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강 이승훈
▲남강 이승훈 선생.
임박천은 승훈의 성실성과 근면함을 인정하고 있었다. 게다가 한 가지를 시키면 두세 가지 일까지 척척 해냈기 때문에 두텁게 신임했다. 어느덧 집안의 중요한 일도 맡겼고, 거래처 수금업무까지도 일임시켰다.

임박천의 집에 찾아온 손님들은 조심스럽게 묻곤 했다.

"어린 사환에게 돈거래 일까지 다 맡겼다는 게 사실입니까?"

"예, 그렇게 했습니다. 뭐가 큰 문제요? 맡길 만하니까 그런 게지요."

"그래도 나이가 너무 어리지 않습니까?"

"천만에요. 난 그 아이를 보고, 나이와 업무 능력이 별로 상관 없다는 것을 알았소이다."

승훈은 남의 험담에도 칭찬에도 좌우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저 묵묵히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삿된 마음 없이 실행해 나갈 뿐이었다.
산까치가 깍깍 울며 푸른 하늘로 날아올랐다.

이승훈은 장군바위를 한번 쓰다듬고 나서 다시 산길을 걸었다. 창백한 안색으로 입을 꾹 다물고 있었는데 붉게 충혈된 눈에 약간 물기가 맺힌 듯도 했다.

고갯길을 넘으니 눈앞이 탁 트이면서 저 멀리 서해바다가 푸르게 펼쳐졌다. 백마의 갈기처럼 흰 물거품을 일으켜 날리며 물결치는 바다를 그는 묵묵히 바라보았다. 파도소리가 아련히 들려왔다. 산바람에 날린 가랑잎은 허공을 넘어 아득한 바다로 떨어져 내렸다.

"저 생명의 바다도 괴로움에 지쳐 내 심정마냥 울부짖는 것만 같군. 음, 그런데..., 저 일렁이는 푸르런 해면에서 튀어오르는 하얀 물거품을 한번 자세히 보라! 저 바다와 물거품은 결국 하나, 한몸이 아닌가?"

그는 심호흡을 하며 중얼거렸다.

"나의 생각, 고집, 욕심, 꿈 같은 것들은 저 파도의 물거품처럼 모두 한바다에 속한 것이다. 바다가 없다면 물방울도 있을 수가 없다. 비유하자면 저 바다는 우리나라와 같다. 물거품이 아무리 높이 튀어올라도 결국 바닷물 속에 들어가지 않으면 고독할 뿐이다. 저 허망한 물거품에 집착하지 말고 무한히 푸른 바다가 되어 바다처럼 살자! 오직 우리 민족과 백성을 위하여...."

핏기가 어렸긴 해도 진실해 보이는 그의 눈에 푸른 바다의 기운이 서서히 스며드는 듯싶었다. 그는 자기 자신의 맘속에 속삭이듯 혼잣말을 했다.

"먼 옛날 할머니의 말씀에 의하면... 우리는 저 광활한 중국 땅을 직접 다스리고 일본에도 고상한 문화를 전해 주었다는데..., 지금은 그놈들에게 적반하장으로 침탈당하고 있으니.... 음, 이미 엎지러진 물을 주워담을 순 없다. 이제부터라도 뭔가 참다운 사업을 해서 민족의 대들보를 길러야만 하리라. 정말로 정신을 차려야 해!

며칠 전엔 꿈속에 할머니가 나타나셔서 흐느끼며 말씀하더군. 일본놈뿐 아니라 중국, 미국, 러시아 등등 다른 강대국들도 겉으로는 아무리 달콤한 소리를 해도 결국엔 자기네 나라의 이익을 노린다고.... 마치 독수리가 병아리를 낚아채 살을 뜯어서는 씹어 삼키듯이...."

날이 저물고 있었다. 석양은 광선을 속에 머금은 채 벌겋게 타며 바다로 떨어지는 중이었다. 서해 바다는 낙조를 받아 술이라도 취한 양 세차게 뒤척였다.

"아, 저 빛! 저 빛이 사라지면 안 되는데...."

하지만 인간의 탄식엔 아랑곳 없이 해는 바닷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어둠이 만물을 덮었다.

이승훈은 어둠 속의 파도소리를 한참 동안 듣다가 산길을 되짚어 내렸다.
그 길은 옛날에 봇짐을 메고 서북 지방을 돌아다니던 장삿길만큼이나 어두웠다.

강대국의 노략질로 피폐해진 산천에도 봄이면 진달래가 피고 가을이면 하늘빛이 푸르렀지만, 약소국의 백성들은 마치 지옥에서처럼 신음하며 살았다. 피땀 흘려 거둔 곡식이나 귀한 생산물은 일본인과 조선 지배층의 뱃속으로 들어가고 일반 백성들은 헐벗은 채 풀뿌리를 캐어 먹으며 겨우 목숨줄을 이었다. 검게 탄 얼굴로 마소처럼 일하는 백성들을 보며 그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자기와 자기 가족만 잘 살면 된다는 생각이 치사스럽게 느껴졌다. 이 땅이 전부 유린당하게 되면 대체 어디를 걷게 될까, 하는 고민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 당시 사업상의 정보를 얻기 위해 구독하던 신문엔 나라 꼴이 풍전등화라며 암울한 보도를 하고 있었다. 만일 나라가 망한다면 돈을 많이 모은들 헛일이 될 성싶었다.

신문엔 애국지사들이 민족의 앞날을 위해 여러 가지 단체를 결성하고 각지에 학교를 세워 구국운동을 펼친다는 기사도 있었다. 그런 기사를 꼼꼼이 찾아 읽는 사이, 가슴 속에 어떤 불꽃이 훨훨 일었다. 너를 버리고 나라를 위해 뭔가 하지 않으면 너도 살 수가 없다는 소리가 가슴 깊은 곳에서 울려 왔다.

어둠은 더욱 짙어지고 강물 소리는 점점 침잠해 갔다.

김영권 남강 이승훈
▲김영권 작가(점묘화).
김영권 작가

인하대학교 사범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하고 한국문학예술학교에서 소설을 공부했다. <작가와 비평>지의 원고모집에 장편소설 <성공광인(成功狂人의 몽상: 캔맨>이 채택 출간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작품으로는 어린이 강제수용소의 참상을 그린 장편소설 <지옥극장: 선감도 수용소의 비밀>, <지푸라기 인간>과 청소년 소설 <보리울의 달>, <퀴리부인: 사랑스러운 천재>가 있으며, 전통시장 사람들의 삶과 애환을 그린 <보통 사람들의 오아시스> 등을 썼다.

*이 작품은 한국고등신학연구원(KIATS)의 새로운 자료 발굴과 연구 성과에 도움 받았음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