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기독교는 진지하기는 하지만 심각하지는 않으며, 진중한 무게감은 있으나 율법주의자들의 그것 같이 내려누르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일부 신자나 교회의 예배 분위기에서 풍겨내는 경직됨과 무거움은, 그들에겐 경건이 무겁고 심각한 것과 동일시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특히 찬송할 때 지나치게 감정이 억제된 모습에서, 송영의 기쁨을 느끼기보다는 잿빛 만가(輓歌)를 듣는 둣 합니다.

종교개혁의 전통을 따르는 교회들에 찬송에 절제미가 있다는 것은 익히 알려져 있습니다. 지나친 감정의 발분이 말씀 중심의 신앙을 퇴색시킬까, 곡조보다는 가사에 치심하도록 한 칼빈 선생의 가르침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칼빈을 비롯해 그의 영향을 받은 당대 작곡자들은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음계, 리듬, 화성의 사용을 억제했습니다. 이런 칼빈의 생각 저변에는, 타락된 인간은 지성과 의지가 제어되듯 감정도 제어돼야 한다는 인간의 전적타락사상이 깔려있었습니다.

그 외에도 이교적인 샤머니즘이나 성경에 나오는 바알 선지자들의 강신(降神) 놀음(왕상 18:28) 같은 것에 대한 경계심도 일조한 듯합니다.

그런데 오늘 일부 예배와 찬송에서 보는 엄격주의는 칼빈의 가르침을 넘어(500년이 지난 오늘날 칼빈이 오신다면 이런 엄격주의에 동의할 것인가? 라는 의문이 들 정도입니다), 중세의 금욕주의(asceticism)로 회귀한 듯 한 느낌을 들게 합니다.

주지하듯 스토아주의(Stoicism)로 대변되는 중세 금욕주의 철학은 물질, 성, 쾌락, 음식(딤전 4:3, 골 2:23)에만 국한되지 않고, 감정도 포함됐습니다.

이는 철학의 궁극적인 목적으로서 인간의 행복 추구 곧, 자기 보존을 위한 일종의 방어 기제(defensive mechanism)였습니다. 즉 평소 '감정'에 초월해 있으면 고통, 슬픔을 만날 때 심리적 충격을 최소화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이러한 자기보존적 감정금욕주의(emotion asceticism)가 중세 로마교와 결탁하여, 음습하고 무거운 수도원주의 경건을 창출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여타의 금욕주의는 이교적 이원론주의라 하여 이미 개신교회 안에서 퇴출됐지만(초대교회에서도 이미 귀신의 가르침으로 정죄됐습니다, 딤전 4:3), 스토아적 감정 금욕주의는 일부 교회들에서 잔존하는 듯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교적인 광신주의는 금했지만, 신앙현상으로서의 자연스러운 감정 표출은 금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적극적인 신앙의 감정 표출을 장려하며 그것을 하나님을 높이는 방편이라 말씀합니다.

"의인은 기뻐하여 하나님 앞에서 뛰놀며 기뻐하고 즐거워할찌어다(시 68:3)", "백성아, 우리의 하나님을 찬양하여라. 그분을 찬양하는 노랫소리, 크게 울려 퍼지게 하여라(시66:8)", "다윗과 이스라엘 온 무리는 하나님 앞에서 힘을 다하여 뛰놀며 노래하며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제금과 나팔로 주악하니라(대상 13:8, 시 47:1)".

그리고 성경은 구원의 기쁨을 인간이 세상에서 경험할 수 있는 최고봉의 경험으로 묘사합니다. 외양간에서 뛰어나온 송아지의 뛰어놈(말 4:2), 수확의 대풍을 맞은 농부의 기쁨보다 승함(시 4:7), 포로된 자의 해방감(시126:1-2),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기쁨(벧전 1:8-9) 등으로 묘사했습니다.

그뿐입니까? 성령 충만을 술취함에 빗댈 만큼(엡 5:18) 격정적인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이러한 성경의 가르침은 스토아적 감정금욕주의(emotion asceticism)와는 거리가 멉니다.

18세기 미국의 청교도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가 쓴 <신앙과 감정(study on the religious affections in the theology of Jonathan Edwards)>이라는 저서에서, 그는 이교적인 열광주의를 경계했지만, 동시에 지나친 감정 억제 역시 경계했습니다.

하나님은 지정의를 가지신 인격자이시기에 믿음에 따르는 감정 표출은 자연스러운 것이며, 감정을 억압할 때 하나님의 역사와 은혜를 소멸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인위적으로 감정을 부추기는 열광주의는 안 되지만, 은혜에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감정의 발분까지 억압돼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대입시험, 고시 등에 합격하거나 자기의 원하는 것을 손에 넣었을 때, 얼마나 방방 뛰며 환호합니까? 부처의 자비로 열반에 든다는 불교의 정토종(淨土宗) 신도들은 부처의 자비에 감격하여 밤새 뛰논다고 합니다.

하물며 그리스도인이 구속으로 말미암은 성령의 기쁨, 감격이 그들보다 못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생각하면 우리의 영혼과 마음과 의지는 성령의 불꽃으로 타오를 것이며, 우리가 드리는 매 예배는 기쁨의 송영과 감격의 절정을 이룰 것입니다.

이런 말을 하면 혹자는 그리스도인의 영적 기쁨과 감격은 인간적인 감정과는 구별되는 거룩한 것이라고 항변합니다. 물론 기쁨에도 차원이 있습니다. 학자들이 학문을 성취했을 때의 지적 기쁨, 예술가 문학가들의 심미적(審美的) 기쁨, 운동선수들이 땀을 흘린 후의 카타르시스적인 기쁨, 술취 했을 때의 기쁨 등 다양합니다.

그리고 그 경험돌은 영적인 감정들과는 구별됩니다. 그러나 영적 감정과 기쁨이라고 영혼만 기쁘고 마음, 육체와 별개로 남을 수 없습니다.

구원받은 자의 영적인 기쁨은 마음도 육체도 함께 기쁜 전인적 기쁨이고 감격입니다.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입술도 즐거워하였으며 육체는 희망에 거하리니(행 2:26)". 다윗 역시 자신의 영혼뿐 아니라 마음, 지성, 의지를 망라한 전인(全人)을 향해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모두(all that is within me) 여호와를 송축하라"고 명령했습니다(시 103:1).

이는 우리의 신앙 체험은 결코 영혼에만 국한될 수 없는 것임을 시사합니다. 예수님이 중풍병자의 죄를 사하여주셨을 때 중풍병이 치유받은 것도(마 9:2-7) 영혼과 육체가 분리될 수 없음을 가르칩니다.

그리고 풍성한 감정의 표현은 성도들의 독점물만이 아닌, 지정의를 가진 하나님의 속성이기도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기쁨에 대해 수도 없이 말합니다. 하나님은 '극락(exceeding joy)의 하나님(시 43:4)'으로 칭해질 만큼 기쁨이 충만하신 분으로 묘사됩니다.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에 대한 기쁨은 억제할 수 없을 정도라고 말씀합니다.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신다(습 3:17)." 이러한 기쁨은 독생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의 택자들과 화목하신 결과입니다.

하나님의 2위, 성자 예수 그리스도 역시 감정 표현이 풍부하셨습니다. 그는 나사로의 죽음을 보고 눈물을 보이셨으며(요 11:35), 장차 임할 예루살렘의 멸망을 내다보고 우셨습니다(눅 19:41). 또 불의를 보셨을 때는 분노하셨습니다.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해서는 독사의 자식들이라며(마 12:34) 독설했고, 성전에서 물건을 팔며 환전하는 이들에게는 성전을 강도의 굴혈로 만드는 이들이라고 분노했습니다(마 21:13).

또 그는 성령으로 기뻐하셨습니다(눅 10:21).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기쁨을 공급하시는 기쁨의 원천이실 정도로(요 15:11) 기쁨이 충만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3년, 아담의 원죄를 비롯해 억조창생 택자의 모든 죄를 담당해야 하셨기에 그 무게감은 상상을 뛰어넘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핏방울이 되도록 드린 그의 기도는(눅 22:44) 그의 양어깨에 걸머진 구속의 무게가 어떠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런 구속의 무게감이 예수님을 우울하거나 심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제껏 우리가 흔히 보아 온 무표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초상화는 성경적이라기보다, 중세풍의 금욕적이고 경건주의적인 이미지에 가까워 보입니다. 오늘날 경직되고 무거운 기독교인들의 모습은 이런 중세풍의 예수 초상화의 영향과 무관해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근자에 파격적인 웃는 예수 이미지들이 심심찮게 등장하고 있습니다. 스페인 예사(Yesa)에 프란체스코 하이베르라는 사람의 생가에 가면, '웃는 예수상'이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 가운데 계셨지만, "하나님의 뜻을 이루었다"는 만족감에서 나온 표정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최근 한국에도 최근 홍준표(65)라는 화가가 '웃는 예수' 초상화를 그려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또 하나 최근 파격적인 예수 초상화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냥 웃는 모습이 아니라 코믹하기까지 해 보이는 모습이었습니다.

일견 누가 예수님을 모독하려는 의도로 그린 것이 아닌가 라는 의구심이 들 정도였지만, 중세 풍의 무거운 예수님 이미지를 떨쳐 내려는 의도로 일부러 강하게 표현한 듯합니다.

당신의 예수는 어떤 예수이십니까?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쉽게 풀어 쓴 이신칭의(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