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수
▲김준수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1.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의미

'절체절명(絶體絶命)'은 문자적으로 '몸(體)이 잘라지고 목숨(命)이 끊어진다(絶)'는 사자성어로, 막다른 궁지에 몰려 도저히 살아날 가망이 없는 긴박한 처지에 몰려있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본디 사자성어 '절체절명'은 중국 구성점(九星占)에서 온 말로, 참혹하게 몸이 잘려 목숨이 끊어지는 것과 별로 상관이 없다. 구성점(九星占)은 당나라 때 아홉 개의 별들로 운세를 예측하는 점술이다. '절체'와 '절명'은 이 점에서 말하는 흉성의 이름으로, 점괘에서 이 별들이 나오게 되면 운이 다해 멸절을 뜻한다고 한다.

이처럼 무시무시한 용어인데도 일상생활에서 빈번히 쓰인다. 지난 1998년 우리나라가 IMF 위기사태를 맞았을 때, 매스컴이나 국민들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국가의 장래를 크게 걱정했다. 이 말을 가지고 문학적 문장을 만들면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도 그는 한 줄기 희망의 빛을 바라보았다"고 쓰면 무난하다.

그런데 '절체절명(絶體絶命)'을 '절대절명'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열에 아홉은 되는 것 같다. 이것은 절체절명이 내뿜는 급박하고 강렬한 어감이 '절대(絶對)'를 연상시키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리하여 '절대'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절명'과 결합해 '절대절명(絶對絶命)'으로 둔갑해버려도 전혀 께름칙하지 않은 것이다.

'절대(絶對)'는 상대하여 비교할 만한 것이 없음을 나타낸다. 흔히 '절대 권력, 절대 진리, 절대 평가'라고 말할 때는 그러한 가치와 비교할 만한 상대가 없다는 것을 뜻한다. 철학에서 기독교의 하나님을 '절대자(絶對者)' 혹은 '절대 타자(絶代 他者)'라고 부르는 것은 초월적 신(神)이 오로지 한 분이라는 전제하에 부르는 말이다. 그러나 '절대'는 '절체'와 엄연히 다르다. '절대절명(絶對絶命)'이란 말은 사전에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말이라는 것을 이 참에 알면 좋겠다.

'절체'를 '절대'로 착각하는 것처럼, 한자어를 바로 알지 못하고 감(感)으로 자기 류의 한자어를 만드는 사례는 비일비재(非一非再)하다. 매우 친밀한 관계를 비유하는 '밀월'이란 낱말만 해도 그렇다. 고등교육을 받은 성인들 가운데서도 '밀월'을 한자로 써 보라고 하면 적어도 열 명중 일곱 명은 제대로 쓰지 못할 것이다.

깜냥 옳게 썼다고 자신하더라도, 그중 절반은 '밀월(密月)'이라고 쓰지 않을까 싶다. 이렇게 써 버리면 꿀과 같이 달콤하고 정열적인 '허니문'이 은밀한 여행이란 뜻이 되어, 남녀 간에 무슨 떳떳지 못한 비밀스러운 여행길에 오르지 않나 하는 말로 둔갑해버리는 것이다.

'밀월'의 올바른 한자어 표기는 '蜜月'이다. 이 말은 벌꿀을 뜻하는 '蜜'과 달을 뜻하는 '月'이 조합한 단어로, 보통 신혼여행을 가리킨다. 신혼여행을 영어로는 'honey moon(허니문)'이라고 하는데, 이 말 안에 '여행'이란 뜻은 없지만 영어권에서는 '신혼여행'을 뜻하는 말로 굳어졌다. 신혼여행을 서양 사람들이 '허니문'이라고 부르는 것은, 젊은 남녀가 결혼을 해 벌꿀주를 많이 먹으면 원기가 북돋아 아이들을 많이 낳는다는 스칸디나비아의 풍속에서 유래(由來)했다.

2. 성경적 적용

성경에는 '절체절명'의 순간이나 상황을 알려주는 장면들이 많다. 이를테면 형 에서에게 죽임을 당할 것 같은 야곱이 얍복 나루터에서 목숨 걸고 간절히 기도하는 장면이나,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민족이 앞은 출렁이는 홍해 바다요 뒤는 뽀얀 먼지를 일으키며 추격해오는 파라오의 병거와 군사들을 두고 우왕좌왕하는 장면이다.

유다 왕 여호사밧이 자기의 군대보다 몇 배나 강한 이민족의 침략 앞에서 하나님께 "우리 하나님이여 그들을 징벌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를 치러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라며 기도하는 장면에서, 성경의 독자들은 절체절명의 위기감을 공유하는 것이다.

신약성경에서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의 백미(白眉)라면, 사도 바울을 싣고 로마로 압송하던 배가 유라굴로 광풍을 만나 그 배에 탄 사람들이 모두 수장될 뻔했던 장면이다. 거센 광풍으로 바다 한 가운데 실오라기 구원의 여망마저 없는 상태에서 사투를 벌인 이 장면은, 손에 땀이 날 만큼 얼마나 아찔한지, 사도행전 기자는 이 내용을 한 장을 할애하여 기사를 실었다.

'절체절명'이란 말이 성경에 나타날 리 만무하다. 그러나 인간의 힘으로는 도무지 어떻게 해볼 수 없는 한계상황을 나타내는 이 긴박하고 절박한 어감은 성경 곳곳에서 숨쉬고 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행해지는 설교나 강연, 나눔을 할 때 이 말을 적절히 구사한다면, 쌍방 커뮤니케이션 분위기가 영화 장면 같이 더한층 긴장감과 생동감이 넘치게 될 것이다.

김준수

중앙대 신문방송학을 전공하고 정부기관과 대기업 등에서 일하다 50대 초반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에 입학했고, 풀러 신학대학원 목회학 박사 과정을 하면서 교회를 개척했다. 저서로는 베스트셀러 <내 삶을 다시 바꾼 1%의 지혜>와 지난 10년간 집필해 온 신·구약 성경신학 7권 중 첫 권인 <모세오경: 구약신학의 저수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