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성경의 난해한 내용 중 하나가 하나님의 심판이 아닌가 합니다. 그 중에서도 악인과 의인에 대한 심판 경륜이 특히 그러합니다. 행위를 심판 잣대로 삼는 악인들에 대한 경륜은 지나치게 엄격해 보이며, 믿음을 심판 잣대로 삼는 의인들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관대한 듯해 보입니다. 아마 이 심판의 난해함을 제대로 이해하면, 전체 기독교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질 수 있으리라 봅니다.

다음은 예시가 될 만한 성경 구절입니다. "그 많은 '허물'로 인하여 저희를 쫓아내소서... 오직 주에게 '피하는(믿는)' 자는 다 기뻐하며 주의 보호로 인하여 영영히 기뻐 외치며(시 2:10-11)." 하나님이 악인들은 그들의 '허물'을 보고 심판하시고, 의인들은 '믿음'을 보고 구원하신다는 뜻입니다. 일견 하나님이 악인과 의인에 대해 잣대를 달리 적용하는 듯합니다.

혹자는 악인과 의인에 대한 이런 이중 잣대를 철폐하고자, 믿음을 범인(犯人)이 도달할 수 없는 고차원의 의행(義行)으로 굴절시킵니다. 즉 악인은 그들의 악 때문에 심판을 받고, 의인은 그들의 고차원의 의행으로 구원받는 것으로 변개시켜, 의인 악인을 불문하고 공의가 유일한 심판 잣대가 되게 합니다. 그리하여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는 말을 "고차원의 의행(義行)으로 구원받았다"로 변개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말 그대로 믿음이며, 행위가 될 수 없습니다. 만일 믿음이 행위가 되면, 이신칭의 교리를 비롯해 성경의 중요 교리들이 훼손됩니다. 주지하듯 믿음은 자기에게는 구원받을 만한 의(義)가 없음을 알고,-율법으로 자신을 판단하지 말 것을 하나님께 호소하며-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비를 붙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이 그에게서 심판이 거두어지게 합니다.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원리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이 악인으로 정죄받은 것은, 그들에게 용서받지 못할 흉악한 죄악이 있어서도 아니고, 하나님이 그들을 엄격한 공의로 다스린 때문도 아닙니다. 그들이 자처하여 율법 아래 들어가 스스로를 정죄에 빠뜨린 것입니다.

그들은 의가 없는 죄인임에도 그리스도 안에서 제공되는 하나님의 의(義)를 거부하고, 자기 의로 하나님께 어필하다가(사실 이는 하나님이 율법대로 자신의 행위를 판단해달라는 호소입니다) 율법의 정죄아래 떨어진 것입니다(롬 3:20).

그들이 악인으로 정죄된 것은, 율법대로 자신의 행위를 판단해달라는 그들의 요청에 하나님이 응답하신 것이므로, 하나님을 탓할 계제가 못됩니다. 성경의 표현을 빌리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하므로, 스스로 율법의 정죄아래 들어가 심판의 돌에 부딪힌 것입니다.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롬 9:30-32)." '악인이 지옥에 들어가는 것은 하나님이 보낸 것이 아니라 제발로 스스로 들어간 것'이라고 한, 어느 신학자의 말을 상기시키는 대목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정확한 이해를 가지려면, 무엇보다 악인, 의인에 대한 개념 정립이 필요합니다. 흔히 생각하듯, 성경은 악인을 도덕적 흉악범으로, 의인을 순결무구한 무죄자로 규정하지 않습니다. 믿지 않은 죄를 가장 극악한 죄로 규정하는 성경의 전제에 따른다면, 악인은 불신자이고 의인은 신자입니다.

이미 여러 차례 언급했듯, 불신이 악(惡)임은 두 가지 점에서입니다. 첫째, 불신은 믿음의 근간인 "하나님 아들과 언약의 피와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한 죄"이기 때문입니다(히 10:28-29, 롬 3:25-26). 둘째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의를 입지 못해, 그의 죄행(罪行)이 낱낱이 하나님 앞에 노출되기 때문입니다(여기선 둘째에 한정지어 생각하려고 합니다).

죄인 됨과 의인됨은 그가 얼마나 순진무구하냐에 의해서가 아니라, 죄의 가리움을 받았느냐 못 받았느냐로 결정된다는 뜻입니다.

원죄를 타고난 생득적인 죄인인 인간은, 스스로의 노력으로 죄인 됨의 굴레를 벗을 수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믿어 죄의 가리움을 받는 길 뿐입니다. 이 점에서 믿음은 죄를 가리우는 옷입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양의 가죽옷을 입히신 것(창 3:21), 왕자의 혼인 잔치에서 예복입지 않은 자가 추방된 것(마 22:11-14), 그리고 이신칭의 교리 등은, 모두 믿음으로 죄의 가리움을 받는 것을 시사합니다.

믿지 않는 것은 의의 예복을 입지 않은 것이기에, 율법 앞에서 죄가 적나라하게 드러나 악인으로 정죄되지만, 흉악한 죄인도 믿음으로 죄가 가려지면 정죄를 당치 않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께로 가면 나는 기뻐요"라고 찬송하는 것은, 그에게 피하면 죄의 가리움을 받아 정죄를 안 받기 때문입니다. 이 죄의 가리움을 성경은 복이라 명명합니다. 복의 근원 아브라함(창 12:2)과 그의 복에 참여하는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받는 복의 실체가(갈 3:9) 바로 이것입니다.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롬 4:6-8)",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은 자는 복이 있도다(시 32:2)."

다시 말하지만, 인간이 악인 되고 의인되는 것이, 그에게 특별한 악행이 있느냐 없느냐, 죄가 많으냐 적으냐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나름대로 바르게 산다고 자부했던 바리새인, 서기관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들"이라 독설했던 것은, 사람들이 모르는 숨겨진 죄를 비로소 예수님이 찾아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은 정말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율법적 의(?)를 가졌음에도, 죄의 가리움을 받지 못해 악인으로 정죄된 것입니다.

반면 예수님이, 자기의 의(義)없음을 한탄하며 가슴을 치던 죄 많은 세리에게 "바리새인보다 더 의롭다(눅 18:10-14)" 해 주시고, 죄인으로 손가락질 받았던 삭개오를 향해 "네가 오늘 아브라함의 자손이 됐다(눅 19:9)"고 선언해 주신 것은, 그들의 믿음이 그들의 많은 죄를 가려주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도덕적으로 아무리 선량해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의 가리움을 받지 못한 자는, 언제 지옥 멸망에 떨어질지 모르는 아슬아슬한 운명에 처해 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의 말처럼, 단두대에 목을 올려놓고 집행관의 사인을 기다리는 사형수에 비견됩니다. 하나님의 사인이 떨어지는 순간 그의 영혼은 신속히 지옥의 영벌에 떨어질 것입니다.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 진노가 급하심이라(시 2:12)"는 말씀 역시, 아들 그리스도께로 피하지 않아, 죄의 가리움을 받지 못한 이들에게 떨어질, 하나님의 진노를 경고한 것입니다.  

루터(Martin Luther)가 종교개혁의 깃치를 들며 내걸었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7)"는 말씀은,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은 전혀 죄를 짓지 않아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죄가 가려져 정죄를 당치 않음을 의미했습니다. "죄가 너무 많아 지옥 가는 법 없고, 죄가 없다고 천국가지도 않는다"는 교회 속담(Church Proverb) 역시, 천국과 지옥은 죄의 유무(有無), 죄의 다소(多少)에 의해서가 아니라, 죄의 가리움을 받았느냐 못받았느냐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결론적으로, 모두(冒頭)에 "악인은 자기 죄행 때문에 심판받고, 의인은 믿음 때문에 구원받는다"라고 한 것은, 악인과 의인에 대해 다른 잣대가 있음을 말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 명명백백해졌습니다. 자기 의(義)를 내보이는 자에게는, 율법이 그의 죄를 노출시켜 악인으로 정죄하고, 믿음을 내 보이는 자는 하나님의 자비로 그의 죄가 가려져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뚯이었습니다.

사람이 악인이 되는 것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고 스스로 자처한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쉽게 풀어 쓴 이신칭의(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