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비우스 로마사
리비우스 로마사 1

티투스 리비우스 | 이종인 역 | 현대지성 | 596쪽 | 25,000원

살루스티우스(Gaius Sallustius Crispus), 타키투스(Publius Cornelius Tacitus)와 함께 '로마의 위대한 3대 역사가'로 손꼽히는 리비우스(Titus Livius Patavinus, B.C. 59 -A.D. 17)는 오늘날 파두아로 알려진 이탈리아 북부의 파타비움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시대의 혼란 가운데 10대 시절을 보냈다. 기원전 49년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 사이의 내전이 있었고, 기원전 44년에는 카이사르가 암살되었으며, 그 뒤 기원전 42년부터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 사이에 내전이 벌어졌다. 리비우스는 그리스에서 공부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리비우스는 그리스로 가지 못한 대신, 로마로 거처를 옮겼다. 하지만 내전으로 인해 정계에 입문할 수 있는 정상적인 길도 막혔다. 그래서 리비우스는 정부의 관직을 맡은 적도 없고 원로원 의원으로 선출된 적도 없으며 군 장교가 되지도 못했다.

정치적 명성을 쌓을 수 있는 길이 전부 막혔지만, 대신 그것은 또 다른 기회가 된다. 그는 로마의 가장 뛰어난 철학자요 문인이며 정치가였던 키케로를 사숙하면서 수사학과 철학에 심취했고 어느 정도 안정된 수입을 바탕으로 집필 생활에만 전념한다.

리비우스는 그의 필생의 역작이 될 <로마사>를 기원전 30년경 집필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기원전 25년경 가장 먼저 <로마사> 첫 1-5권을 완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책은 발간 즉시 높은 반응과 인기를 끌어, 그 이전에 저술된 로마 역사서는 모두 빛이 바랬다.

역사가 타키투스는 리비우스를 가리켜 "고대의 가장 웅변적인 저술가"라고 찬양했다. 문학평론가이자 수사학자인 퀸틸리아누스는 그의 문체를 가리켜 "크림빛이 도는 풍요로움"이라고 평했고, "이야기는 너무나 매혹적이고, 또 그 문장이 평담하면서도 유원하다"고 극찬했다.

리비우스는 <로마사>를 10권씩 한 단위로 묶어 14단위(140권)까지 썼고 생애 마지막에 141-142권까지 썼지만, 종결점이 되는 150권까지는 마치지 못한 채, 기원후 17년 그의 고향에서 사망했다. 리비우스의 <로마서>는 142권이라는 방대한 분량으로 집필되었으나 2000년 동안 상당 부분 유실되어, 현재는 가장 재미있고 유익하다고 인정받는 1-10권과 21-45권, 총 35권이 전해지고 있다.

이번에 출간한 <리비우스 로마사> 1은 원서 1-5권을 담았다. 1권은 마이네아스(Aeneas)가 이탈리아에 도착한 것을 시작으로 로물루스(Romulus)와 레무스(Remus)가 로마를 건국하고, 브루투스(Brutus)와 콜라티누스(Collatinus)가 집정관으로 선출되는 것으로 끝난다. 그리고 2-5권은 로마에 공화정이 들어서는 모습과 갈리아인이 로마를 약탈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리비우스는 서문에서 7백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당대까지 이어진 로마의 역사를 쓰는 일은 엄청나게 힘든 작업이었음을 고백했다. 너무나 초라했던 그 옛날 이야기에 관심을 가질 사람들이 많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는 용기를 내어 붓을 들었다.

"나는 독자들이 우리의 조상이 어떤 종류의 삶을 살았고, 그들이 어떤 사람이었으며, 로마의 권력이 처음 획득되어 그 후 계속 확장되어가는 과정에서 어떤 정치와 전쟁의 수단을 사용했는지 등을 좀 더 진지하게 고려해 보기를 촉구한다."

사실 기원전 8세기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로마인들은 미미한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남이탈리아를 차지한 그리스인들, 북이탈리아를 차지한 에트루리아인, 그리고 시칠리아와 사르디니아 등 서 지중해를 장악한 카르타고인 등 세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갓 태어난 아기'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나라라고 할 것도 없었다.

더욱이 로마의 건국자들은 이탈리아 본토 출신도 아니었다. 트로이 전쟁에서 패한 뒤 목숨을 겨우 건져 도망쳐 나온 아이네아스와 그 일족이, 자기 자리를 잡고 나라꼴을 만들어가야 했다. 요컨대 외부인들이 정착해서 새 국가의 씨를 심었고, 그 후손에게서 로물루스를 초대 왕으로 나라를 만들어 가기 시작했다. 로마의 역사는 파란만장한 고난과 역경의 연속이었다. 그래도 5백여 년의 역사 속에서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를 통일한 지중해 제국으로 성장했다.

고대 로마 콜로세움
▲ⓒunsplash.com
리비우스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국가의 역사를 기록하는 일에 기여하게 된 것에 만족감을 느끼며 또 내 기여가 그리 무식한 것이 아니기를 희망한다. 무수하게 많은 사람들이 이 주제에 대하여 글을 써 왔는 바, 나 자신은 그들 사이에서 무명인사로 남게 될지도 모른다.

설사 그렇게 된다 하더라도 내게서 명성을 앗아가는 경쟁자들의 위대함과 찬란함을 부러워하며 그것으로 자기 위안을 삼으려 한다. 더욱이 내가 하려는 일은 엄청나게 힘든 일이다. 나는 7백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고, 우리나라의 초라한 시작으로부터 오늘날의 창대한 결과에 이르기까지 내 이야기를 기술해야 하는 것이다."

리비우스는 고대 시대가 보람을 안겨주는 연구 대상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고대에 몰두하고 있는 동안에는, '오늘날의 세계를 오랫동안 괴롭혀온 여러 난제들로부터 잠시 시선을 돌릴 수' 있었다.

오늘날 유통되는 고대 로마에 대한 무수한 2차 사료 및 연구서들은 모두 이 리비우스의 <로마사>에 바탕을 두고 있다. 고대 로마 역사를 다룬 책을 읽다 보면 리비우스의 <로마사>가 반드시 인용되곤 한다.

리비우스는 역사서 집필 이외에 아들에게 쓰는 편지 형식의 에세이를 집필하여, 젊은 사람들은 웅변술을 익히기 위해 키케로와 데모스테네스의 글을 읽어야 한다고 권했다.

리비우스는 언어를 다루는 능력이 탁월했고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이었으므로 이러한 교훈적 역사 서술의 적임자였다.

리비우스의 책에서 세부 사항들이 서로 불일치를 보이는 경우들이 발견되기도 하지만, 그것은 <로마사>가 구현하고자 하는 커다란 역사적 흐름을 가로막을 정도는 아니며, 비유적으로 말한다면 '잘 지어진 대리석 저택의 어느 한 부분에 콘크리트가 들어가 있다고 그 집 전체를 콘크리트 집으로 말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리비우스는 로마인이 로마에 대해 가지고 있던 이상과 가치관을 아주 충실하고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또 리비우스의 문장은 등장 인물들의 특징을 하나의 이미지로 축소하여 보여주는 데 능하다.

리비우스에 의하면, 역사의 연구는 병든 사람을 치료하는 가상 좋은 약이다. "왜냐하면 역사서는 모든 사람이 뚜렷이 볼 수 있는 무한히 다양한 인간 경험을 기록하기 때문이다. 그런 기록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과 나라를 위한 모범적 사례와 경고를 발견할 수 있다. 그리하여 좋은 일들은 모범으로 삼고, 철저히 부패한 지저분한 일들은 타산지석으로 삼아 피해야 할 것이다."

리비우스는 로마보다 디 위대하거나 순수한 나라는 없다고 생각했다. 또 훌륭한 시민들과 고상한 업적의 관점에서 볼 때, 로마를 따라올 나라는 없다고 진심으로 믿었다. 로마처럼 여러 세대 동안 탐욕과 사치의 악덕으로부터 자유로운 나라는 없었다는 것이다.

"그 어느 곳에서도 검소하고 순박한 생활을 그처럼 높이 여긴 나라가 없었다. 우리 로마인은 가난을 만족스럽게 여기며 살았다. 근년에 들어와 부(富)는 우리를 탐욕스럽게 만들었고, 자만심은 각종 형태의 격정으로 분출하여 개인이나 집단을 살육하는 행위를 선호하게 만들었다."

<리비우스 로마사>는 고대 로마사에 대한 최선, 최고의 권위서다. 이 역사서는 지난 2천년 동안 서구 교양인의 필독서로 꼽혀 왔다. 주후 5세기 갈라시우스 교황은 리비우스를 칭송했고, 6세기 문법학자 프리스키아누스는 리비우스의 역사책을 널리 활용하여 고전 라틴어의 문법을 가르쳤다.

로마의 수사학자 퀸틸리아누스는 리비우스 책을 가리켜 '각운을 사용하지 않은 산문시'라고 칭송하기도 했다. 심지어 16세기의 마키아벨리는 <로마사> 첫 1-10권에 대한 논평서인 <로마사 논고>를 펴냈다.

이제 우리나라 최초로 번역되어 소개되는 <리비우스 로마사>는 고대 로마의 역사에 관심 있는 모든 이의 갈증을 충분히 풀어줄 것이다.

송광택 목사(한국교회독서문화연구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