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이프 오브 워터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사회의 부당한 차별과 억압에 고통받는 이들의 구원 이야기를 다룬 영화다.
사회적 소수자의 구원: 낮은 곳에 임하신 이, 어디까지 낮아지셔야 하는가?


◈구원의 내러티브, <셰이프 오브 워터>(The Shape of Water)

<셰이프 오브 워터>는 차별에 저항하는 영화인 한편, 구원의 신비에 대해 구술하는 영화다. 구원 이야기에는 세 가지 필수요소가 존재한다. 억압하는 자, 구원받는 자, 그리고 구원하는 자. 전편에서는 이 세 가지 요소 중 억압하는 자에 대하여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기독교 창조론을 왜곡해 백인 남성과 서구문명의 절대적 우위를 정당화하는 1960-70년대 미국 주류사회의 차별적 정서는 <셰이프 오브 워터>의 구원 이야기에서 억압하는 자의 역할을 담당한다. 스트릭랜드(마이클 섀넌 분)와 파이가게 점원(모건 켈리 분)은 이런 차별과 억압의 화신으로 등장한다.

이들의 반대편에는 구원받는 자와 구원하는 자가 굳건하게 맞서고 있다. 이들은 구원의 사역을 중심에 둔 채 서로 끊을 수 없는 긍휼과 애정의 관계 속에서 억압을 감내한다. 그리고 마침내 구원이 완성되는 그 시점에 압제하는 자로부터 승리를 쟁취한다.

이 영화에 기본 모티프를 제공하는 안데르센(Hans C. Andersen)의 동화 <인어공주>(Den lille Havfrue)의 비극적 결말과 달리, <셰이프 오브 워터>의 결말은 명백한 해피엔딩이다.

스트릭랜드는 죽음을 맞이하고, 괴생물체와 엘라이자(샐리 호킨스 분)는 부활과 해방을 맞이한다. 영화는 충만한 구원의 기쁨을 자축하는 것으로 대미를 장식한다. 도입부에서는 <인어공주>의 모티프를, 그리고 결말부에서는 기독교 구원론을 차용하고 있는 것이다.

구원 사역은 구원을 갈망하고 요청하는 자들에게만 그 진체(眞體)를 드러낸다. 이는 성서 전체를 통해 끊임없이 확인되는 사실이다.

구원하는 자는 항상 억압과 핍박에 신음하는 자, 부당하게 고통받는 자, 노예된 자, 죽음의 위협에 처한 자, 병약한 자, 물질적으로 궁핍한 자, 좌절하고 낙심한 자, 그리고 이 모든 고난들로 인해 '심령이 가난한' 자(마 5:3)에게 찾아온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가장 낮은 곳에 임하신다는 기독교 공통의 정서는 바로 이런 성서적 근거를 확보하고 있다.

오늘날에도 구원의 사역은 세상의 낮은 곳에서 가장 왕성하게 일어난다. 이는 교파 및 교단을 불문한 기독교계 전체가 사역의 현장에서 일상적으로 확인해 온 불가역적 사실이다. 진정으로 '마음이 가난한' 이들이 모인 곳에서는 회개와 회심의 역사가 가장 강력하게 일어난다.

기독교 역사 전체를 통해 확인된 바, 사회적 소수자들 가운데 회심의 역사가 불일듯 일어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부당한 억압, 차별, 위협, 고통에 신음해 온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다른 어떤 것으로부터도 획득할 수 없는 구원의 소망을 주셨고, 심령이 가난한 자들은 이 소망에 절박하게 기대어 왔다.

셰이프 오브 워터
▲<셰이프 오브 워터> 속 구원의 이야기는 괴생물체의 등장과 함께 시작된다.
여기에서 한 가지 난감한 물음이 제기된다. 사회적 소수자는 그 양태를 불문하고 무조건 부당하게 억압받는 자로 여겨질 수 있는가? 그리스도께서는 어떤 이들을 심령이 가난한 자로 취급하셨는가?

궁극적으로 <셰이프 오브 워터>에서 괴생물체와 엘라이자를 통해 은유적으로 지목된 성소수자들은 심령이 가난한 자로 인정될 수 있는가? 그들에게서 불일듯 일어나는 회개와 회심의 역사를 찾아볼 수 있는가?

이에 대한 기독교계의 신학적-윤리적 담론은 이미 그 전체적인 윤곽을 제대로 확인하기 어려울 만큼 맹렬한 기세로 진행 중이라, 이 짧은 지면 속에 추가적으로 언급하기 부담스러울 따름이다.

여기에서는 주로 기독교적 관점의 문화비평을 시도하고 있는 만큼, 문화 방면에 집중된 답변을 제시하는 것이 이런 부담을 덜어주는 적절한 방편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렇게 문화비평 차원의 답변을 제시하려 할 때 주목해야 할 작품이 있다. 러시아 대문호 톨스토이(Лев Никола́евич Толсто́й)의 단편, <사랑이 있는 곳에 신도 있다>(Где любовь, там и Бог)가 그 주인공이다.

◈구원과 가난한 자: 낮은 곳에 임하신 그리스도

톨스토이는 위대한 문필가인 동시에 세계 여러 곳의 평화주의자, 박애주의자들에게 영향을 준 위대한 기독교 사상가이기도 하다. 마하트마 간디(महात्मा गांधी),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 넬슨 만델라(Nelson Mandela) 등 자유와 평화를 위해 투쟁한 20세기의 위대한 인물들 대부분은 젊은 시절 톨스토이의 사상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톨스토이의 대표 장편 소설인 <전쟁과 평화>(Война и мир), <부활>(Воскресение), <안나 카레니나>(Анна Каренина)등이 지목되지만, 이 세 작품 가운데 한 편이라도 제대로 완독한 이를 찾기란 쉽지 않다.

사실 국내에서 톨스토이의 작품은 장편보다 단편이 더 친숙하다. <바보 이반>(Иван-дурак),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Чем люди живы?), <사람에게는 땅이 얼마나 필요한가>(Мно́го ли челове́ку земли́ ну́жно?) 같은 작품은 어린 시절 한 차례쯤 읽어 보지 않은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하다.

이 가운데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는 기독교적 사랑의 메시지와 감동적 서사로 톨스토이의 단편들 중 가장 높은 평가를 받는다. 이 작품 다음으로 기독교적 관점에서 높게 평가되는 작품이 바로 <사랑이 있는 곳에 신도 있다>라는 글이다. 이 단편 소설의 간략한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이 있는 곳에 신도 있다>의 주인공 마르틴. 성경을 통해 참된 신앙을 알게 된 인물이다.
주인공 마르틴은 평생 구두장이로 살아 왔다. 그는 젊은 시절 아내와 두 아들을 병으로 잃고, 남은 막내 아들 하나만 사랑으로 보살피며 살아 왔다. 그러나 이 막내 아들도 어느 정도 장성했다 싶은 시점에 열병을 앓다 죽었다.

이 일로 실의에 빠진 마르틴은 삶의 희망을 잃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교회에도 더 이상 나가지 않으며 일찍 죽기만을 바란 채 아무 의욕 없이 살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날 동향의 노인의 권유로 성경을 읽게 된 마르틴은 점차 하나님의 말씀에 몰두하게 된다.

그는 하나님을 원망하기를 그치고, 자기만 생각하고 살았던 것을 뉘우치기 시작했다. 성경에서 향유옥합을 깬 여인의 이야기를 읽은 어느 날, 마르틴은 자기도 그와 같이 주님을 영접하고 싶다는 열망에 사로잡혔다.

그날 밤, 기도를 마치고 잠자리에 막 들어선 마르틴에게 또렷한 음성이 들렸다. "마르틴아! 내일 네가 사는 곳으로 내가 가겠다." 음성을 들은 마르틴은 어안이 벙벙한 상태로 잠이 들었다가, 다음 날 내내 그리스도께서 혹시 집으로 찾아오시는지 살피며 기다리게 되었다.

그러나 기다리던 그리스도는 찾아오시지 않고, 매번 동네에서 마주치는 가난한 퇴역군인 스체파니치, 한겨울에 여름옷을 입은 채 아이를 안고 떨고 있는 여인, 동네 노파와 그 노파로부터 사과를 도둑질하려던 어린 소년 등을 맞이해 들였을 뿐이었다. 마르틴은 이들의 처지를 불쌍히 여겨 따뜻한 난로 옆에 데려와 마실 것과 먹을 것을 주고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전했다.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이 있는 곳에 신도 있다>. 갈 곳이 없어 거리에서 떨고 있는 여인과 아기를 돕는 마르틴.
그날 밤, 다시 성경을 읽으려 자리에 앉은 마르틴의 뒤로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물어보셨다. "마르틴아, 너는 나를 알아보지 못하였느냐?" 고된 삶을 사는 노년의 퇴역 군인, 아기와 함께 거리에 나앉은 여성, 그리고 사과를 훔친 소년을 용서해 준 노파가 바로 마르틴에게 찾아온 그리스도였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응답을 들은 마르틴은 기쁜 마음으로 감사를 드리고 성경을 읽는다.

신학적 관점으로 본다면, 이 작품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관련하여 논란의 소지를 다분하게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신학적 문제점이 이 단편에 담긴 교훈적 가치를 훼손하지는 못한다.

<사랑이 있는 곳에 신도 있다>는 그리스도께서 찾아오시는 세상의 가장 낮은 곳,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 모여 사는 곳, 그곳이 어디인지 확인할 단서를 제공한다는 점 때문에 기독교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다.

톨스토이가 이 작품에서 가르치는 바에 의하면, 심령의 가난함이란 단지 세상으로부터 차별받는 것 하나로만 성립되는 조건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감화되기 전의 마르틴과 같이, 차별이나 불행 때문에 하나님과 세상을 원망하는 이들에게는 심령의 가난함이라는 조건이 형성되지 않는다.

마르틴은 그 날 세 번 그리스도를 영접하던 순간에 단지 호의만 베풀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호의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부터 유래된 것임을 밝혔고, 마르틴의 도움을 받은 이들 역시 주의 은혜를 전적으로 인정하고 주께 감사를 돌렸다. 마르틴이 늙은 퇴역군인 스체파니치를 맞이할 때 나눈 말은 심령이 가난한 이들의 조건을 분명하게 밝혀주고 있다.

"자, 기운내게. 이 차를 한 잔 더 마시게나! 내가 생각하건대 그리스도가 이 세상을 두루 돌아다니셨을 때는 이런 사람 저런 사람 가리지 않고, 신분이 낮은 사람들을 오히려 더 보살펴 주셨을 것이 틀림없어. 언제나 가난한 사람들을 상대하시고 제자도 우리네 같은 사람, 우리네와 같이 죄 많은 기술자 가운데서 제자를 두셨지. 마음이 교만한 자는 오히려 아래로 떨어지며 마음이 가난한 자는 오히려 위로 올라간다고 말씀하셨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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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있는 곳에 신도 있다>. 퇴역군인 스체파니치에게 그리스도에 대해 이야기하는 마르틴.
◈구원과 사회적 소수자: 낮아진다는 것, 겸비와 타락의 경계

이제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로 돌아와 보자. 서사의 중반부까지, 그러니까 괴생물체와 엘라이자가 서로를 이성으로 바라보기 전까지, 이 영화는 기독교적 관점으로 봐도 세상의 낮은 곳으로 인정되기에 무리가 없는 풍경을 그려내고 있었다.

이 시점까지 구원하는 자는 엘라이자였고, 구원받는 자는 괴생물체였다. 비밀 실험실의 청소부로 일하던 엘라이자는 남미 오지에서 포획돼 실험재료로 끌려 온 괴생물체를 세탁물 꾸러미에 숨겨 밖으로 탈출시킨다.

그 스스로도 세상으로부터 천대받던 엘라이자(볼품없는 외모, 여성, 언어장애인, 고아)가 고문과 학대에 시달리던 괴생물체를 강력한 압제자 스트릭랜드로부터 용감하게 구원해 낸다는 점에서, 실험실에서의 탈출 장면은 낮은 곳에 임한 이의 구원 사역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둘 사이의 육체적 결합이 개시되는 장면으로부터, 델 토로(Guillermo del Toro) 감독은 구원하는 이와 구원받는 이가 함께 거하는 곳, 세상의 가장 낮은 곳, 심령이 가난한 이들이 사는 그곳에 성소수자들을 난입시킨다.

<셰이프 오브 워터>는 이 시점으로부터 세상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비상(非常)한 양태의 성적 결합을 사랑의 행위로 규정하며, LGBT를 부당하게 차별받는 자와 억압받는 자의 범주에 편입시킨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이성 간 에로스적 사랑으로 맺어진 괴생물체와 엘라이자로 은유된 성소수자들은 미국 주류 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백인남성 우월주의 기독교 가치관이 가하는 억압을 심판하고 승리와 해방을 맞이한다.

스트릭랜드는 탈출한 괴생물체와 엘라이자를 찾아내 권총으로 사살하지만, 괴생물체는 뛰어난 재생능력에 힘입어 숨이 멎었다가도 다시 부활하는 한편, 스트릭랜드의 목을 손톱으로 그어 살해한 뒤, 자신이 가진 재생력을 통해 숨이 끊어진 엘라이자 또한 물속에서 부활시킨다.

셰이프 오브 워터
▲<셰이프 오브 워터>. 부활한 괴생물체. 이 시점으로부터 괴생물체는 구원하는 이의 표상이 된다.
이 마지막 장면에서, 괴생물체와 엘라이자 간의 입장은 역전된다. 이전까지는 괴생물체가 구원받는 자였고 엘라이자가 구원하는 자였다. 그러나 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이제 엘라이자는 구원받는 자가 되고 괴생물체는 구원하는 자가 된다.

자신이 쏜 총탄에 숨이 멎은 괴생물체의 부활을 목격한 스트릭랜드의 대사가 이를 입증한다. "너는 신이었구나(You are a god)."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처음으로 다시 만난 자리에서 제자 도마가 고백한 말(요 20:28, ὁ θεός μου, ho theos mou)을 모방한 이 대사는, 낮은 곳에 임한 신을 몰라본 스트릭랜드에게 내려지는 죽음의 형벌을 정당화한다. 이렇게 괴생물체와 엘라이자 간에 이루어지는 역할 교환은 <셰이프 오브 워터>가 전달하는 메시지를 보다 의미심장한 것으로 만든다.

죽음에서 부활해 위기에 처한 이들을 구해내는 초월자의 모티프는 기독교 구원론을 서사에 차용한 헐리우드 영화들의 대표적 공통점이다. <셰이프 오브 워터>는 이 구원자의 형상에 LGBT의 이미지를 덧입힌다. 이로써 이 영화는 성소수자들을 구원받아야 할 자인 동시에 구원하는 자로 내세운다.

현재도 여러 곳에서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는 점 때문에 이들은 구원을 받아야 할 자들로 제시되는 동시에, 스스로 앞장서 성소수자 인권보장 정책을 획득해내고 있다는 점에서 기독교적 가치로부터의 구원자 및 해방자로도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이에 기독교적 관점에서 되묻고 싶은 바가 있다. "대체 그리스도는 어디까지 낮아지셔야 하는가?" 앞서 소개한 톨스토이의 단편 <사랑이 있는 곳에 신도 있다>를 상기해 보자. 불행하고, 고되고, 빈한한 삶 속에서도 그리스도의 방문과 구원의 은혜를 감사함으로 기다리는 이들의 심령과, 성적 욕망의 불만족에 스스로의 마음을 괴롭게 하는 이들의 심령을 동일하게 취급할 수 있는가?

그리스도께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들을 구원하기 위해 스스로 세상의 가장 낮은 곳에 임하셨다. 성서는 이를 그리스도의 자기비하(κένωσις, kenosis)로 명명한다(빌 2:7). 그런데 이렇게 자기를 낮추고 비우심이 과연 어디까지 허용되는 것인지, <셰이프 오브 워터>가 던진 대답을 눈앞에 두고, 기독교인 입장에서 다음과 같이 되묻지 않을 수 없다.

혹시 이 영화는 겸비와 자기비하의 개념을 심각하게 오해한 것은 아닌가? 참된 인류애와 긍휼의 지경을 넘어, 성적 결합에 대한 욕망이 지배하는 데까지 낮아지는 것은 겸비가 아니라 타락이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 이로써 이 작품은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의 본모습을 심각하게 왜곡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셰이프 오브 워터
▲<셰이프 오브 워터>의 델 토로 감독. 그는 이 작품에서 부활한 구원자의 표상 위에 LGBT의 이미지를 덧입힘으로써 성소수자들을 세상의 가장 낮은 곳에 거하는 이의 화신으로 그려내고 있다.
박욱주 박사(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 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내신 분들은 쉽게 공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