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호·정치·계몽, 해방 후 미군정기 ‘교회’ 공간의 3대 역할

이대웅 기자 입력 : 2018.03.28 15:32

서울신대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 제22회 영익기념강좌

22회 영익강좌 서울신대
▲기념촬영 모습. ⓒ연구소 제공
서울신학대학교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소장 박명수 교수) 제22회 영익기념강좌가 '해방공간 한국인들의 정치 및 종교 동향'이라는 주제로 28일 오전 부천 서울신대 우석기념관에서 개최됐다.

이날 강좌에서는 박명수 교수와 허선혜 선생(고려대 박사)이 발표하고 김성건 교수(장신대)와 최현종 교수(서울신대)가 논찬했다.

◈"미군정 여론조사, '우편향' 아니었다"

'1946년 미군정의 여론조사에 나타난 한국인의 정치성향'에 대해 발표한 박명수 교수는 "많은 학자들은 해방 후 한국사회가 좌파 내지 중도 세력이 우세했고, 미군이 아니었다면 한국이 공산주의 사회가 될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한다"며 "하지만 이런 주장들은 해방 후 누구보다 이승만을 대통령 후보로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신탁통치 반대자들이 지지자들보다 압도적으로 많았다는 사실과 어떻게 조화될 수 있는지 고민하게 만든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박 교수는 "해방 공간에서 한국민의 정치동향을 아는 방법에는 미군정 당시 여론조사가 있으나, 지금까지의 연구에서는 미군정이 우익에 편향된 조사방법을 사용했다고 주장한다"며 "그러나 당시 미군정은 좌우합작을 추진하고 있었고, 이승만에게 호의적이지도 않았으므로 이런 평가는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에 그는 1946년 3-7월 진행된 미군정의 여론조사들을 분석했다. 당시 미군정 여론국 여론조사과에서는 농지처분과 산업, 자산 국유화(3월 12일), 서울의 정치동향(3월 31일), 서울에서의 일본과 소련의 선전 효용성(4월 12일), 미소공위 제5호 성명에 대한 반응(4월 20일), 사회민주당 창당(5월 17일), 서울과 지방에서의 일본과 소련의 선전 효용성(5월 20일), 미래 한국정부의 형태와 구조(9월 10일) 등을 조사했다.

박명수 교수는 "미군정이 공산주의에 대해 반대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 해서 이승만과 같은 소위 '극우세력'을 지지하지도 않았다. 미 국무성은 이미 미군정에 이승만이나 김구 외에 다른 대안을 찾으라는 명령을 내렸다"며 "미군정 내에서도 이승만이나 김구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여론조사 실무를 담당했던 로빈슨이 그 대표적인 예로, 미군정이 우익에게 유리한 여론조사를 진행시켰다는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고 전했다.

박 교수는 "해방정국에서 한국인들의 정치성향을 파악하는 방법은 그들이 지지하는 인물과 지도자 선출방법, 정당·단체, 정부 형태, 미소 관계, 단독 정부, 서울의 동향 등을 살피는 것인데, 이런 것들을 종합적으로 판단하면 해방정국의 정치성향은 분명히 우익"이라며 "3월 말 조사에 의하면 우익 인사에 대한 지지가 70%(좌익 30%)였고, 그 중에 이승만에 대한 지지가 30%로 가장 많았다. 당시 지지 인물에 대한 조사는 우익 인사가 압도적으로 많다"고 설명했다.

22회 영익강좌 서울신대
▲박명수 교수(가운데)가 발표하고 있다. ⓒ연구소 제공
또 "5월 20일 조사에 의하면 정부 형태에 대해서도 소련식이 11%, 미국식이 37%, 혼합이 34%로 나타난다. 7월 전국 조사에서는 개인이나 특정 계급에 의한 지배보다 모든 국민들이 참여하는 대의 제도를 85%가 지지하고 있다"며 "4월 12일 조사에 따르면 대부분의 남한 사람들은 북한식 토지개혁을 반대했고, 신탁통치 세력을 소련으로 봤으며, 소련이 미소공위에 이승만·김구 등을 배제하려는 것에 반대했고, 북한에서 사는 것이 싫다고 대답했다"고 했다.

그는 "이같은 공산주의에 대한 혐오는 상당수 한국인들로 하여금 남한에 단독정부를 세우는 것을 찬성하도록 했다. 특별히 주목할 것은 서울에서 우익 성향이 강했다는 점"이라며 "흥미로운 점은 북한식 토지개혁에 대해 도시보다 시골에서 더욱 반대가 많았는데, 이는 아마 많은 농민들이 토지를 무상으로 얻기보다 일정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고 풀이했다.

경제 개혁에 대해서도 "당시 대부분의 남한 사람들은 농지 국유화를 대부분 반대했고, 지나친 노조 운동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었다. 분배 방식도 한국 대지주들의 땅은 유상으로, 일본인 땅은 유상과 무상이 비슷했다"며 "당시 한국인들은 자본주의적 체제를 선호하지만 사회주의적 성향을 가미하고 있는 것으로, 당시 미군정 보고서는 사회주의 성향을 정당화하지도, 무효화하지도 않는다"고 했다.

박명수 교수는 "해방 후 대다수 한국인들은 정치적으로 우파 지도자와 우파 정당 및 단체, 서구식 대의민주주의를 지지했지만, 경제적으로는 공산주의 국가통제나 국유화 정책, 자본주의 시장경제나 사적 소유권 절대 보장 등을 모두 반대하고 양자의 결합을 원했다"며 "이승만도 정치적으로는 공산주의를 반대하지만 경제적으로는 어느 정도 공산주의를 수용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고 했다.

박 교수는 "이러한 성향을 종합할 때, 해방정국에서 한국인들의 정치성향은 우익이었고, 경제적으로는 배타적 자본주의 체제보다 공산주의와 자본주의가 일정 타협된 사회민주주의 경향을 포함했다"며 "일부 학자들은 해방정국 여론조사의 좌익적 성향은 수용하고 우익적 성향은 믿기 어렵다고 주장해 왔는데, 미군정 여론조사 담당자들은 우익편향이 아니었으므로 해당 여론조사를 다시 객관적으로 연구해야 할 것"이라고 제언했다.

22회 영익강좌 서울신대
▲허선혜 선생(가운데)이 발표하고 있다. ⓒ연구소 제공
◈미군정기 교회 공간의 3가지 기능

이후 허선혜 선생은 '미군정기 신문의 교회공간에 대한 인식: 페어클러프의 비판적 담론분석법을 바탕으로'라는 주제로 미군정기 3년이라는 특수하고 제한된 시간적 범위 내에서 형성된 교회공간에 대한 언론의 인식 분석에 대해 발표했다.

허 선생은 "일제 치하 한국교회는 경계와 감시, 핍박의 대상이었지만, 해방 후에는 정부 당국의 각종 지원과 혜택을 받는 대상이 됐다. 즉 해방 후 기독교에 우호적인 미군정이 남한에 실시되면서 이전과는 전혀 다른 위상과 입지를 갖게 된 것"이라며 "교회는 미군정 시기 그 공간의 개념 자체가 통상적 종교시설 이상의 사회적·정치적 산물이자 상징으로 받아들여졌으리라 생각할 수 있다"고 전제했다.

그는 "페어클리프의 '비판적 담론분석법'에 따라 내용과 주체, 관계와 언어의 차원에서 분석한 결과, 교회는 본연의 목적 외에 구호의 사회사업이 펼쳐지는 공간, 국가재건과 민족문제 해결을 위한 우파 정치세력의 활동 공간, 국민계몽과 사회적 약자의 정착이나 친목 모임이 이뤄지는 문화 공간 등 3가지 역할을 했다"고 전했다.

허선혜 선생은 "미군정기 신문에서 교회 관련 기사 중 전재민, 빈민, 하층민을 위한 구제사업을 시행하거나 물품을 지원해 왔다는 내용을 다룬 기사를 다수 찾아볼 수 있다"며 "미군정기 언론은 교회의 공적 기능과 포용성을 강조하고, 교회를 순수한 박애 활동을 펼치는 사회사업 공동체로 인식하고 있지만, 일부 기사에서는 목사가 전재민의 터전을 빼앗고 빈민의 구호물자를 빼돌렸다는 내용도 발견된다"고 밝혔다.

허 선생은 "미군정기 신문들에서 교회는 신도들 간의 교제가 이뤄지는 공동체나 신앙적 성숙을 위한 예배 등의 활동이 이뤄지는 종교 공간으로서의 근본 기능 이상의 의미를 내포한다"며 "기독교의 정치 활동과 관련한 기사에서 교회는 집회, 모임의 장소적 배경으로 등장하고, 기독교인들이 민족 문제에 적극 참여하는 장소로 등장하며, 기독 단체가 애국의 염원을 담아 적극 민족적 행위를 펼치는 장으로 인식됐고, 교회의 친미적·우익적 성향도 강조되고 있다"고 소개했다.

22회 영익강좌 서울신대
▲강좌가 진행되고 있다. ⓒ연구소 제공
이와 함께 "다양한 문화적 교양, 계몽, 교육 등의 활동을 수행하는 장소로서 보도된 기사들도 발견된다"며 "교회는 당시 계층을 망라해 열악한 사회적 여건에 놓인 국민들에게 문화교양 부문의 필요를 채워주는 장소, 월남인들의 모임공간 등 이방인들이 남한 정착을 위해 결집하는 공간 등 포용성이 강조되고 있다"고 했다.

허선혜 선생은 "교회공간에 대한 인식을 형성시킨 이러한 담론은 미군정이 가졌던 이데올로기와 당시 기독교가 추구했던 이념적 가치관, 문화적 코드가 부합했던 당시 사회구조적 요건으로 인해 교회가 정치활동의 거점으로 활용된 사회구조적 요건이 배경이 됐다"고 정리했다.

허 선생은 "미군정이 구호물자를 주로 교회를 통해 나눠줬던 점, 구호단체 임원들이 주로 기독교인이고 이들을 중심으로 구호사업이 시행된 점은 해방 후 좌파가 사회경제적 토대를 갖고 토지혁명을 통해 득세하려 했을 때, 우파는 구령사업을 위해 구제구휼사업을 앞서 실천했던 선교의 특성을 갖는 기독교를 통해 이에 대척하려 했다는 이데올로기적 흐름도 읽어낼 수 있다"고 덧붙였다.

영익기념강좌는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 설립기금을 기증한 故 김영익 집사를 기념하여 지난 1997년부터 매년 봄 열리는 학술강좌로, 저명 학자들을 초빙해 주로 한국교회와 복음주의 운동의 최근 이슈들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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