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바기오
▲필리핀 바기오 지역 축제 모습. ⓒ채 선교사 제공
지난 2002년, 우리 가정은 1년 정도 예상하고 필리핀에 언어연수를 겸한 단기선교를 떠난 적이 있다. 평소 알고 지내던 윤 선교사님이 마닐라에 살고 계셨기에, 그분의 안내를 받아 필리핀에 도착했다.

하지만 우리 가정이 마닐라의 환경이나 기후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고 있던 차에, 신대원에 다닐 때 같은 방에서 기숙사 생활을 함께 했던 바기오의 이 선교사님이 생각나서, 고산도시로 알려진 바기오를 정탐해 보기로 했다.

바기오로 올라가는 길은 꽤나 멀고 험했다. 마닐라에서 차량으로 7시간 거리에 떨어져 있었고(지금은 산 밑까지 고속도로가 나서 5시간 정도면 바기오 정상에 도착할 수 있다), 도시가 있는 정상까지는 산이 시작되는 지점에서부터 구불구불하고 가파른 길을 1시간 가량 더 올라가야 했다. 바기오에 도착해서 느낀 첫 인상은, 도시와 시골스러움이 함께 어우러진 유럽풍의 정연한 도시 같다는 것이었다.

필리핀 바기오
▲바기오로 올라가는 캐논로드에 있는 사자상. ⓒ채 선교사 제공
바기오는 약 1,500m의 고산지대에 자리하고 있어, 평균 30도를 웃도는 필리핀의 다른 지역보다 10도 가량 낮은 기온을 유지하고 있다. 대체로 한국의 봄이나 가을 같은 기온을 유지하고 있어, 긴팔을 입고 생활해야할 때가 많다.

바기오는 5-9월이 우기철에 해당하는데, 이때는 비가 정말 많이 내린다. 7-8월에는 태풍도 여러 개 지나간다. 하지만 이 시기를 지나고 나면 맑은 날이 이어지고, 오후에 딱 한 차례 비가 오다 다시 맑아지는 특이한 날씨를 이어간다.

바기오는 미국이 필리핀을 점령했을 때 미군들에 의해 세워진 계획도시다. 미국인들이 더위를 피해 거주할 수 있는 곳을 찾았는데, 산악 가운데 분지를 형성하고 있는 바기오 지역을 최적의 군사도시로 생각하였던 것 같다.

필리핀 바기오
▲바기오 번함공원. ⓒ채 선교사 제공
바기오는 시내 중심가인 세션 로드(Session Road)와 SM몰을 중심으로 주거지가 형성돼 있다. 보통 바기오 인구를 30만 정도로 이야기를 하지만, 바기오가 영향을 끼치는 범위는 인근 산악지역 주민들을 포함할 때 이보다 훨씬 많다고 할 수 있다.

바기오는 이제 군사도시가 아니라 교육도시로 유명하다. 바기오에는 인구에 비해 공부하는 젊은이들이 많은 편이다. 그곳에 거주하는 대부분의 주민들은 영어를 자유로이 구사한다. 나중에 다른 도시로 이동했을 때 영어로 의사소통하는 데 어려움을 경험했는데, 바기오에서는 웬만한 의사소통에 불편함이 없을 정도로 주민들이 영어를 잘한다.

바기오에는 유명한 국제학교인 브렌트 스쿨(Brent International School Baguio)을 비롯해, 양질의 교육을 제공하고 있는 로컬 과학고등학교도 있다. 교육은 미국식으로 진행되고 있어 대화식 수업을 많이 하고 있으며, 학업 경쟁도 치열하다. 대학교도 도시 규모에 비해 제법 많은 편이며, 미국 교육제도처럼 입학은 쉬우나 졸업은 어려운 구조를 띠고 있다.

필리핀에는 한국 선교사들이 여기저기 많이 흩어져 있지만, 각 지역마다 선교 거점도시들이 있다. 필리핀 중부의 선교 거점도시는 마닐라, 남부는 다바오, 북부는 바기오가 각각 그에 해당한다.

필리핀 바기오
▲바기오 성당. ⓒ채 선교사 제공
바기오는 한동안 필리핀의 여름수도로 이용될 정도로 날씨가 시원하고, 그와 더불어 교육과 문화가 발달해 있다. 다른 도시에 비해 안전도 보장된 편이라 북부 지역 선교사들이 선교와 자녀교육을 병행할 수 있는 바기오를 선교 거점도시로 활용하고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우리 가정은 지난 2005년 장기선교사로 파송돼 바로 이 바기오에 7년여를 정착해 살았다. 돌아보면 적잖은 기간인데, 바기오는 정말로 이상한 매력이 있는 것 같다. 농촌 속에 도시를 일구어놓은 것 같은 풍경은 도시에서 살고 있는 이들에게 고향과 같은 포근한 감정을 느끼게 한다.

바기오시는 그다지 깨끗하지 않지만, 오히려 그것이 1970-80년대 한국의 향수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시내 중심가는 차량 노후화로 매연이 심하지만, 거주지역에서는 밤이면 수많은 별들을 관찰할 수 있을 만큼 청정지역이기도 하다. 지진이 자주 발생하는 곳이라 높은 건물들은 눈에 띄지 않지만, 오래되고 아기자기한 건축물들은 오히려 정감이 간다.

필리핀 바기오
▲필리핀 꽃 축제 모습. ⓒ채 선교사 제공 ⓒ채 선교사 제공
바기오는 도시의 크기에 비해 공원들이 많다고 할 수 있다. 바기오 시내 한가운데는 번함 파크(Burnham Park)라는 큰 공원이 있다. 다양한 모양의 보트를 탈 수 있는 호수와 운동시설이 있는 애틀래틱 보울(Athletic Bowl)은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곳이다. 평일 오후나 주말이 되면 운동하는 사람들을 아주 많이 볼 수 있다.

바기오에는 채소와 과일이 풍부하다. 고랭지 채소가 풍성하고, 각종 과일을 싸게 구입할 수 있다. 필리핀의 공산품 가격은 상당수가 한국과 크게 다를 바 없지만, 농산품 가격은 대체로 싼 편이고 사시사철 쉽게 접할 수 있다는 특징이 있다.

필리핀 다른 지역들과 마찬가지로, 바기오에는 어렵게 사는 사람들이 많아 행상인들이 많은데, 대체로 마음들이 소박하다. 전반적으로 외국인들에게 친절하고 공손한 편이다. 아마 이런 필리핀인들을 만나게 된다면 필리핀에 대한 인상이 많이 변하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 다만 가난에 찌든 일부 주민들이 범죄를 저지르기도 하는데, 이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내가 바기오에 처음 선교사로 들어갔을 때, 북부한인선교사협회에 150여명 이상의 선교사들이 등재돼 있었다. 가족들까지 포함하면 600여 명에 달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절반도 안 되는 선교사들이 명부에 등재된 것으로 알고 있다. 선교사들이 타 지역으로 흩어진 이유도 있겠지만, 이러저러한 이유로 인해 신변에 변화가 생긴 분들이 많다.

필리핀 바기오
▲필자가 살던 집에서 바라본 바기오. ⓒ채 선교사 제공
얼마 전 해외 선교사들이 오히려 늘었다는 한 신문사의 통계치를 본 적이 있지만, 그것은 그만큼 한국에서 목회자들이 생존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돼 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고, 아울러 안정적으로 재정적 후원을 받고 있는 선교사들보다는 단기선교사나 자급 선교사들이 많다는 생각을 해 본다.

얼마 전 바기오에 다녀왔는데, 예전처럼 한인들이 많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상 바기오는 한인 선교사들로 인해 한인사회가 커졌다고 할 수 있다. 선교사와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한인들이 많았는데, 지금은 필리핀 사회가 안전하지 않다는 국내 뉴스들이 많아지면서 바기오 역시 한인들이 급감했다. 한인교회들의 수도 줄었고, 예배 참석자들도 그리 많아 보이지 않았다.

나는 같이 운동하며 교제를 나눴던 이모 선교사님이 가끔 생각난다. 이분은 GMS 선교사로 파송되기 전 언어연수를 위해 바기오에 1년 동안 머물고 계셨다. 나는 그분께 좋은 선택을 한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바기오는 선교사로 떠나실 분들에게 좋은 언어훈련 장소가 될 수 있다. 선교사들이 선교지로 택한 지역의 환경이 선진국과는 크게 다를 것이므로, 선진국에서의 언어연수는 선교 예비훈련으로는 적합하지 않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에 비해, 선교지 환경과 동일한 필리핀 바기오는 선교 후보생들에게 여러모로 최적의 환경을 제공해 줄 수 있다. 대부분의 주민들이 영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하며, 연음을 구사하지 않는 필리핀 특유의 영어발음은 말문을 트고자 하는 선교 후보생들에게 오히려 좋은 시작이 될 수 있다. 또한, 국내나 선진국에서 누릴 수 없는 일대일 영어수업은 필리핀 영어교육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에는 필리핀 남부의 선교거점도시인 다바오에 대해 나누고자 한다.

채천석 목사
크리스찬북뉴스 대표, 필리핀 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