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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로마서 3장 10절)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누가복음 12장 2절)

자신이 성범죄 피해자임을 공개적으로 알리는 소위 '미투(Me Too) 운동'이 사회 전반을 강타하고 있다. 주로 문화·예술계 인물들의 이름이 오르내리지만, 최근 종교계에까지 번졌다. 게다가 국제 구호단체들도 성범죄 스캔들에 휘말렸다. 성역(聖域)은 없었다.

성(性)은 매우 원초적인 인간의 본능인데, 두 얼굴을 하고 있다. 사랑하는 두 남녀로 하여금 생명을 잉태케 한다. 그러나 잘못 사용하면 나도 남도 모두 더럽힐 수 있는 게 또한 성이다. 그렇기에 성은 성숙(成熟)한 자에게 주어져야 한다. 하나님께서 먼저는 "생육하라"고 하신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불행히도 인간은 성을 종종 잘못 사용한다. 유혹에 쉽게 흔들리기 때문이다. 미투 운동은 그런 인간의 단면을 여실히 보여준다. "설마" "그럴리가" 했던 이들이 추문에 휩싸인다. 우리 사회 도덕의 마지막 보루라 믿었던 이마저 그런 실망을 안겼다. 그렇다. 바울이 고발하듯, 의인은 없다, 하나도.

기독교의 '인간론'은 이처럼 죄인인 인간의 실존을 직시한다. 냉혹하리만큼,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갠다. 그렇게 낱낱이 들추어낸다. 그래서 기독교가 인간 사회를 보는 시각은 기본적으로 부정적이다. 함부로 긍정하지 않는다.

인간은 여기에 솔직해야 한다. 그 때야 비로소 주님 앞에 무릎을 꿇을 수 있는 까닭이다.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고백인가.

하지만 교만한 인간은 자주 스스로 의롭다 여긴다. 위선(僞善)이다. 회칠한 무덤일 뿐이다. 덧칠해진 회를 걷어내고 무덤을 직시해야 한다. 지금 벌어지는 미투 운동이 우리에게 던지는 하나의 메시지다.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를 어떻게 떨쳐낼 수 있었을까? 다름 아닌 하나님 때문이다. 그녀와 나 외에 아무도 없을 지라도 그 분이 보고 계신다는 두려움, 그것이 바로 위대했던 요셉의 신앙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기독교 가르침의 본질이자 힘이다. 하나님이 필요하다는 것. 인간 홀로는 설 수 없다는 것.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라는 것.   

그리고 감추고 숨긴 것은 언젠가 반드시 드러난다. 미투 운동의 또 하나의 메시지다. 하나님은 그렇게 공의로 이 세상을 다스리신다. 그런데 어리석은 인간은 감추고 또 감추며, 숨기고 또 숨긴다. 하나님의 낯을 피할 수 있으리라는 착각 속에서.