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태 총장
사람은 한 번 죽으면 다시 볼 수 없다. 그러나 풀과 나무는 죽은 듯 있다가도 봄이 되면 다시 모습을 볼 수 있다. 봄은 도약의 계절이요, 시작하는 계절이다. 봄(spring)은 용수철의 계절이요, 꽃을 보고 잎을 가꾸며 시를 쓰는 계절이다.

① "우리나라 꽃들에겐, 설운 이름 너무 많다. 이를 테면 코딱지꽃, 앉은뱅이, 좁쌀밥꽃, 건드리면 끊어질 듯, 바람불면 쓰러질 듯, 아, 그러나 그것들 일제히 피어나면, 우리는 그날을, 새봄이라 믿는다.

우리나라 나무들엔, 아픈 이름 너무 많다, 이를 테면 쥐똥나무, 똘배나무, 지렁쿠나무, 모진 산비탈, 바위틈에 뿌리 내려, 아, 그러나 그것들 새싹 돋아 잎 피우면, 얼어붙은 강물 풀려, 서러운 봄이 온다." (김명수, 우리나라 꽃들엔)

② "봄이라고 해서 사실은, 새로 난 것 한 가지도 없다. 어딘가 깊고 먼 곳을 다녀온, 모두가 낯익은 작년것들이다.

우리가 날마다 작고 슬픈 밥솥에다, 쌀을 씻고 헹구는 사이, 보아라, 죽어서 땅에 떨어진, 저 가느다란 풀잎에, 푸르고 생생한 기적이 돌아왔다.

창백한 고목나무에도, 일제히 눈발 같은 벚꽃들이 피었다. 누구의 손이 쓰다듬었을까, 어디를 다녀와야 다시 봄이 될까, 나도 그곳에 한 번 다녀오고 싶다." (문정희, 아름다운 곳)

③"얼음장 밑으로, 시냇물이 실뱀처럼 스르르, 몸을 푼다

버들강아지, 금빛 은빛 햇살 모아, 보송보송 하얀 솜털 고른다

새싹이, 목 길게 빼고 두리번두리번, 늘어나는 가족 얼굴 익힌다

대문 옆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던, 개나리 으스스 추운지, 햇볕 치맛자락을 끌어다 덮는다" (조미선, 봄날)

④"봄이 꽃나무를 열어젖힌 게 아니라, 두근거리는 가슴이 봄을 열어젖혔구나

봄바람 불고 또 불어도, 삭정이 가슴에서 꽃을 꺼낼 수 없는 건, 두근거림이 없기 때문/ 두근거려 보니 알겠다"(반칠환, 두근거려 보니 알겠다)

⑤"꼼틀 꼼틀 태기가 있었나 보다, 햇볕의 담금질로 해산할 모양이다, 어둠을 꼬박 지새운 길에서, 산통 때문에 이리저리 몸을 가누고 있다

은하수 같은 꿈을 왈칵왈칵 쏟아 놓고, 꽃밭인 듯 가슴 졸인 머리를 빠끔히 내민다, 해산의 꿈들이 어둠을 헤엄쳐 와

줄줄이 날개를 펴고 비상하는 탄생, 꽃잎 하나 살며시 열고 햇살이 내려와 앉는다, 가슴으로 빨려들 듯 봄이 반짝인다" (문근영, 씨앗 하나가)

⑥"실비는 오지요, 꽃밭은 젖지요, 이제 보니 달팽이 한 마리가, 꽃밭에 심은 옥수수 줄기를 타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기어갑니다

기어가서 마침내, 오를 수 있을 만큼 올라간 것일까요, 이제 그만 하는 걸까요, 그쯤에서, 알맞게 휘어진 잎사귀 하나, 초록빛 꽃 붙들고 앉아, 하루 종일 있을 모양입니다

제 한 몸, 잠적하기에는, 참 좋은 봄날입니다" (구종현, 참 좋은 봄날)

⑦"키를 조금 낮추고, 아니, 쪼그리고 앉아서 보면, 봄이 왔네 봄. 논둑 길 돌아 밭으로 가는 길가로, 벌써 봄이 와 있네.

우리 아베 쉰 머리카락 마냥, 듬성듬성하게 헝클어진 빛 바랜 풀들 속에서, 쑥이랑 냉이 씀바귀 잡풀들이, 겨우내 땅속에서 쓴 물 빨아먹고, 비죽비죽 돋아나네, 이 어린 것. 살아있었노라고 눈 틔우네.

봄은 참으로 고마운 약속, 씨앗을 품고 온몸으로 겨울을 견뎌낸 대지와, 거짓말처럼 씨앗이 밀어 올려낸 약속, 보면 볼수록 눈물겨운 약속, 대지가 어지러운 열로 몸이 붓기 시작하는 이유를, 내 이제 알 것도 같네." (성낙일, 약속의 봄)

같은 현상을 다른 말로 표현할 수 있다. 그런데 단어(말)가 달라지면 느낌도 달라진다. 그래서 시인의 시어(詩語) 선택이 중요하다

'강아지'와 '개새끼'는 같은 대상이면서 다른 느낌이다. '춤추러 갔다/ 댄스하러 갔다/ 무용하러 갔다'가 그러하고, '우유 한 잔 주세요, 밀크 한 잔 주세요/ 소젖 한 종지 주세요'가 그렇다.

온유한 말 한 마디와 유순한 대답이 분노를 삭힐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새 봄은 시를 읽음으로 시작해야 한다.

김형태 박사(한국교육자선교회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