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훈, 안창호의 귀국 강연을 듣다

입력 : 2018.03.14 22:15

[소설 꽃불 영혼 (10)] 다섯 뫼

남강 이승훈
▲남강 이승훈 선생.
태양은 매일 한결같이 떠오른다. 사람의 변덕스런 마음과 달리 아침이면 어김없이 떠서 만물에 생명 에너지를 주다가 밤이면 아름다운 노을을 남기곤 사라진다.

'저 햇님처럼 머무름 없이 꾸준히 실행해야 의미가 있다. 어떤 상황에서도 묵묵히 실천하는 저 태양! 이기심, 사리사욕, 쩨쩨함, 아집, 천박함, 의타심 같은 것 없이 만물에 도움을 주는 존재....'

이승훈은 그런 태양을 본받고 싶었다.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은 이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이승훈이 서우학회(西友學會)에 입회한 것도 그런 고민의 결과였다. 서북지역 인사들이 만든 서우학회는 국권회복과 인권신장을 목표로 삼은 애국계몽 단체였다.

이승훈은 평양과 서울에서 활동하는 서북 출신 인사들과 교류하며 민족 계몽을 위해 애썼다. 그 후 서우학회가 서북학회로 개편되자 힘을 더했고, 이어 서북학회 정주지회의 설립을 주도했다.

'어떻게 하면 이 민족을 계몽시켜 국권을 회복할 수 있을까?'

오로지 그런 생각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2월의 꽃샘바람이 불고 있었다.

아이들에게 줄 책을 살 겸 평양에 나왔던 이승훈은 볼일을 마친 뒤 천천히 대동강 쪽으로 걸어갔다. 대동강은 그에겐 그냥 강이 아니라 모정의 젖줄 같은 곳이었다. 유유히 흐르는 푸른 강물을 바라보노라면 자질구레한 근심 걱정이 어느 결에 씻겨 내려가고 마음이 청정해졌다.

무슨 일인지 많은 사람들이 강 구경은 잊어버리곤 모란봉 쪽으로 몰려 올라가고 있었다. 이승훈도 그 인파 속에 섞였다.

"날씨가 좋군요."

그는 옆사람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네요. 허허, 날씨도 유명한 분을 반기는구만요."

모란봉 기슭의 널찍한 공터엔 많은 사람이 모여 들고 있었다. 나무에 걸린 현수막에 '도산 안창호 선생 귀국 강연'이란 글이 보였다.

이승훈은 나무 옆으로 가서 섰다. 그를 알아본 어떤 청년이 연단 앞쪽에 마련된 귀빈석으로 모셔 가려 했으나 이승훈은 점잖게 사양하곤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얼마 후에 준수한 모습의 청년이 연단으로 올라섰다. 콧수염을 기르고 있어 그런지 나이보다 좀 노숙해 보였으며 어딘지 강한 기품을 풍기는 인상이었다. 그는 군중을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후 입을 열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저는 이제부터 불타오르는 애국심으로 오늘의 정세는 물론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현재 서양 여러 나라의 세력이 우리 동양을 향하여 거센 파도처럼 휩쓸어 오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동아시아 국가들이 하나로 똘똘 뭉쳐서 서양의 침략에 맞서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친구가 되어 서로 도와야 할 일본이 도리어 사나운 야수로 변하여 우리나라를 빼앗으려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으니 이 얼마나 기막힌 현실입니까?

얼마 전 일본에서 고국으로 돌아오던 길에 동경 히비야 공원에서 열린 일러 강화조약을 성토하는 일본 사람들의 궐기대회를 보았습니다. 외무대신 이등박문, 이토 히로부미란 자가 나서 외쳐댔습니다.

'우리는 러시아로부터 배상을 받지 못하게 된 대신 조선을 갈라먹기로 서로 약속하였소!'

그러자 떠들어대던 일본 사람들이 웃으며 자리를 뜨기 시작했습니다.

아아! 우리 조상은 5천 년이라는 유구한 역사를 자손에게 물려주었는데 이제 그 명맥이 곧 끊어지려는 찰나에 서 있습니다. 아, 이 망국의 비극을 어찌 막을 수 있겠습니까?"

잠시 말을 멈춘 안창호는 눈물로 인해 더 잇지 못했다. 청중들 가운데서도 여기저기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도산은 말을 이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남이 자기를 업신여기는 것을 우리는 분하게 생각하거니와, 나 스스로 자신을 업신여긴 연후에 남이 나를 업신여김을 알아야 할 것이외다. 우리에게는 오직 한 가지 길이 있으니, 삼천리 방방곡곡에 새로운 교육을 일으켜 2천만 한 사람 한 사람이 덕과 지식과 기술을 가진 건전한 인격이 되고, 이 같은 새사람들이 모여 서로 믿고 돕는 성스러운 단결을 이루어 민족의 영광을 회복하는 기초를 닦는 일이 있을 따름입니다.

우리 국민이 모두 깨어서 자기의 덕을 닦고 행동을 바로 한다면 다른 사람이 업수이 여길래야 업수이 여길 수가 없습니다.

물론 일본 사람들이 하는 일이 나쁩니다. 장차 우리 2천만의 피를 빨아먹고야 말 것입니다. 우리의 4천년 내려오던 가여운 나라는 그만 일본 사람의 손에 들어가고야 말 것입니다. 우리 조상들이 전해 준 모든 재보는 일본이 가져갈 것이요, 우리의 사랑하는 아들과 딸들은 모두 일본의 종으로 붙잡혀 갈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형세가 어둡더라도 여기서 좌절하면 절대로 안 됩니다. 이제라도 조정의 벼슬아치들이 정신차려서 일어서고, 모든 백성이 한 뜻으로 깨어 일어나 힘을 합쳐 교육과 산업을 일으킨다면 그 어떤 곤경이라도 뚫고 나아가 나라를 바로 세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위기를 바로 보지 못하고 서로 세력다툼이나 벌이고 험담만 늘어놓는다면 더 이상 어떤 희망도 바랄 수 없게 됩니다. 외세는 어떡하든 우리 민족을 분열시키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 3천만 동포가 힘을 합쳐 한 마음이 되어 일어나 삼천리 강산을 사랑하고, 한 사람 한 사람이 덕과 지식을 갖추고 민족적 자부심을 가진 인격을 지닌다면 곧 나라를 바로잡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안창호의 한 마디 한 마디는 청중들의 마음을 세차게 때렸다.

김영권 남강 이승훈
▲김영권 작가(점묘화).
김영권 작가

인하대학교 사범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하고 한국문학예술학교에서 소설을 공부했다. <작가와 비평>지의 원고모집에 장편소설 <성공광인(成功狂人의 몽상: 캔맨>이 채택 출간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작품으로는 어린이 강제수용소의 참상을 그린 장편소설 <지옥극장: 선감도 수용소의 비밀>, <지푸라기 인간>과 청소년 소설 <보리울의 달>, <퀴리부인: 사랑스러운 천재>가 있으며, 전통시장 사람들의 삶과 애환을 그린 <보통 사람들의 오아시스> 등을 썼다.

*이 작품은 한국고등신학연구원(KIATS)의 새로운 자료 발굴과 연구 성과에 도움 받았음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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