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준 장로.
▲이효준 장로.
부활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부활은 죽지 않고서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내가 죽지 않고서는 선한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선한 일에는 탐심이나 교만, 권력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선한 일은 그저 순수하고 신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은 욕심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하며, 정직하고 신실한 성도들에게만 부활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들마다 문제 없는 교회가 없을 정도로 심각한 수준에 와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 문제들은 바로 자신을 내려놓지 못하고, 자신의 생각과 자존심, 탐심과 권력에서 탈피하지 못한 채 그것들을 쟁취하려는 것들 때문입니다.

오늘날 각 교회 기관이나 당회, 노회, 총회가 주님이 원하시는 방법대로 하지 않고, 자신들의 잇속만 챙기는 불법으로 교묘히 성도들을 속이는 기관으로 전락하고 만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전, 죽음 직전에 있었던 산헤드린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로마 제국은 많은 점령지를 쉽게, 그리고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점령지의 상황에 맞게 그곳에 지방자치 정부를 허용하였습니다. 이러한 로마의 정책에 편승한 유대인들의 자치 기관이 바로 '산헤드린 공회'입니다.

물론 로마는 비록 지방자치 기관을 허용하면서도, 그것을 총독의 권한 아래 예속시키기 위해 자치 기관의 장은 로마가 직접 임명했습니다. 유대의 산헤드린 공회의장을 임명함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는데, 예수님 당시 산헤드린 공회의 의장은 A.D. 6-10년 경 유대 총독으로 있었던 코포니우스에 의해 임명된 대제사장 안나스 였습니다.

따라서 로마 제국은 점령지를 통치함에 있어 항상 지방자치 정부가 치리해야 할 문제와 로마 총독, 혹은 지방장관이 처리해야 할 문제를 구분해야 했습니다. 특히 유대 지역의 경우 유대인들의 종교적인 문제에 대해 로마 총독은 될 수 있으면 개입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본디오 빌라도가 예수를 재판하다 그를 헤롯 안디바에게 넘긴 것도, 예수가 유대인의 종교 문제와 관련돼 고소당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또 로마 총독은 유대교에 대한 유대인들의 열정을 감안하여, 예루살렘에 파견된 로마군의 군기 위에 황제의 초상화도 그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역사적으로 산헤드린은 바벨론 포로 시기 이후 예루살렘 귀환한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성벽의 재건을 감독하고 이를 계획하던 '귀족회의'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고 합니다. 이후 '원로회의'로 성격이 바뀌었으며, 이 원로회의가 하스몬 왕조 통치 하에서 비로소 산헤드린이라 불러졌다고 합니다.

지금의 교회 내 당회와 노회, 총회가 당시의 산헤드린이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사전에 예수님을 사형시킬 것을 이미 결정해 놓고, 속전속결로 재판을 진행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하는 말로 '짜고 치는 고스톱'이었지요.

특히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몸을 더럽히지 않겠다며, 로마 법정 안에는 들어가지 않는 위선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래서 로마의 재판관 빌라도가 고소인들에게 질문하고자 법정(관정)에 몇 차례 들락거리는 희한한 재판이 전개되었습니다.

더구나 참람죄를 선고한 종교재판, 산헤드린 공회에서의 유대법에 따른 종교재판에서 정당한 재판임을 민중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예수님에게 참람 죄 죄목을 덮어씌웠습니다. 예수께서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포한 사실을 들추어내, 참람죄로 몰고 갔습니다. 2회에 걸쳐 제사장들 앞에서 예비재판 후, 산헤드린 앞에서 본 재판이 2회 이루어졌습니다.

또 로마 정부에 반역한 죄로 몰고 가려 했습니다. 정치적·형사적 재판을 통해 빌라도에게 사형 승인을 얻고자 유대 법정에서는 예수님에게 민중 소요 반역이라는 정치적·형사적 죄목을 만들어 씌운 것입니다. 빌라도의 재판과 헤롯 앞 재판을 통해 대죄인 반역죄로 몰아간 것입니다.

하지만 빌라도는 아내로부터 예수님을 죽이지 말도록 권유를 받아, 유대인들의 음모와 질투에 걸려든 예수를 놓아주려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정당한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군중의 비위를 맞추거나 동정심을 유발코자 채찍질을 하고 가시관을 씌우고 홍포를 입히는가 하면, '명절 특사' 방식으로 석방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바라바를 석방하라는 군중들의 함성에 역습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만일 빌라도가 바라바를 선택하지 않고 예수를 놓아 주었더라면, 훗날 어떻게 되었을까요? 하지만 주님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섭리하심에 순종하여 자신을 택하도록 가만히 있었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는 빌라도와 같은 어정쩡한 성도들이 많아, 오히려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교회 지도자들과 상급기관인 노회와 총회를 바라보면 정말 한심합니다. 이웃 교회 성도들이 문제가 있어 아파 신음하며, 상급기관을 바라보고 있는데, 오히려 상급기관 재판국은 로마 시대 산헤드린 공회처럼 자신들의 할 일을 제대로 하지 않고 있어 개탄스럽습니다.

아무 죄 없는 성도들에게 죄목을 씌워 면직·출교시키는 희한한 방법을 보면서, 불난 집에 불구경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 심히 한탄스럽습니다. 자신의 잇속에 협력하지 않는다 해서 40년 동안 찬양대 반주를 맡아 수고한 권사를 하루아침에 내쫓지 않나, 40년 동안 교회 찬양대에서 수고한 권사 집사를 아무 이유도 없이 해고시키질 않나, 35년 동안 교회학교를 위해 묵묵히 수고한 권사에게 더 이상 교사를 하지 못하도록 압력을 넣지 않나, 마음에 들지 않는 성도들에게 떠나가라고 하지를 않나....

이게 교회입니까? 암에 걸려 오늘내일을 살 수 있을까 하는 암 환자에게 심방 한 번 하지 않는 목사가 목사입니까?

세상은 갈수록 발 빠르게 움직이는데, 교회 안에는 아직도 로마 시대 산헤드린 법정처럼 예수를 못박으려 하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울 뿐입니다. 잃은 양 한 마리를 구하려고 그렇게도 애쓰고 지금까지도 돌아오기를 기다리는데, 오히려 교회는 2명만 있어도 좋으니 떠나가라고 하니, 이런 분이 참 목자인지 이 글을 보시는 분들은 판단하시기를 바랍니다.

고난주간이 지나고 부활을 맞는 주일입니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그들은 주님의 고난을 진정으로 알고 있는지, 부활에 참 의미를 깨닫고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고난의 진리와 부활의 진리를 안다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자신들의 죄상을 낱낱이 고백하여, 주님의 고난과 부활의 기쁨에 함께 동참해야 하지 않을까요?

사흘만에 다시 살리라신 주님 말씀을 건성으로 들었던 제자들은 충격과 실망, 그리고 두려움에 떨면서 죽지 못해 사는 날들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그런 그들에게 나타나셔서 자신의 부활을 알리셨고, 직접 보여주기까지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그들은 죽음에서 다시 살아났고, 그들의 충격은 다시 기쁨으로, 실망은 커다란 소망으로, 두려움에는 용기로 변했습니다.

우리는 오늘 부활을 체험한 사도들의 환호와 기쁨, 희망과 용기를 다시 체험하며, 우리의 것으로 삼아야겠습니다. 비록 우리 신앙인들이 뜻하지 일을 당하거나 큰 불행을 당할지라도, 절망하지 않고 꿋꿋하게 살 수 있는 힘은 바로 주님의 부활에서 오는 것입니다. 하루하루 연속되는 고통과 절망 가운데서도 주님의 부활에 동참 할 수 있는 의지가 있어야 하며, 그 희망 때문에 지금도 우리는 살아갈 수 있고, 때로는 웃음도 지을 수 있습니다. 라고 간증 할 수 있는 성도님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 세상에서 삶에는 날마다 우리 가운데에서 일어나는 작은 '부활'들을 체험하고 실현함으로써, '큰 부활', 영원한 '부활'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 가족과 친구들과 나누는 따뜻한 말 한 마디가 바로 일상의 작은 부활입니다. 내가 성실히 노력해서 형편이 조금 나아지는 것, 기도와 찬양, 예배를 통해 영적으로 조금씩 성장하는 것, 이웃과의 갈등과 불화를 해소하고 화해하면서 마음의 고통을 더는 것, 오랜 병고에서 조금씩 털고 일어나는 것, 배우자를 만나 가정을 이루고 사랑으로 아이를 낳는 것 등 이 모든 것이 '작은 부활'인 것입니다.

이런 작은 부활들이 하나둘 모이고 쌓여, 결정적으로 주님 곁으로 가까이 갈 수 있는 바로 '큰 부활'에 이르게 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기쁨이든, 고난이든, 고통이든, 죽음이든, 그것을 통해 주님의 부활에 이르러야 하는 것임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절인 오늘은 주님이 마련하신 날이고, 우리는 이 날을 기뻐하며 즐거워야 할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는 당회에서부터 시작하여 모든 기관이 성도들을 위한 기관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작은 부활이요 주님으로 칭찬 듣는 작은 부활임을 깨닫고, 큰 부활에 이르도록 나를 죽이고 성도들과 이웃을 높이며 살아가는 주님의 십자가 군병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효준 은퇴장로(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