의 진출과 동시기에 한국에 수용됐다. 비록 활동 영역이나 목적은 달랐으나 결국 동일한 역사의 장(場)에서 각기 자신들이 추구하는 바를 실현시키는 과정에서 갈등과 대립은 필연적이었다.

이후 정치력이 일본에 쏠리게 되면서 자연히 기독교 세력은 상대적으로 반일적인 입장에 서게 되고, 이같은 성격은 결국 한국 기독교의 성격을 분명히 하며 발전된 결과를 가져왔다.

즉, 한국 기독교가 기독교계 신교육기관을 통해 자유·평등 사상과 더불어 자주·독립정신을 고취하면서 점차 민족문제에 눈을 뜨게 되었으며, 새로운 세계관의 안목을 가지게 된 것이다.

1890년대 이후 민족 모순에 대한 민족적인 인식이 고양되었던 시기와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 대부분 기독교인이었다는 점은 바로 이러한 역사적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1900년대 한국 근대사 초기에 접어들 때, 기독교 교세의 급속한 확장과 동시에 민족적 자각의식이 대중 속에 확산되었는데, 그 중심 집단이 바로 교회였고 그 주체가 기독교인들이었다. 따라서 일제는 한국 기독교를 향후 식민지 지배의 최대 '걸림돌'로 인식하게 된 것이다.

이같은 일제의 경계와 적대적 기독교 인식을 가져온 사건이 '강제병합' 직전 일어난 일련의 암살사건과 '노도의 불길처럼' 확산되어 갔던 기독교 교세 확장에서 찾을 수 있다. 한국 기독교의 급성장은 일제의 식민지화에 큰 짐이 아닐 수 없었다.

일제의 기독교 핍박은 회유와 탄압이라는 양면정책으로 진행되었다. 회유책은 대체로 외교권을 박탈한 통감부 기간에, 탄압책은 '합방'이후 3·1 운동이전까지 행해졌다.

1909년 10월 이토 히로부미가 살해된 이후 일련의 배후세력으로 기독교를 지목한 일제는, 기독교 단체의 동향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러나 바로 기독교 세력을 탄압하려는 성급함을 나태내 보이진 않았다.

오히려 1910년 가을, 이상재, 양전백, 최병헌 등 당대 기독교 지도자 19명을 일본으로 초청하여 환대하는 등 회유정책에 공을 들인다. 일본 조합교회에 이 시기 집중적으로 특별지원금을 풀어 직접 탄압정책을 유보하고, 한국교회의 와해와 분열, 기독교인을 회유하는 전략을 집요하게 펼쳤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실패로 돌아가고 있었다.

당시 초기 기독교 선교사들이 세운 미션스쿨이 민족계몽과 개화의 문을 열고 있었다. 1900년대 초기 기독교 사립학교들이 대단한 속도로 파급되고 있었다. 이를 제거하기 위한 방편으로 통감부는 1908년 '사립학교령'을 공고, 민족주의계 사립학교를 대폭 제거하려 하였으나, 이 역시 학교의 운영자 명의를 치외법권을 갖고 있는 선교사들의 명의로 변경함으로써 큰 효과를 거두지 못했던 것이다. 당시 마펫 선교사가 134개교, 노블 선교사가 74개교, 쿤스 선교사가 35개교 등 미션스쿨을 운영할 정도였다.

한국교회 핍박이 더 심화되고 탄압으로 전환된 것은 1910년대에 들어서면서, 만주 시장권과 철도경영권 문제로 미·일간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한 것과 초대 총독 데라우치의 반기독교적 태도에 기인한 것이다.

'강제병합' 직후 세계의 지탄을 받으면서도 외국 선교사들과 기독교 박해를 목적으로 '105인 사건'을 조작했다. 이 사건은 1911년 일제가 무단통치의 일환으로 민족운동을 하던 신민회와 기독교를 탄압하기 위해 사건을 확대 조작하여 105명의 애국지사를 투옥한 사건으로 일제의 한국기독교에 대한 비도덕성을 전세계에 드러내는 한편, 기독교 대박해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한편 이 사건은 한국교회 신앙의 심도를 더욱 깊게 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동시에 한국 기독교의 역사성과 민족성을 한층 더 공고히 하였다.

1919년 3·1 운동 때는 일본군에게 경기도 화성에 있는 제암리교회에서 주민들 20여명을 학살당했을 뿐 아니라, 간도(間島) 용정(龍井)시를 중심해 수천 교인들이 일어나 만세를 부르다 17명이 총살당했다. 청산(靑山)에서도 백운교회당이 불태워졌고 부속된 학교 교사도 완전히 파괴됐으며, 이때 9명의 교인이 총살되었다.

새 노루바위(間獐岩)에서도 교회당이 소실되고 33명 교인이 학살되는 참상을 빚었고, 양무정자(楊武亭子)교회당도 완전히 소멸되었다. 이렇게 일본군은 사람들을 교회당에 가둔 채 불을 지르고 총을 쏘고 칼로 찌르고 무차별 학살 등 만행을 저질렀다.

이렇듯 일제의 한국교회 핍박의 절정은 '신사참배'였다. 일제는 한국인을 강제징용, 노역장으로 끌고 가며 신사참배를 강요, 억지 충성을 요구했다. 기독교의 유일신 신앙과 사상, 자유를 말살하기 위하여 남산을 비롯한 곳곳에 신사를 세우고 참배할 것과 예배 시작에도 궁성요배를 강요하였다.

나아가 찬송가에 기미가요· 우미유카바· 황국신민서사 등을 앞부분에 페이지 표기없이 강제 삽입하고 예배시 부르게 하였고, 예배 순서지에는 국민의례라는 이름으로 신사를 향하여 참배하는 동방요배와 기미가요, 황국신민서사를 반드시 하도록 하였다.

다시 말하면 예배를 천황을 섬기며 황국신민을 만들고 대동아 건설에 참여하게 하는 장으로 활용하였다. 또한 '성서강의회'라는 이름으로 경찰서장과 목사가 함께 인도하는 집회를 열어 일제가 벌인 전쟁에 참여를 독려하였다.

일제의 천황숭배와 신사신앙을 축으로 하는 이데올로기는 한국교회의 순교신앙과 함께 공존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한국교회를 노골적으로 억압해서 선교사들과의 관계를 끊고 고립시켜 '황국 신민화 정책'과 '침략 전쟁 수행'에 순응하도록 만들려는 것이었다.

일제는 36년간 사상 유례 없는 잔인하고 원색적인 방법으로 한국교회를 짓밟으며 '신사참배'를 강요당했다. '신사참배'를 반대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감옥에 들어갔고 신앙 부흥과 배일 사상 그리고 독립정신을 고취하면서 일제의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옥사하기도 하였다. 순교자의 피가 한국교회의 기초가 되었고, 현재 '부흥'이라는 열매를 맺고 있다.

한국교회가 꼭 기억해야 할 아픈 역사는 '국치조약'과 '신사참배', '6·25'이다. 나라를 빼앗긴 일제강점기 한국교회는 핍박 중에도 십자가 정신으로 실의에 빠진 민족에게 복음을 통해 희망을 주었다. 그리고 각종 민족운동과 독립운동에 참여하였으며, 지도자를 배출하고 지도력을 양성하여 민족과 역사에 긍정적으로 기여해 왔다.

이것이 한국교회가 가진 끈기와 저력으로 오늘날 회복해야 할 것, 즉 '순교신앙'이다.

이효상 원장(한국교회건강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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