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디 플레이어 원
▲스티븐 스필버그의 최신작 <레디 플레이어 원>의 포스터. 영화가 아닌 게임 홍보물 같은 이 포스터는 이 영화가 전달하려는 가상현실에 대한 메시지를 암시한다.
◈블록버스터 전문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의 인생과 작품 세계

스티븐 스필버그(Steven Spielberg, 1946년생), 할리우드뿐 아니라 국내에서도 흥행의 보증수표처럼 통용되는 이름이다. 스필버그 감독은 제임스 카메론 감독과 함께 역사상 가장 성공한 블록버스터 전문 감독으로 알려져 있다.

흥행력에 있어 다른 감독들과 비교를 불허한다. 수십년 간 세계 영화감독 재산순위 1-3위를 놓치지 않은(2016년 12월 현재 37억달러, 약 4.4조원) 거부인데, 이 재산 대부분을 영화의 감독과 제작을 통해 벌어들였다.

절친한 친우로서 자주 사업 파트너로 함께 일했던 조지 루카스가 영화감독 재산 순위 1위를 지키고 있기는 하지만, 루카스가 번 재산의 상당 부분은 영화의 감독과 제작보다 자기 작품(스타워즈)의 프랜차이즈 판권을 디즈니에 매각하여 획득한 것이다.

순수하게 작품활동을 통해 벌어들인 재산의 규모를 따지자면, 전 세계적으로 스필버그의 아성을 따라잡을 감독은 존재하지 않는다.

스필버그가 할리우드에서 영화감독으로 발탁된 사연을 보면, '낭중지추(囊中之錐)'라는 고사성어가 떠오른다. 어려서부터 대단한 영화광이었고, 특히 영화 제작을 좋아해 이미 13세 당시부터 직접 독립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17세 때 <불꽃(Firelight, 1964)>이라는 제작비 500달러의 저예산 독립영화를 만들어 지역 극장에 잠시 상영하기도 했다. 이처럼 어려서부터 두각을 드러냈지만, 19세 때 당시 영화계 등용문처럼 여겨졌던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교(USC) 영화예술대 (USC School of Cinematic Arts) 입학을 지원했다 두 차례 낙방했다.

유니버설 스튜디오의 무급 인턴으로 일하던 중, 스필버그가 제작한 단편영화를 본 부사장이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당시 주요 영화사 최연소 감독으로 스필버그를 발탁한다.

이후 스필버그는 저예산 TV 영화로 기획되었던 <듀얼(The Duel, 1971)>의 연출을 맡았는데, 그의 연출력이 워낙 출중해서 원래 TV판 74분짜리 영화로 기획된 이 영화를 제작자들이 90분짜리 극장 개봉 영화로 새로 편집할 것을 요구했다.

<듀얼> 제작 4년 후, 스필버그가 감독한 영화 <죠스(Jaws, 1975)>는 그를 본격적으로 블록버스터 감독으로 알리게 된 작품이다. 총 제작비 700만달러가 소요된 이 영화는 개봉 당시 2억달러를 넘는 흥행실적을 기록했다.

1970년대 초중반의 미국은 베트남전 패배, 히피 운동의 발흥과 쇠퇴 등을 겪으며 문화적으로 격변의 시대를 거치고 있었고, 할리우드 영화계는 이 흐름에 제대로 편승하지 못해 흥행에 있어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었다. 상업적으로 정체된 헐리우드에 생기를 불어넣어 준 것이 바로 <죠스>였다.

레디 플레이어 원
▲20대 당시의 스티븐 스필버그.
이후 약 6년간 추가로 그리 큰 흥행을 보이는 작품을 선보이지 못하다, 1981년 <인디애나 존스(Indiana Jones)> 시리즈의 시작, 그리고 1982년 'E.T'를 통해 재차 자신이 헐리우드의 대표 흥행감독임을 입증한다.

그 후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여러 유명한 흥행작, <후크(Hook, 1991)>, <쥬라기 공원(Jurassic Park, 1993)>, 쉰들러 리스트(Schindler's List, 1993)>, <라이언 일병 구하기(Saving Private Ryan, 1998)>, <마이너리티 리포트(Minority Report, 2002)> 등 각기 영화사에 한 획을 그은 작품들을 연달아 감독한다.

스필버그는 감독으로서만 아니라 흥행력을 갖춘 대본을 알아보는 안목에도 일가견이 있다. 국내에서도 크게 인기를 얻었던 TV 시리즈 <형사 콜롬보(Columbo, 1971-2003)>의 초기 제작에 참여한 바 있고, 1977년 루카스 감독이 <스타워즈>의 첫 시사회를 열었을 때 대부분의 감독들이 흥행에 실패할 것이라고 판단했으나 스필버그 홀로 대대적인 흥행 성공을 거둘 것으로 예견했다.

공포물 <그렘린(Gremlins)>, 어드벤처물 <구니스(Goonies, 1985)> 등 준수한 흥행을 거둔 작품들의 제작을 맡았고, 무엇보다도 <백 투 더 퓨처(Back to the Future, 1985)> 시리즈의 제작을 담당해 로버트 저메키스(Robert Zemeckis) 감독을 발탁하는 등 제작 부문에서도 정상급 실력을 갖추고 있음을 입증했다.

레디 플레이어 원
▲스필버그가 감독한 흥행작 주인공들. 상단 중앙으로부터 시계방향으로, <인디애나 존스>, <컬러 퍼플>, <쉰들러 리스트>, <죠스>, , <라이언 일병 구하기>, <레디 플레이어 원>의 주인공.
스필버그 작품의 특징은 단순하지만 흥미롭고 창의적인 서사, 그리고 이 서사를 시각적으로 구현하는 환상적인 연출력으로 대표된다. 기실 서사 측면에서 스필버그의 작품들은 헐리우드 최정상급으로 인정받지는 못한다. 오히려 서사의 기발함만 따지자면 로버트 저메키스, 크리스토퍼 놀란(Christopher Nolan), 코엔 형제(Coen brothers) 같은 후세대 감독들이 더 뛰어난 면모를 보인다.

그러나 스필버그의 작품들은 서사가 비교적 쉽고 평이한 대신, 서사의 설정 자체가 창의적인데다, 이 창의적 설정을 구현하는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장면들 하나 하나의 시각적 묘사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큼 뛰어나다. 이는 그의 영화 제작에 담긴 철학을 보여준다.

영화에 대한 스필버그의 정의는 다음과 같이 간단하게 표현할 수 있다. "영화는 상상(imagination)이다." 이 당연한 말을 누구보다도 제대로 실천하는 이가 스필버그라는 사실을 부인할 이는 거의 없다.

스필버그의 어린 시절 일화 가운데 그가 상상력을 얼마나 중시하는지 보여주는 것이 있다. 스필버그는 초등학교 시절 난독증이 있어 책을 잘 읽지 못했고, 유대인 혈통이라는 점 때문에 학교에서 따돌림을 받아 학업에 관심이 없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 그가 유일하게 좋아하는 것은 영화를 감상하는 것, 그리고 감상한 영화에 이리저리 살을 붙이며 상상 속에서 편집하는 일이었다. 스필버그는 10대 초반 대부분의 시기 동안 영화를 보고 상상하고, 영화를 보고 상상하는 일과를 반복했다. 그리고 이런 끊임없는 상상력 훈련은 후일 그가 여러 편의 '환상적인' 영화들을 감독하고 제작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그래서일까. 1993년 <쥬라기 공원> 시리즈가 전 세계적으로 역사상 전례가 없는 흥행성적을 보일 무렵, 스필버그식 어린이 상상력 훈련이라는, 돌이켜 생각해 보면 촌극에 가까운 유행이 일어났던 적이 있다.

당시는 마침 대학교 입학시험이 기존의 학력고사에서 수학능력시험으로 전환되던 시점(1994년 8월 첫 시행)이라, 기존의 암기식-주입식 교육이 아닌 독해력과 창의력이 중시되는 교육의 시대가 온다는 루머가 학부모들 사이에 돌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를 틈타 스필버그식 상상력, 창의력 훈련이 학부모 사이에 관심을 불러있으켰던 것이다. 이 촌극은 수능시험의 실제 시행 직후 순식간에 사라졌다. 수능시험이 일부분을 제외하고는 기존의 암기식-주입식 교육법으로 대처가 가능하다는 것을 사교육계 족집게 강사들이 입증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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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필버그가 가진 최고의 영화적 자산은 다름아닌 그의 상상력이다. 오바마 전 미국대통령은 그에게 대통령 표창 메달을 수여하며 그의 상상력을 극찬한 바 있다.
◈상상과 가상: 무엇이 현실인가?

스필버그 감독의 최신 개봉작 <레디 플레이어 원(Ready Player One)>은 가상현실 게임에 얽힌 서사를 다루고 있다. 이번 작품의 서사는 아예 참신치 못하다 못해 뻔하기까지 하다. 가상현실 게임에 대한 영화는 이미 1994년작 <브레인 스캔(Brainscan)>을 비롯해 1999년의 <13층(The Thirteenth Floor)>, 2001년의 <아발론(Avalon)>, 2009년의 <게이머(Gamer)> 등 여러 편이 제작된 바 있다.

가상현실 게임에 대한 서사는 영화 외에 소설을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비록 제대로 된 문학 취급을 받지는 못하지만, 양판형 문학으로 분류되는 장르소설들 속에서는 가상현실 게임에 관한 서사가 차원이동 서사와 함께 아예 하나의 세부장르로 분류되고 있다.

실제로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 자체가 동명의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이 영화의 설정들은 진부하다 못해 거의 클리셰에 가깝다. 무수한 경쟁자들 가운데 단 한 명에게만 주어지는 막대한 보상, 이를 위해 분투하는 게임 참여자들, 거대 기업의 횡포에 대한 개인의 저항, 가난하고 비천한 처지에 처한 평범한 인물의 게임을 통한 인생역전 등, <레디 플레이어 원>의 설정들은 기존 가상현실 게임의 전형적 설정들을 거의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그럼에도 <레디 플레이어 원>은 트레일러 영상만으로도 많은 이들의 향수를 자극한다. <레디 플레이어 원>의 주무대인 가상현실 세계 오아시스(Oasis)에 등장하는 수많은 캐릭터와 메카닉 기체들이 1980년대 이후 등장한 무수한 영화, 만화, 게임 등 친숙한 하위문화 콘텐츠의 주인공들이기 때문이다.

<백 투 더 퓨처>의 드로리안, 일본의 디스토피아적 메카닉 애니메이션 <아키라(Akira, 1988)>의 가네다 바이크, 역시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을 다룬 영화 <매드 맥스(Mad Max, 1979)>의 인터셉터, <전격 Z작전(Knight Rider)>의 키트(Kitt)와 같은 기체가 등장한다.

그런가 하면 <스트리트 파이터> 시리즈의 류와 춘리, <반지의 제왕(The Lord of the Rings, 2001)>의 간달프, 팀원들, 공포물 <나이트메어(A Nightmare On Elm Street, 1984)>의 주인공 프레디 크루거, <수어사이드 스쿼드(Suicide Squad, 2016)>의 조커와 할리퀸, 1996년작 게임이자 영화로도 여러 편 제작된 <툼 레이더(Tomb Raider)>의 라라 크로포드, 아이언 자이언트, 건담 같은 캐릭터들이 등장한다.

말 그대로 너드 문화의 핵심을 이루는 캐릭터들이 총출동하는 영화가 <레디 플레이어 원>이다. 1980-90년대 하위문화를 섭렵하며 청소년기를 거친 이들의 향수를 자극하기에는 충분한 셈이다.

레디 플레이어 원
▲<레디 플레이어 원>에 등장하는 다양한 게임 캐릭터들.
캐릭터 판권 문제 때문에 제작상 상당한 어려움을 겪을 가능성이 높았던 작품이고, 또 실제로 소설 원작에 등장한 몇몇 캐릭터들은 판권 때문에 영화에 등장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다양한 캐릭터들을 하나의 영화에 등장시킬 수 있었던 것은 스필버그 감독의 명성이 가진 힘 때문이라 봐도 무리가 없다.

이 영화는 스필버그 감독의 상상적 세계관을 여실하게 보여주는 영화다. 그가 어린 시절부터 쌓아 온 상상의 나래들이 영화 내에서 적나라하게 펼쳐진다. 사실 어떤 측면으로는 영화의 서사보다, 구름처럼 몰려오는 캐릭터들의 향연이 더 즐겁게 느껴진다. 영화 속에 어떤 캐릭터들이 등장하는지 알아맞추는 가운데 시간이 한참 지나갈 지경이다.

이처럼 20-30년 전 하위문화 캐릭터들이 현재의 청년, 중장년층에게 주는 향수는 이 영화가 갖는 주된 매력 가운데 하나다. 게다가 이 캐릭터들은 스필버그 특유의 화려한 상상력을 통해 참신한 방식으로 시각화됐다. <레디 플레이어 원>의 캐릭터들이 확보한 매력과 그에 대한 관객의 몰입도는 이 영화가 제시하는 세계관의 '가상성'을 '실재적'인 것으로 인식시키는 효과를 연출한다.

이런 허구의 실재화는 서구 문화 가진 가장 큰 동기이자 매력 가운데 하나다. 동양의 전통문화와 예술은 서구 전통문화 및 예술만큼 허구를 실재화하는 데 능숙하지 않다.

동양의 전통문화는 허구적인 서사나 상상을 표현할 때, '절반쯤만' 실재화함으로써 그 가상성과 실재성의 조화를 이루는 데 주력한다. 반면 그리스-로마 신화로부터 확인되는 서구 전통문화의 실재화 작업은 때로 가상적 상상을 현실보다 더 현실적으로 연출한다. 고대 그리스 미술은 이런 노력들을 대표하는 문화유산이다.

레디 플레이어 원
▲서구 전통문화는 동양의 전통문화에 비해 허구적 상상, 즉 허상을 실재화하는, 특별히 신의 형상을 실재화하는 데 있어서 탁월한 능력을 보여 왔다.
로마 제국을 기반으로 세계인의 신앙으로 성장했던 기독교는 항상 이렇게 생동감 있게 실재화된 서구의 전통철학, 예술, 문화와 투쟁해야 했다. 많은 초대교회 교부들과 기독교 신학자들은 실재처럼 지극히 정교하게 표현된 고대 그리스인들의 허구적 신화, 철학, 그리고 신학에 저항하는 가운데, 영혼의 구원을 위해 만물이 거주하고 있는 물질 세계의 현실을 직시할 것을 요구했다.

그들이 드러내 준 세계의 진실은 우리가 몸담고 살고 있는 세계가 죄로 물든 세계, 그래서 교만과 완고함 가운데 참된 신적 진리를 추종하기보다, 가상적 신화와 철학을 추종하는 세계인 동시에, 그럼에도 그리스도의 희생적 은혜로 인해 구원의 기회가 열려 있는 세계였다.

4-5세기의 위대한 기독교 신학자이자 그 이전 기독교 신학의 집대성자 어거스틴은 성서가 가르치는 이 세계의 진실과, 서구 전통 이방문화가 가르치는 세계에 대한 허구적 이해를 구분하기 위해 상상의 힘에 의해 만들어진 마음 속의 헛된 영상(imago), 즉 '판타스마(φάντασμα, phantasma)'라는 개념을 지목하여 가르쳤다.

어거스틴의 정의대로라면, 판타스마라는 말은 '허상'으로 규정되는데, 어거스틴이 그의 저서 <고백록(Confessionum)>, <삼위일체론(De trinitate)>, <하나님의 도성(De civitate dei)> 등에서 공통적으로 지목한 허상이란, 여러 근거없는 상상들 가운데 특별히 신과 영혼의 세계에 관한 상상들을 가리켰다.

그는 이 판타스마라는 말을 그리스 신화의 신들에 대한 상상, 마니교의 신에 대한 상상, 기독교회 내 플라톤주의에 영향을 받은 이단들의 신에 대한 상상을 지목하는 용어로 채택했다. <계속>

박욱주 박사(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 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냈다면 쉽게 공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