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만나러 갑니다
▲일본 영화를 리메이크한 <지금 만나러 갑니다>. 죽은 아내의 영혼이 선사하는 소소한 행복을 표현한 영화다.
[박욱주의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

◈작은 행복과 영혼: 죽은 영혼이 선사하는 6주간의 행복

2004년 일본에서 개봉한 <지금 만나러 갑니다>는 로맨스 영화라는 한계, 그리고 일본 영화라는 한계를 극복하고 400만 관객을 동원했다. 일본 관객들조차 스스로 마이너한 범주에 속한 것으로 취급하는 자국 영화가, 그것도 스크린에서는 티켓파워를 거의 발휘하지 못하는 로맨스 영화가 400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는 것은 대단한 성과다.

이런 흥행의 원인으로는 여러가지가 지목될 수 있다. 우선 캐스팅 면에서, 당시 최고 인기를 누리던 타케우치 유코(竹内 結子)가 주연을 맡았다. 서사 면에서, 지극히 평범하면서도 애틋한, 그래서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사랑 이야기를 담았다. 그 애틋함을 표현하는 감독의 심리묘사 역시 훌륭했다.

그리고 소재 면에서, 타임 슬립과 부활이라는 초자연적 현상을 다뤘다. 영혼과 신비한 현상에 대한 일반의 관심이 지극히 높은 일본 내에서 이는 상당한 호응의 요소로 작용했다.

이 가운데서 흥미를 끄는 점은 바로 서사의 평범함과 소재의 초자연성 간의 절묘한 조합이다. 영혼의 신비가 평범한 삶의 행복을 위해 봉사하는 것, 이는 일본의 신토적 종교성에 깃들어 있는 현세적 기복성을 대표하는 염원이다.

신토적 종교성의 본질적 구성요소는 물활론적 세계관과 조상신 숭배다. 그런데 신토의 조상신 숭배는 한국과 중국의 유교적 혹은 무속적 사상과는 차별화된 특징을 보인다. 신토의 조상신 숭배는 죽은 자의 영혼과 자연의 합일을 강조한다. 조상신 숭배 사상이 물활론적 세계관의 한 세부사항으로 편입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일본 신토의 조상신 숭배는 한국의 전통적 조상신 숭배처럼 대를 이어 족보를 따지는 방식으로 구현되지 않는다. 물론 사망한 친부모 및 직계 가족에 대해서는 집안 내에 위패를 두고 예를 올리지만, 자신과 직접 관련이 없는 경우 2세대 및 3세대 위의 조상들에게 예를 올리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자신의 생활과 직접 연관되어 있는 신에게 그때그때 예를 올리고 복을 비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는 조상신들이 자연과 합일되고 동화되어 자연물 속의 정령으로 새롭게 재탄생된다는 물활론적 정령 신앙 때문이다. 그리고 이 순환적 정령 신앙은 불교의 윤회설과도 상통하는 측면이 있어 일본의 불교계 내에서도 자연스럽게 용인되어 왔다.

지금 만나러 갑니다 신토 숭배
▲가정에 간소한 위패를 설치하고 죽은 가족에게 예를 올리는 일본의 신토적 조상신 숭배 전통은, 오늘날 일본 젊은층 사이에서는 많이 사라졌으나 중장년층 사이에서 여전히 고수되고 있다.
<지금 만나러 갑니다>는 바로 이런 신토의 영혼 이해를 깊게 반영한 작품이다. 이 영화의 줄거리를 간략히 살펴보면, 우선 고등학교 시절부터 서로에게 드러내놓고 다가가지 못하는, 그러나 서로가 서로를 짝사랑하는 두 남녀, 타쿠미(나카무라 시도 분)와 미오(타케우치 유코 분)가 등장한다.

이 둘은 대학 시절 우연히 재회하고, 결국 서로 확인하지 못했던 사랑의 결실을 맺어 연인이 된다. 중간에 이 연인 관계에 위기를 맞던 어느 날, 미오는 교통사고를 당하고 만다.

의식불명 상황에서 미오의 영혼은 시간을 넘어 약 9년 후의 미래로 '성육신'하는 타임 슬립을 경험한다. 이 미래에서 미오는 자신이 타쿠미와 결혼해 사내아이를 낳았으나 아이가 5살 되던 해 28살의 나이에 병으로 죽은 것을 알게 된다. 그녀가 '타임 슬립'한 시점은, 바로 미래의 자신이 죽은 후 1년째 되던 시기다.

미오는 이 6주 동안 미래의 자신이 남긴 일기장을 통해, 짧다면 짧은 8년 동안의 소박한 결혼 생활이 지극히 행복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타임 슬립이 불과 6주 만에 끝날 것을 알게 된다. 이 6주 동안 젋은 날의 아내가, 그리고 어머니가 돌아온 것을 경험한 타쿠미와 아들 유우지(타케이 아카시)는 짙은 행복과 아쉬움을 동시에 절감하며 소중한 시간을 함께 나눈다.

6주 간의 타임 슬립에서 돌아온 미오는 그 6주 동안의 행복을 잊지 못해, 자신이 일찍 죽을 것을 알고도 다시 타쿠미를 찾아간다.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하는 그 짧은 삶, 그리고 짧은 기적의 시간 때문에 미오는 혹시 장수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다른 삶의 길을 포기하고 그녀의 마음이 이끄는 대로, 그리고 정해진 미래대로 타쿠미를 찾아간다.

이 때 그녀가 일기장에 적은 글귀가 바로 영화의 제목이 된다. '타쿠미, 유우지! 기다려줘. 지금, 만나러 갑니다.' 타임 슬립을 통해 미래의 타쿠미와 유우지를 만나고 돌아온 20세의 미오가 타쿠미를 만나러 가는 것이다.

지금 만나러 갑니다
▲일본 개봉작 <지금 만나러 갑니다>. 죽은 아내의 영혼이 과거로부터 부활해 짧은 행복을 선사하는 내용을 담아낸다.
2주 전 개봉한 한국판 <지금 만나러 갑니다>의 내용 역시, 일부 설정 및 캐릭터 성격을 제외하고는 대동소이하다. 타쿠미 역은 소지섭이, 미오 역은 손예진이 맡아 열연했고, 국내에서도 누적관객수 200만(손익분기점 150만)을 넘기는 저력을 발휘했다. 국내에서도 멜로-로맨스 영화의 스크린 상 약세는 두드러진 편이다. 이런 가운데 200만이라는 관객 기록은 대단한 성과로 평가된다.

이 작품의 서사 역시 소확행과 직접적인 연관을 갖는다. <리틀 포레스트>가 먹거리를 통해 카미(神)와 합일하는 데서 오는 작은 행복을 그려낸다면, <지금 만나러 갑니다>는 인격적 관계를 통해 카미와 연합하는 데서 오는 작은 행복을 묘사한다.

양측 모두 소확행을 선사하는 이는 카미, 즉 신토의 신이다. 이 신은 유일신이 아니라 복수(複數)의 신들이다. 태양신이자 최고신이며, 일본 군주 가문의 시조인 아마테라스 오오카미(天照大神)를 필두로, 만물에 깃든 잡다한 신들이 바로 일본인들에게 소소한 마음의 위안을 선사하는 주인공이다.

죽은 사람의 영혼 역시 넓은 의미로 보면 물질(신체)에 붙은 정령신으로 분류된다. 이 신은 물질에 내재돼 있지만, 때로 물질적 질서를 초월하는 힘을 갖고 있고, 일본인들은 신들이 가진 이런 힘을 믿고 일상의 복을 기원하는 풍습을 가졌다.

<지금 만나러 갑니다>에서 미오 혹은 수아(손예진 분)의 영혼이 9년이라는 시간을 앞질러 미래로 성육신한 것은 바로 정령신의 초월성에 대한 일본인들의 신토적 믿음을 반영한다.

이 영혼이 6주 간 사랑하는 이들 곁에 머물며 선사한 것은 지극히 일상적이고 평범한 현세적 행복이다. 부귀영화를 누리게 해 주는 것도 아니다. 사랑의 관계 속에서 누리는 마음의 평화, 이것이 신토가 불교의 영향 가운데서 제시하는 행복의 정체다. 소확행은 바로 이런 행복 개념을 이어받아 정립되었다는 것이 <리틀 포레스트>와 <지금 만나러 갑니다>를 통해 확인된다.

◈참된 행복과 영혼: 하나님의 진리로부터 유래되는 영혼의 행복의 장애물, 소확행

소확행의 저변에 자리잡고 있는 신토 사상은 한국인들이 극도로 경계하는 일본의 군국주의적 신토 사상보다도 더 위험하다. 전쟁에서 죽은 영혼들이 일본의 산천에 수호신으로 재탄생한다는 믿음 때문에, 일본 지도층 다수는 주변국의 숱한 비난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야스쿠니 신사에 제물을 바치고 예를 올린다.

그런데 이런 사상은 그 명백한 정치색 때문에 한국인들에게는 경각심의 대상이 될 뿐이다. 정치적이고 군국주의적 신토 사상은 한국인의 마음에 어떠한 감흥도 주지 못한다.

반면 소확행의 주된 방편으로 제시되는 정령 신앙은 먹거리를 통해, 애정 관계를 통해, 한국인도 공감할 수 있는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특히 조상신 혹은 죽은 자의 영혼으로부터 얻는 위로와 감동에 대하여 기독교인들이 평소 갖는 경계심을 무장해제시키는 힘을 갖고 있다. 뿐만 아니라 사람이 신으로부터 수득하기를 갈망하는 참된 행복의 의미를 왜곡하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죽은 자의 영혼으로부터 얻는 위로와 감동에 대해서는 이미 <신과 함께> 편에서 자세히 다루었으므로, 여기서는 소확행의 이념이 초래하는 참된 행복의 의미 왜곡에 대해서 간략히 살펴보려 한다.

리틀 포레스트 지금 만나러 갑니다
▲일본식 소확행을 소개함으로써 국내 관객들의 마음에 감흥을 일으킨 영화, <리틀 포레스트>와 <지금 만나러 갑니다>.
기독교가 가르치는 행복이란? 지극히 당연하게도 구원과 영생이다. 그런데 이 간단한 두 용어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다양한 내용과 사례들을 담아내고 있다. 그래서 수많은 신학자, 목회자, 그리고 말씀의 교사들이 구원과 영생이 수여하는 참된 행복의 구체적 내용을 내보이고 가르치기 위해 고심해 왔다.

그 가운데, 기독교 신학 역사상 최초로 행복한 삶에 대한 논의를 본격화한 것은 어거스틴이라 할 수 있다. 그리스도와 사도들, 그 외 초대교회 교부들 다수가 행복에 대한 가르침을 남기지 않은 것은 아니나, 이 행복이 실제 현실적 삶에서 어떤 방식으로 구현되는지 세밀하게 가르치기 시작한 최초의 인물로 어거스틴을 지목하는 데 많은 기독교 역사가들이 동의한다.

어거스틴은 그의 대표적 신앙서이자 신학서인 <고백록> 제10권에서 사람들이 추구하는 행복의 모습들을 다음의 일곱 가지로 분류했다.

첫째는 애욕과 정념의 충족, 둘째는 식욕의 충족, 셋째는 좋은 냄새와 향기를 즐김, 넷째는 아름다운 소리와 음악을 즐김, 넷째는 아름다운 것들을 감상함, 다섯째는 새롭고 신기한 것에 대한 호기심의 충족, 여섯째는 교만과 칭찬받고자 하는 욕심의 충족, 일곱째는 자기의 기분만을 생각하는 이기심의 충족이다.

어거스틴은 이런 욕구들의 충족으로부터 오는 기쁨들이 헛될 뿐 아니라, 영혼에 대단히 해롭다고 역설했다. 그는 참된 기쁨과 행복은 영혼의 빛이요 생명이며, 지고한 진리이자 아름다움이신 하나님을 알고 그와 함께하는 데서 나온다고 가르친다.

지금 만나러 갑니다
▲신토 사상에 바탕을 둔 일본식 행복의 길은 기독교적 행복의 길과는 상반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참된 기쁨을 알기 전에 앞서 설명한 일곱 가지의 기쁨에 현혹되어 그 속에 안주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기쁨과 행복을 구하지 않는다는 것이 어거스틴의 관찰인 동시에 비판이다.

어거스틴이 나열한 헛되고 해로운 행복들을 소확행과 비교해 볼 때, 양자가 거의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점에 놀라움을 금치 않을 수 없다. 어거스틴이 1,700년 전에 진술한 헛된 행복의 세부적 내용들이 오늘날 그대로 행복의 기준이 되고 있다. 전편의 칼럼에서 제시한 무라카미 하루키가 제시한 소확행의 내용을 다시 한 번 살펴보자.

"막 구운 따끈한 빵을 손으로 뜯어 먹는 것, 오후의 햇빛이 나뭇잎 그림자를 그리는 걸 바라보며 브람스의 실내악을 듣는 것, 서랍 안에 반듯하게 접어 넣은 속옷이 잔뜩 쌓여 있는 것, 새로 산 정결한 면 냄새가 풍기는 하얀 셔츠를 머리에서부터 뒤집어쓸 때의 기분...."

소소한 식욕, 안목의 정욕, 소리와 음악에 대한 소욕, 주위 세계의 일상적 정황들이 나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것에 대한 만족 등, 소확행의 내용은 기독교인들이 참된 행복을 추구하는 데 장애물로 작용하는 낮은 등급의 행복들을 나열한 것과 일치한다. 그리고 <리틀 포레스트>나 <지금 만나러 갑니다>는 이 행복을 이루는 방편으로 세상과 사물에 깃든 정령신들과의 조화 및 합일을 제시한다.

결론적으로 <리틀 포레스트>와 <지금 만나러 갑니다>가 제시하는 일본식 행복의 길은 바로 현세의 잡다하고 소소한 행복들이 그 근본에서 부정적인 방향의 영적 코노테이션을 담지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기독교는 무조건적으로 금욕을 강제하지는 않지만, 현세적 행복을 탐닉하고 거기에 만족하는 것 역시 바람직하게 보지 않는다. 크든 작든 간에, 현세적 행복이 마음을 지배하는 즉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혼의 참된 행복은 우리의 마음에서 멀어진다는 것이 기독교적 가르침이다.

그리고 실상 오늘날의 현실에서 본다면, 현세적으로 규모가 큰 행복보다 규모가 작은 행복, 즉 소확행이 우리 마음을 영혼의 행복에서 멀어지게 하는 더 큰 위협으로 작용하고 있다. 문명과 기술이 발달한 현대에는 이전 세대보다 적은 노력으로도 이 소소한 행복들을 채울 길이 얼마든지 존재하기 때문이다.

박욱주
▲박욱주 박사.
박욱주 박사(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 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냈다면 쉽게 공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