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리뷰에는 영화 ‘막달라 마리아: 부활의 증인’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편집자 주

유대 사회에서 여성은 증인이 될 수 없을 뿐 아니라 독립된 인격체로 인정되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성경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했다는 것을 감추지 않고 그대로 전승한다.

사실 기자는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해 그리스도의 십자가 자리에 함께 있던 많은 여성들에게 호감을 갖고 있다. 영화 <막달라 마리아: 부활의 증인>(감독 가스 데이비스)은 이때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삼는다. 거기에 제13회 서울국제사랑영화제 폐막작으로 선정됐던 영화 ‘미라클 프롬 헤븐’의 제작진이 참여했다는 소식이 있었기에, 영화에 대한 적잖은 기대가 있었다. 그리고 또 그만큼 실망이 컸다.


막달라 마리아
▲영화 <막달라 마리아: 부활의 증인> 스틸 이미지. 막달라 마리아(루니 마라)
막달라 마리아가 ‘창녀’?

3월 28일 개봉 예정인 영화 ‘막달라 마리아’는 “수 세기 동안 ‘죄의 여인’으로 불렸던 그녀의 진짜 이야기”, “예수의 부활을 가장 처음 목격한 막달라 마리아가 전하는 진정한 구원의 의미”라는 문구로 홍보하고 있다.

감독 가스 데이비스는 “16세기 그레고리우스 교황이 처음으로 막달라 마리아가 창녀였다는 이야기를 했다”며 막달라 마리아가 창녀이자 죄의 여인이라고 불린 점에 대해 그 배후를 설명했고, 프로듀서 에밀 셔만은 “막달라 마리아라는 인물을 다시금 올라서게 해주고 싶었다”고 영화의 의도를 말했다.

먼저 이것이 큰 ‘옥의 티’인 것이 신약성경은 막달라 마리아를 ‘창녀’로 언급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가스 데이비스 감독의 말대로 교황 그레고리우스가 오해한 것일 뿐 신약성경은 막달라 마리아를 ‘일곱 귀신을 쫓아낸 여성’(눅8:2, 막16:9),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물질로 섬겼던 여성'(눅8:1-3)으로 그린다.

이러한 사실에도, 제작진은 영화를 제작할 때 정경(正經)이 아닌 외경(外經), ‘마리아 복음서(Gospel of Mary)’라는 영지주의(Gnosticism) 문헌을 자료로 삼았다.

마리아 복음서
▲Gospel of Mary, P. Oxyrhynchus L 3525.

이 ‘마리아 복음서’를 옹호하는 입장 중에는 막달라 마리아가 여자였기 때문에 성경에서 지우려는 시도가 있었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이미 성경은 십자가의 자리를 끝까지 지킨 것이 막달라 마리아를 포함해 대부분이 여성들이었다고 가감 없이 증거하고 있다. 성경에서 제외된 것은 정경의 조건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특히 ‘마리아 복음서’의 마지막 부분에 “환상을 통해(ἐν ὁράματι) 만난 예수님으로부터 제자들이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οὓς ἡμεῖς οὐκ ἠκούσαμεν) 특별한 가르침을 은밀히(λάθρα) 받았다”는 주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모순되며, 마리아가 교만했거나 영적으로 무지했음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영화는 이 부분을 인용해 베드로의 대사로 사용한다.

어찌됐든 영화는 ‘마리아 복음서’를 바탕으로 하면서 “진짜 이야기”라는 주장을 내세웠기 때문에 이 점을 주의해서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영화는 ‘죄’와 ‘구원’ 등의 해석에 있어서 위험한 요소를 갖는다.

영화가 부활절을 앞둔 고난주간에 개봉하는 만큼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2:8~9)”,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2:21)”라고 말했던 바울을, 의도적으로라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죄’ 보다 ‘행위’

영화는 막달라 마리아(루니 마라)가 정혼을 거부하는 것에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정혼을 거부한 마리아는 가족들에게서 수치로 여겨졌다. 이에 더해 영화는 시간과 장소의 제약을 받으며 자유롭게 기도할 수 없던 당시 여성의 상황을 상세히 반영하기 위해 노력한다.

결국 가족들은 마리아에게 ‘네 속에 불길한 것이 들어있다’며 물에 빠뜨리면서, 일종의 귀신 쫓는 의식을 치르기까지 한다. 마리아는 발버둥치지만 수 차례 물에 빠지다 기절했고, 그렇게 마리아는 가족들에게 마음 문을 닫고 대화조차 하지 않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 예수(호아킨 파닉스)가 마리아를 찾았다. 예수는 마리아에게 “듣자니 악령에 시달린다면서? (그러나) 넌 악령에 씌인 게 아니다”라고 말한다.

영화 막달라 마리아
▲영화 <막달라 마리아: 부활의 증인> 스틸 이미지. 예수(호아킨 파닉스).

이때 “넌 악령에 씌인 게 아니”라는 대사는 ‘네가 오해를 받았구나’, ‘네 죄가 사해졌다’라는 뉘앙스보다는 ‘넌 원래 죄가 없다’에 더 가깝다. 즉 영화가 말하는 ‘죄’는 성경이 말하는 ‘죄’보다 사회적 상황에 의한 ‘죄’에 가깝다.

동시에 영화는 선행과 용서 등 ‘행위’에 초점을 둔다. 이 점은 영화 후반부 사마리아에서의 장면을 예시로 들겠다. 이 부분은 마리아를 내내 못마땅히 여기던 베드로(치웨텔 에지오포)가 거의 유일하게 마리아를 증거한 장면이기도 하다.

막달라 마리아는 로마군의 횡포에 의해 죽어가는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물을 먹이며 공궤를 한다. 이런 상황에 한 여인이 임종을 앞두고 있었고, 막달라 마리아는 그 여인에게 걱정하지 말라며 “하나님은 당신의 모든 것을 안다”고 ‘당신이 베푼 사랑’과 ‘선행’을 말한다. 교묘하게 ‘구원’에 ‘행위’라는 조건을 추가해버렸다. 이 장면을 보며 누가복음 18장의 선행과 율법을 지킨 바리새인과 죄를 고백하며 통회한 세리의 기도가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여기서 잠시 짚고 넘어갈 것이 영화와 달리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이 말하는 가장 중요한 초점은 당시의 시대상황이나 남녀차별, 행위(선행)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열두사도의 대열에 들어가지 못했던 바울 역시 이 점에 있어서 철저하다. 그는 죄의 결과는 사형(롬1:32)인 것과, 의인은 하나도 없는(롬3:10) 죄악의 현실을 고발한다. 그리고 바울은 수많은 구절에서 믿음과 은혜를 말하며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증거한다.

계속해서 영화 ‘막달라 마리아’는 남성들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던 여성들이 세례를 받고 예수를 따르는 등의 상황이 펼쳐진다. “남편과 아버지의 말과, 하나님의 말씀이 부딪힐 때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한다”며 옳은 말을 하는 것 같지만 어째서인지 영화에서는 ‘믿음’이란 단어가 쉽사리 나오질 않는다.

막달라 마리아는 서로 다투고 있는 열두 제자에게 “고뇌와 대립이 아니라 사랑과 배려, 용서”를 말하며 “천국”과 “부활”을 얘기하지만 십자가에 대한 이해가 얕은 느낌이다. ‘은혜’에 대해서 생각하기가 어려웠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