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처음 출간된 ‘텬로력뎡(천로역정)’을 되살려내다

입력 : 2018.03.08 13:32

[기독교 문학을 만나다 20] 감당할 수 없는 ‘숙제’

천로역정 CH북스
▲천로역정(텬로력뎡): 조선시대 삽화수록 에디션. ⓒ이대웅 기자
천로역정: 조선시대 삽화수록 에디션

존 번연 | 유성덕 역 | 김준근 그림 | CH북스 | 336쪽 | 14,400원

저는 만두를 좋아합니다. 어느 정도로 좋아하냐 하면, 지금까지 먹어본 만두 중에서 맛 없었던 적이 거의 없을 정도입니다. ^^ 냉동만두부터 손만두까지, 그 중에서 제일 맛있게 먹은 만두는 수원의 'ㅂㅇ만두'집입니다. 수원에서 3년 이상 살았는데 'ㅂㅇ만두'집을 모른다면 간첩으로 신고해도 될 정도로 유명한 곳입니다. ^^ 맛있는 만두 중에서 가장 맛있는 만두를 만드는 곳입니다.

<천로역정>이 처음 나온 게 1678년입니다. 300년도 더 된 책이라 저작권에 저촉을 받지 않아, 저작권료를 지불하지 않고도 누구나 책을 낼 수 있습니다. 만화부터 어린이와 청소년과 청년용, 스터디용까지 다양한 모습으로 출간되고 있습니다. 아마 기독교 도서 중에서 성경 다음으로 다양한 형태로 나오는 책은 <천로역정>이 유일하지 않을까 합니다.

출간된지 300년이나 지난 책이 지금까지 나올 수 있다는 건, 그만큼 이 책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짐작하게 합니다. 교회를 다닌지 10년 이상 된 가정이라면, 서가에 <천로역정>이 한 권 정도는 꽂혀 있을 겁니다(몇 권이 있는 가정도 있을 겁니다).

<천로역정>의 줄거리는 단순합니다. '크리스천'이라는 남자가 성경을 읽고 하나님 나라로 향하는 여정을 담았습니다. 이 책의 특이점은 감정이나 생각, 성격을 뜻하는 수식어를 등장인물로 표현해냈다는 겁니다. 유순, 고집쟁이, 도움, 선의, 허례와 위선, 불신, 경건, 분별, 믿음, 수다쟁이, 시기, 사심, 구두쇠, 세상욕심, 돈 사랑(^^), 소망, 무지... 등등, 등장인물의 면면을 보자면 '어떻게 이 감정(생각, 성격)을 인물화시킬 수 있었지!' 작가의 상상력에 놀라게 됩니다.

또 감정(생각, 성격)에 맞는 언행을 보여 재미를 주고, 이 언행이 성경에 나오는 그대로이기 때문에 책을 읽으면서 성경을 이해하게 되는 효과까지 줍니다. 소설의 형태를 띠지만 인물에게 대사를 부여할 때 '쌍점(:)'으로 표기하여 연극 대본을 읽는 듯 만든 구성은 이 책을 빠져들게 하는 장치입니다.

여기까지는 기존의 <천로역정>을 읽은 분들이라면 모두가 공감하는 일반적인 평일 겁니다. 더 자세한 평도 있습니다. 그건 지금 소개할 책의 뒤에 수록된 해설을 참조하면 될 겁니다.

천로역정 CH북스
▲조선시대 삽화가 들어간 모습. ⓒ이대웅 기자
최근 CH북스에서 나온 <천로역정>은 숱한 <천로역정>과 어떤 차이점이 있나? 아무 정보없이 표지만 봐도 <천로역정>이 서양 작가가 쓴 소설로 알고 있는데, 갓을 쓴 이가 나타나 '우리나라적인 새로움'을 느끼게 합니다(8번째 삽도인 '선의가 크리스천에게 천국의 길을 가르치는' 장면입니다).

표지 자체의 질감도 약간 거칩니다. 하지만 만져보면 불편하기보다, 고문서를 펼치는 듯 한 호기심을 자극합니다. 내지 자체도 고문서처럼 바깥쪽을 선으로 구획하였습니다.

이렇게 선을 긋고 고문서처럼 디자인을 한 이유는 이 책에 들어간 삽도(그림)가 1894년에 조선시대 화가 김준근이 그렸기 때문입니다(2017년 5월 29일 등록문화재 제685호로 지정됐다네요). 조선시대 사람이 그렸기 때문에 조선시대 풍의 그림이 나오게 되었고, 그런 분위기를 책 전반에서 느끼게 하려 애쓴 흔적이 보입니다. 이것이 다른 <천로역정>과 갖는 가장 큰 특이점이자 새로움입니다.

자, 여기까지는 형식적이고 표면적인 장점입니다. 내용은 다른 <천로역정>과 같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내용보다는 그림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조선시대 풍의 그림이 있다는 건 어떤 효과가 있을까요? 1678년에 나온 영국 소설 내용을 1894년 우리나라 조선의 화가가 그렸습니다. 200년이나 지났고, 나라도 다르고, 풍습도 다릅니다. 등장인물 모습도 기존에 출간된 <천로역정> 그림과는 확연히 다릅니다.

김준근은 소설을 읽고 현재 자신의 나라 풍습에 맞게 그리면서 무엇을 역점에 두었을까요? 저는 '서양의 하나님이나 조선의 하나님이나 다 같은 분이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겪는 여러 일들이 다를 수 없는 아픔과 기쁨, 다를 수 없는 괴로움과 즐거움, 다를 수 없는 복음 여정이다'에 두었다고 봅니다.

이 책은 단순히 '조선시대 삽화를 수록했다'는, 표지에 보이는 표면적 자랑이 구매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물론 그런 차원에서라도 이 책을 구입하는 것이 좋긴 하지만, 근본적으로 우리는 단 한 분의 주님을 모시고 있다는 선교적 차원과 개인적 차원에서 봐야 합니다.

만약 김준근이 이 <천로역정>을 읽고 '유대인의 하나님이네', '서양의 신이네', '서양의 종교네'라고 했다면, 그림을 그리더라도 이렇게 조선시대 풍으로 그리진 않았을 겁니다. '비록, 서양 소설이지만,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과 삶은 우리와 같다'는 감동이 있어서 그렸을 겁니다.

그림을 보면서 그가 느꼈을 감동과 그린 목적이 전해집니다. '우리나라(조선)의 많은 사람들이 읽어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이 지난한 삶을 벗고 하나님 나라에 도달할 수 있기를' 바라는 그의 염원과 기도가 들리는 듯도 합니다.

42점의 그림을 보면서, '나는 천로역정을 읽고 어떤 그림을 그릴 수 있겠는가?' 묻게 되었습니다. 그림조차 떠오르지 않는 것도 문제지만, 1678년 영국의 시대적 상황을 조사하고 그에 맞는 그림을 그린다면, 나는 아직도 주님을 '나의 주님'이라 인정하지 않는다는 증거일 겁니다.

천로역정 CH북스
▲조선시대 삽화가 들어간 모습. ⓒ이대웅 기자
우리는 이 책을 읽고, 이 그림을 보면서 지금의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있고, 나의 현실이 투영된 그림을 그릴 수 있어야 합니다. CH북스에서 나온 이 <천로역정>은 그런 숙제를 던지고 있습니다.

저는 이 책을 읽다 멈춘 뒤, 책을 가슴에 품었던 적이 몇 번인지 모를 정도로 많았습니다. 이 책이 던진 감동을 가슴과 조금 더 가까이에서 느끼고 싶었고, 감당할 수 없는 '숙제'에 오답을 내린 저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더 잘 이해하는 성경의 보완재 역할을 하면서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복음의 기치를 세우게 하는 것이 기독 소설의 진정한 탄생 목적이라 할 때, 이 책은 더없이 뛰어난 기독 소설이고, 모범이자 모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모든 기독 문학가는 이 책을 지향점을 둬야 할 겁니다.

사실 기독 문학가가 아니더라도 설교, 강해, 영성, 에세이, 만화 등 기독교 도서를 만드는 모든 출판인과 작가들은 이 <천로역정>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 이유와, 왜 지금까지 사랑받고 있는지를 분석해야 될 겁니다.

처음 얘기를 이어보겠습니다. <천로역정>은 좋은 책입니다. 고전입니다. 가장 뛰어난 기독 소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맛있는 <천로역정> 중에서도 가장 맛있는 <천로역정>은 바로 이 책이 아닐까 합니다. 저는 솔직히 그렇게 읽었습니다.

모든 신앙인들이 이 책을 읽고, 이 책에서 주는 '숙제'에 심각한 고민을 하면서 정답을 그릴 수 있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정말 잘 읽었습니다.

이성구(서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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